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 월간고재열
  • 어른의 허비학교, 재미로재미연구소
정치 언저리뉴스

정치인이 쓰는 책의 일곱가지 법칙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1. 8. 9.



정치인은 책이 인사다. 정치인을 만나면 으레 책을 건넨다. 책이 명함이다. 주로 자서전이다. ‘벌써 자서전을 썼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락도 받지 않고 사인까지 한다. 가관이다. 심지어 주변에 나눠주라고 몇 권 더 건네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 책은 이사 갈 때 퇴출 1순위다. 왜? 그중 몇은 선거에 져서 잊힌 지 오래다. 그 책의 대부분은 자기애와 자기과시 자기과잉으로 가득 차 있다.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그리고 책을 참 쉽게 만든다. 헐거움이 바람에 날릴 지경이다. 

얼마 전 '기적의 책꽂이'에 책을 기증하기 위해 책장에서 책을 솎아내다 우연히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획한 책을 발견했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아이들 밥그릇을 빈자의 밥그릇과 부자의 밥그릇으로 구분하는 그가 이런 말을 인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참 막 던진다.  

요즘은 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인들이 책을 만든다. 손학규 대표처럼 ‘100일 민심대장정’을 마치고 사진집을 내기도 하고 실용서의 탈을 쓰기도 한다. ‘써브쓰리’를 달성한 원희룡 의원은 마라톤 관련 책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토여행에 대한 책을 내기도 했다. 심지어 만화나 어린이용 서적으로 책을 내기도 한다. 

흔히 국회의사당에는 299개의 대권 시나리오가 있다고 한다. 금배지를 달면 누구나 다음 목표를 대통령으로 잡는다는 것이다. 그 헐거운 시나리오를 그대로 책에 담아낸다. 물론 주인공은 정치인 자신이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 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냥 티를 내는 수준이다. 

정치인 책이 헐거운 이유 중의 하나는 기획 출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선 경선에 나가거나 총선에 출마하거나 하는 중요한 정치스케줄을 앞두고 기습적으로 책을 출판한다. 이때를 맞춰서 책을 출판하는 이유는 ‘출판기념회’를 빙자해 대규모 출정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인들의 출판 행태가 우리 출판시장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나마나한 정치인이 하나마나한 표현으로 쓴... 그 책들을 되짚어 보았다. 안쓰럽지만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몇 가지 패턴이 보였다. 역시나 정치인들의 행태는 비슷했다. 

법칙 하나,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쓴 책이 정치인이 된 뒤에 쓴 책보다 낫다 혹은 더 잘 팔린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베스트셀러 ‘신화는 없다’의 후광으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한 후, 특히 대선 직전 몇 권의 책을 더 내놓았다. 그러나 그때 그가 낸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은 없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낸 전여옥 의원도 정치 입문 후로는 부진하다. ‘여자의 남자’를 낸 김한길 전 의원이나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 전 의원도 정치 입문 후로는 눈에 띄는 저작이 없었다. 정치는 저술가들의 무덤이었다. 정치를 하기 전에는 낮은 곳을 보았던 그들은 정치를 시작한 후 높은 곳만 보았다. 

정치 입문 후로도 저술가로서의 공력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정도를 꼽을 수 다.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내 머리고 생각하는 역사이야기’ 등의 스테디셀러를 낸 유 대표는 ‘후불제 민주주의’ ‘국가란 무엇인가’ 등 영향력 있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했다. 


유시민 대표의 저작과 관련해 정치인 책과 관련해 두 번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사자의 권위를 활용하라’는 법칙이다. 유 대표는 고 노무현 대통령 자서전 ‘운명이다’의 편집을 맡아 노무현의 적통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장례식과 추모제 등에서 보여준 모습과 자서전 편찬에 관여하는 것으로 적통임을 내세워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박지원 의원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잘 활용했다. 자서전 편찬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던 그는 주요 내용을 미리 발췌해 언론플레이를 함으로써 역시 자신이 김 전 대통령의 유업을 잇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이는 그가 원내대표가 되는 등 민주당 중심부로 파고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세 번째 법칙은 ‘떴다방 출판’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총선이나 지방선거는 정치인이 자가발전해서 출판하는 장이 서는 반면 대선에는 주요 후보자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서적이 출판된다. 이 대선 특수는 주로 유력 주자를 향한다. 표가 있는 곳에 독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력주자만 뒤쫓다 보면 필연적으로 뒷북을 치기도 한다. 지난 2007년 대선의 경우 유력 주자였던 고건을 겨냥한 책이 출판되었는데 일부는 그가 불출마 선언을 한 직후에 출간되기도 했다. 출판사는 섣부른 대세론에 편승한 값을 치러야 했다. 

