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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자들, PD들/허광준의 '메스 미디어'

이메일이 '편지'가 아니라 '엽서'인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5. 7.


주> '시사저널 사태' 당시 '경영진의 삼성기사 삭제사건'에 항의해 파업을 벌이며 '편집권 독립'을 외쳤던 <시사IN> 기자들은 언론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사IN> 지면에도 '메스미디어'라는 고정란을 두고 다양한 앵글로 우리 언론과 언론 정책 관련 문제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기자출신인 허광준(위스콘신대학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님과 이광석(성공회대 겸임교수) 님, 그리고 PD저널 편집국장이신 민임동기님(개인 블로그가 있으시니, 재게재 하는 방식으로 올리겠습니다) 등이 연재를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독설닷컴'을 통해서도 소개하겠습니다.



이메일이 '편지'가 아니라 '엽서'인 이유

글 - 허광준 (위스콘신대학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물건이란 대개 유형의 개체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물건이라고 하지는 않고, 신뢰나 사랑과 같은 추상적 개념도 그렇고, 귓속말이나 수신호 같은 것도 물건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럼 이메일은? 사이버 공간에서 비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이메일은 ‘물건’인가? 한국 검찰이나 법원 일각이 보기에는 그렇다.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수사 대상자 1백여 명의 이메일을 압수해 열람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압수 대상자의 엄청난 규모도 놀랍지만, 개중에는 7년 동안 주고받은 이메일을 모조리 압수한 경우까지 있었다. 이는 검찰이 이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 업체들에 기간을 명시하지 않고 이메일 기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검찰이 압수한 이메일 분량은 4만 1천3백여 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막무가내식 압수 수사는 검찰과 법원 일부가 개인의 이메일을 통신 수단이 아닌 ‘물건’으로 강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이메일(전자 우편)을 ‘전기 통신’의 일부로 명시하고 있으며, 수사의 목적을 위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이메일 내용을 열람하는 감청 행위에 여러 제한을 두어 규제하고 있다. 예컨대 감청은 범죄 수사를 위해 보충적인 수단으로 이용해야 하며 통신 비밀에 대한 침해가 최소한에 그치도록 해야 한다든가, 법원에 감청 허가를 청구할 때 감청의 목적, 대상, 범위, 기간, 집행장소, 방법, 허가 요건을 충족하는 사유 등이 명시된 청구서는 물론이고 청구 이유에 대한 소명자료까지 첨부하여야 한다든가, 30일 이내에 당사자에게 통지하여야 한다든가 하는 요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검찰이 보인 싹쓸이 압수는 이러한 통신비밀보호법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다. 개인간의 이메일을 ‘물건’으로 보아, 통비법 상의 감청 대상이 아니라 형사소송법 상의 압수 수색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법 당국은 “송수신이 끝난 전자 우편은 물건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자면, 당신이 새로 도착한 이메일을 읽는 순간, 이 이메일은 통신 메시지가 아니라 물건으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 이메일은 더 이상 비밀스런 통신 수단이 아니다

이메일에 대한 통신 보호의 수위는 미국에서도 뜨거운 논란거리중 하나다. 비교적 최근에 내려진 미국 법원의 판단 중 하나는, 이메일 회사의 계정에 보관된 이메일들은 무분별한 수색과 압수를 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미국 수정헌법 4조의 보호를 덜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내린 근거가 중요하다. 미국 법원은 이메일과 관련한 프라이버시가 다른 개인 통신에 비해 이미 상당히 느슨해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메일에 대한 보호는 개인 사용자와 이메일 회사 사이에 맺은 계약(약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반 우편물에서와 같이 단일하고도 강력한 프라이버시 보호 대상으로 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서 주고받는 이메일을 회사가 다 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판단은 “이메일은 사적인 통신 수단이다”라는 일반 통념을 뒤흔든다. 이메일이 개인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런 통신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해다. 이메일은 빠르고 효율적이고 저렴한 통신 수단이지만, 내용이 언제든 공공연히 노출될 가능성을 그 대가로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메일은 편지 봉투에 든 편지가 아니라 내용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엽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메일이 분명한 통신 수단으로서 통신비밀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송수신이 끝난’ 이메일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메일을 읽자마자 깡그리 지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메일을 방대한 자료 보관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 받은 편지함에 들어 있는 이메일도 물건이 아니라 분명한 통신 행위의 대상인 것이다.

아울러, 법원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메일이 편리한 것은 사용자에게도 그렇지만 수사 기관에게도 그렇다. 수사 당국이 개인 이메일을 손쉽게 무작위로 대량 확보해 수사에 써먹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헌법 정신이나 기본권 취지에 따라 이런 관행을 규제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법원이다. 영장이나 청구서의 발부 여부를 법원이 결정하도록 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