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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언저리뉴스

금뱃지 떨어진 국회의원들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9. 11.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가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잃은 의원과 재판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한 의원 숫자가 15명입니다. 
한나라당 4명(구본철·윤두환·허범도 박종희), 민주당 3명(정국교·김세웅 이광재), 친박연대 3명(서청원·양정례·김노식), 창조한국당 1명(이한정), 무소속 2명(이무영·김일윤) 등인데, 참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 최근에 법원 재판에 의해, 혹은 재판을 앞두고 
금뱃지가 떨어진, 혹은 자진 반납한 국회의원이 두 명 있습니다. 
한나라당 박종희 의원과 민주당 이광재 의원입니다. 

이들에게서 온 메일이 있어 올려봅니다.
(저한테만 보내는 사적 메일이 아니라 보도자료 형식으로 보낸 공적 메일이므로...) 

재판 결과나 진행 과정을 보면 그냥 찌질한 사건 같은데,
(이광재 의원의 사퇴는 구속재판을 면하기 위한 '플리바기닝'으로 보이는데...)
당사자 글을 읽어보면 억울한 것 투성이고 사뭇 비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서 읽어도 감정의 동화가 일어나지 않네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공감이 좀 가시나요?


주> 댓글에 보니
'이광재는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자진 사퇴했으니 선거법 위반 사범인 박종희와는 다르다'라고 지적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광재 의원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자진 사퇴했다고, 그런 식으로 이해해 줘버릇하면 저쪽 사람들이 심하게 비웃습니다.
현재 상황에서의 의원직 사퇴가 의미하는 바는 딱 한 가지, 유죄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계셨다면, 무죄인데 사퇴한다, 라고 했을 때 심하게 질책하셨을 것입니다.

때로 버릴 카드는 버릴 줄 아는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썩은 사과를 광주리에 함께 넣으면 멀쩡한 사과도 함께 썩습니다.
노무현 정신이 이어지길 바란다면, '읍참 광재'하는 냉정함을 갖기 바랍니다.
어설픈 온정주의는 일을 그르치기만 할 뿐입니다.
지금은 이광재 의원에게 손을 내밀 타이밍이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종희입니다.


저는 오늘로 16,18대 국회의원으로서 정들었던 의사당을 떠나게 됐습니다.

2007년 11월말부터 시작된 선거법위반 수사와 재판과정에 힘겨워하던 제게

한 선배의원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박의원! 재판 받는 것 맞아?”라고 말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처해야 하고

또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률안들이 산적한

국회 정무위의 여당의 간사를 맡고 있었기에,

어디 가서 재판 때문에 힘들다고 말 한마디, 한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의 문제 때문에 공적인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홀로 법정투쟁을 벌여왔습니다.

무죄라고 확신했기에 대법원에서는 저의 억울함이 풀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정치판이라는 험한 곳에서 나름대로 원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냄새가 나는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재판으로 제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가치들은 빛을 바랬고,

법을 어겨 선거운동을 했다는 부도덕한 낙인까지 찍혀버렸습니다.

재판의 결과보다 더 참을 수 없고,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된 당협내 친목모임의 돈 씀씀이까지

제가 모두 책임져야하고, 하지도 않은 사전선거운동을 했다는 굴레는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핵심 증인신청도 거부된 채 고등법원 재판은 두 번의 심리로 끝나버렸고,

사실관계가 아닌 법리만을 다루는 대법원에서 그 결과가 바뀔 수는 없었습니다.

피고인의 변론권이 이처럼 무시되어도 되는 것인지

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관련 법정비가 시급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는 작은 이득을 보자고 지켜야 하는 것들을 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억울하고 또 억울합니다.

하지만 어디에 더 호소하겠습니까?

이젠 이 모든 것을 제 부덕의 소치로 돌리고자 합니다.

그 누구도 원망치 않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저 혼자 묵묵하게 견디고 나아가겠습니다.

제가 불합리한 선거법과 현행 법원의 잘못된 구조 때문에 생기는

마지막 희생자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록 법적으로는 상처투성이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제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과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야를 떠나 우리 국민 모두는

우리 아이들이 이어받을 대한민국의 번영과 성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그 디딤돌입니다.

 


저는 제 위치가 어떠하건 간에 굳건한 디딤돌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끝까지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처럼

아픔을 이겨내고 한나라당과 여러분의 곁에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동안 많은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재판받느라고 제대로 차 한 잔도 함께 하지 못한 결례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뵐 때까지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9년 9월 10일

박 종 희 드림

 

이광재 최후 진술서입니다. 
 

1. 저는 우리나라가 품격 있는 나라, 좋은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 변호인 중에는 저와 생면부지인 분이 한 분계십니다.
저기 계신 이광철변호사입니다.
이광철변호사는 변론활동을 하러 구치소에 면회를 다니던 중,
“이광재를 불면 봐준다고 한다. 난리다”라는 이야기를 재소자로부터 듣고,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서 ‘이건 아니다’ 싶어 저희에게 “조심하라”고 얘기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 이 법정에서 저를 변론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입니다.
이것 말고도 제가 들은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만
제가 사랑하는 이 나라의 품위를 위해서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생기는 이 정치보복의 희생자는 제가 마지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성한 법정의 명령으로 이 비극적 굴레를 끊어 주시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2. 저는 꿈이 있었기에 노무현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금품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대처했습니다.