대선에서는 ‘대세론’에 순응한 책보다는 매력적인 ‘언더독’을 다루는 책이 이슈가 된다. 이런 책은 선거 자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는 획기적이었다. 김대중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의 비이성적인 근원을 파고들어 이를 걷어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했다.  

2002년 대선 때는 대세론을 밀고 가던 이회창 후보보다 매력적인 언더독이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이 더 많이 나왔다. 유명 저자가 쓴 책들은 아니었지만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노무현 후보는 이런 책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진가를 유권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네 번째 법칙은 ‘프레임을 열어주는 책’이 각광받는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대선 전에 정가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 있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었다. ‘세금 폭탄’ 등 가치를 내포한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상대를 나쁜 프레임에 가둬야 성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선거를 ‘바람’으로만 치르려고 했던 우리 정치권에 일대 각성을 일으켰다. 

다음 대선과 관련해서는 오연호 조국 대담집인 ‘진보 집권 플랜’이 진보의 프레임을 열어주는 책으로 각광받고 있다. 무능한 진보 정권을 대신해 들어선 보수 정권이 유능하지도 않고 부패했을 때 진보는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이 책은 만만치 않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프레임이라는 전략을 이야기하는 책 말고, 구체적인 전술을 이야기하는 책들도 각광 받는다. 정치컨설턴트, 일명 책사들의 책도 각광 받는다. 박성민씨의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라는 책은 비정한 정치 현실에서 승자가 되는 법을 담았다. 김헌태씨의 ‘분노한 대중의 사회’는 ‘욱 하는 투표’를 하는 우리 국민의 투표 성향을 잘 분석한 책이다. 


이런 정략적인 책 말고, 정치인들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불러내는 사람은 주로 어머니다. 어머니가 바로 다섯 번째 법칙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냉정한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서 대선 직전 ‘어머니’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언급하며 등장시키는 단골 소재가 바로 어머니다. 간혹 큰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만큼 자주 불러내는 가족은 바로 ‘아내’다.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특이하게 ‘아내’를 소재로 삼아 ‘여보 나 좀 도와줘’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을 ‘고해성사’라고 했다. 고졸 변호사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재야 운동에 투신하고 정치권에 들어서면서 겪은 아내의 고충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끝까지 자신을 응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정치인과 출판, 여섯 번째 법칙은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읽은 책은 관심을 모은다’라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휴가 때 읽은 ‘유러피안 드림’은 노무현의 못다한 꿈이 무엇인지 이를 재해석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휴가 때 읽은 책도 화제를 모으곤 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책과 그리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보통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읽은 책은 연예인들의 공항패션처럼 신경 쓰지 않은 듯 엄청 신경을 쓰는 아이템이다. 책 선정 자체가 정치적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 때는 비서진이 휴가지에서 전자책을 읽는다고 발표 했다가 전자책으로 출간도 되지 않은 책을 언급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일곱 번째 법칙은 ‘뉴미디어 트렌드’를 따른다는 것이다. 블로그가 화제가 되면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그곳에 적은 글로 책을 내고 트위터가 화제가 되면 트위터에 적은 글로 책을 낸다.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다. 일부 정치인은 아이폰이나 안드로이드폰 어플리케이션까지 만들고 있다. 

요즘 정치인 출판의 트렌드는 단연 ‘트위터 출판’이다.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아서 출판하는데, 나름 트위터 헤비유저로서 그저 가소롭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트위터 안에서 별다른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존재감도 없었던 글을 책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차라리 진중권 교수의 촌철살인 정치 논평이 책으로 묶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음 대선주자들 관련 책들이 슬슬 나오고 있다. 아직은 박근혜 전 대표로의 쏠림 현상이 심하다. 아직 출판 시장에서 ‘매력적인 언더독’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곧 뭔가 조짐이 나타날 것이다. 출판 시장에서 대선 전초전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 지 관심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