저는 강원도 산골 출신입니다.
어릴 적 저희 집에는 TV가 없었습니다.
TV를 보려면 동네 부잣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탤런트 태현실씨가 주인공인 <여로>라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누나와 함께 그 집으로 갔다가 매몰차게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은
제 마음에 깊이 남아 가난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노력하면 극복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가난을 내 힘으로 극복하고, 다른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청계천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도 갔습니다.

제 나이 스무 세살에, 막 국회의원에 당선된 마흔 두 살의 노무현의원을 만났습니다.

199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날 밤,
저는 호남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나라에 지역감정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나 같은 지역감정 피해자들이 애를 더 낳는 길밖에 없다.”
그 일을 겪은 후 저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의 철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많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분의 곁에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그 분의 철학을 살리기 위해 일했습니다.
마침내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되었습니다.
고시출신 중에서도 우수한 평가를 받은 부처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회사의 존폐를 가지고 압박을 하면 99%는 없는 이야기라도 만들어 내어 회사를 살린다. 꿈이 있다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라.”
“정권 후를 염두에 두고 더 조심해라. 당신도 어쩔 수 없이 타깃이 될 것이다.”

저는 이 분들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조심 또 조심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특별검사를 임명한 여섯 번의 수사 중에 무려 두 번이 저를 수사대상으로 삼았고 그 수사비에 무려 30억 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없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박연차 회장이 주는 돈을 저는 단연코 거절했습니다.

2002년, 2003년, 그리고 2004년은 의원회관에서, 2006년은 부산 롯데, 남산 하얏트 호텔에서 저는, 면전에서 직접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때 마다 언제나 밀고 당기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박 회장께서 “진짜 서운하다. 나를 못 믿느냐? 못 믿기 때문이냐?”라고 까지 하여, 미안한 감정이 들어 제가 직접 음식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거절하였습니다.

술을 먹어도, 박 회장 등 금품이 오고갈 가능성이 있는 분들을 만날 때는 거의 술을 안했습니다.
흐트러진 상태에서 형님 동생하며 실수할 상황을 방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박 회장께서는 지금도 제가 술을 못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6년 동안 골프도 치지 않았습니다.
만나자는 사람이 누구를 데리고 올 지도 모르고
제 골프 값만 내고 나온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골프 값 몇 십 만원이라도 신세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될 때는 고향 강원도, 하나된 대한민국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싶었습니다.
2018년 2월 남북이 동시 개최하는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날,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싶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전기를 만들고, 강원도가 다시 태어나는 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금품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돈 안드는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역구를 돌 때는 마을회관에서도 숙박을 해결했습니다.
조직으로 지역구를 관리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저는 발로 뛰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저는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비판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치인은 무조건 돈을 받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이 유죄가 입증될까지는 무죄라면,
정치인은 무죄가 입증되어도 유죄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정치인 중에도, 법조인과 관료들처럼 꿈을 지키기 위하여,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한 인간으로서, 한 정치인으로서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 너는 언론에서 주목할 정도의 전정권 실세였다. 2, 너는 정치인이다. 3, 고로 너는 돈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단순 삼단논법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법은 한 사람의 선량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 법정의 신성함과 현명함으로 이러한 단순 삼단논법의 사슬 또한 끊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3. 저는 약속한 대로 국회의원직을 사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봉하마을의 자원봉사자로 갈 것입니다.
봉하마을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도 전 재판과정에 성실하게 임해나가겠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처음에는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모든 공적인 생활, 꿈을 다 포기해버리려 했습니다.
재판에만 집중해서 무죄를 입증 받고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쁜 농번기에, 단 한 달 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해주신 서명을 보았습니다.
면회를 올 때 나물이나 음식을 가져오는 지역구의 서민들을 보면서
'정치가 황량한 것만은 아니구나.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서민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부엉이 바위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서 강력히 싸워나가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찌할까를 두고 긴 시간 고민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국회의원직에 대한 미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봉하마을 자원봉사자가 되려고 합니다.

만 21년간 모셔왔던 노무현 대통령께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셨습니다.
그 분이 절대 고독 속에 계실 때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안장식에 흙 한 줌 덮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살아남은 자인 제 마음은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작지만 초라하지는 않은 묘역 만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못다하신 사업들을 돕고 싶습니다.
아니 그냥 봉하마을에 있음으로 외롭지 않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늦었지만 그 분 곁에 있고 싶습니다.

애끓는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마음도 가지지 못하고,
두 가지 일을 함께 해 나가지도 못합니다.
시묘 살이를 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이
용서가 분노를 이기고,
통합이 갈등을 이기고
사랑이 폭력을 이기고
진실이 편견을 이기는
나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광재 최후 진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