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에어> 김은숙 작가에 대한 기억
자정에는 만날 수 있어도, 정오에는 만날 수 없는 여자
드라마 <온에어>를 처음 보고 속으로 외쳤다. ‘나 저런 작가 알아. 김은숙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딱 그 작가야.’ 다음날 인터넷으로 검색해 작가를 확인해 보았다. 김은숙 작가가 맞았다. 아주 상투적인 표현으로 묘사하자면 <온에어>는 ‘김은숙의, 김은숙에 의한, 김은숙을 위한 드라마’였다. 작가가 주연이었고 출연 배우들은 조연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인터뷰를 위해 일산까지 찾아가서 점심시간부터 두 시간이나 기다린 나를 외면한 후, 연락을 해본 적은 없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아마 <온에어>가 실패했다면 김 작가는 상당히 힘들어졌을 것이다. 방송사 안팎에 그녀가 망가져주기를 기대하는 작가와 PD와 배우와 기자가 수천명은 있었을테니까. 물론 이것은 그녀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그 세계 생리가 그러하다. 이 수천명의 사람들은 역시 김수현의 몰락을 확인하기 위해 김수현 드라마를 본다.
<파리의 연인>에서 <프라하의 연인>을 거쳐 <연인>으로 가는 동안 김은숙 드라마는 확실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시청률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동어반복이 되면서 드라마가 밋밋해지고 있었다. 나는 세 번째 연인이 배경 도시를 확보하지 못한 것에서 하향세를 읽을 수 있었다. 파리 찍고 프라하 찍었으면 뉴욕 정도는 가 줬어야 했는데, 적당한 협찬사가 붙지 않았는지 그냥 ‘맨’ 연인이었다.
<파리의 연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한 소설가(이자 기자) 친구와 드라마 기사를 주로 쓰는 여기자 후배 등과 함께(다른 멤버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두 명 더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일산으로 김 작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자정이 넘는 시간에 만났는데,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자정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김 작가를 정오에 가면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자정에서 새벽까지’ 김 작가는 드라마를 둘러싼 갖가지 뒷담화를 들려주었다. 그 중 많은 이야기를 <온에어>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때 김 작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비난을 했던 배우는 박신양이었다.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만난 자리였는데, 김 작가는 박신양의 전횡을 낱낱이 고했다. 무척 재미있었다. 작가와 배우가 그토록 서로를 증오하면서 만든 작품의 결과가 대박이라니.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복수였다. 당시 박신양의 넥타이가 화제였는데, 그녀는 넥타이를 멘 그를 괴롭히기 위해 ‘뙤약볕 아래서’라는 지문을 자주 넣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복수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박신양이 촬영을 거부해 장면이 아예 바뀌기 일쑤였다는 것이었다(<온에어>에 카메오로 나오는 배우가 아니라, 김 작가와 함께 드라마를 했으면서도 나오지 않는 배우와 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면 재밌을 것이다).
복수와 함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실패기였다. 강은정 작가와 함께 썼던 <태양의 남쪽>으로 김 작가는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5년 전 여름의 일이다. <파리의 연인> 기획안이 나왔을 때 거의 모든 드라마 PD들이 그녀들을 외면했다. 그때 그녀를 거둔 PD가 신우철 PD였고, 이후 그녀는 신PD와 계속 작업을 함께 했다.
김 작가를 인터뷰하려고 했던 것은 한류의 중심에 드라마 작가가 있다고 보고, 그 중 ‘미래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 작가 4명을 선정해 ‘한류 4대 여왕’으로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4명의 작가로는 <겨울연가>(스토리텔러로 참여) <가을동화>의 오수연씨,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씨, <대장금>의 김영현씨, <아일랜드>의 인정옥씨를 꼽았었다.
김은숙의 공로는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드라마’ 일색인 상황에서 ‘캔디렐라 드라마’라는 변종을 만들어낸 공로였다. 재벌 2세, 부모 세대의 불륜, 그로 인해 생긴 출생의 비밀과 이복형제 혹은 이복자매 간의 사랑다툼, 이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이런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에 ‘캔디’를 효과적으로 주입했다.
‘캔디렐라’는 캔디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다. 이 말은 드라마에서 캔디처럼 서민적인 주인공이 신데렐라가 되는 것을 일컫는다. 현실에 두 발을 딛고서 손으로 별을 따는 ‘캔디렐라’ 드라마는 현실과 판타지의 환상 결합이다. 캔디 캐릭터를 통해 현실감을 더해 감정 이입을 쉽게 만들고, 신데렐라가 되는 과정을 통해 여성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을 ‘캔디렐라’에 ‘빙의’할 수 있도록 작가는 갖가지 장치를 드라마 속에 심어 놓는다.
<파리의 연인>을 통해 김 작가는 ‘캔디렐라’ 드라마의 형식미를 완성시켰다. 재벌 2세와 가난한 여주인공의 사랑을 <파리의 연인>은 갖가지 설정과 에피소드를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갔다. 그녀는 드라마 속에서 ‘재벌 2세가 왜 가진 것 없는 비정규직 여성을 사랑하느냐’는 시청자의 의문을 여러 가지 알리바이를 제시하며 풀어주었다.
이런 ‘캔디렐라’ 계보를 잇는 드라마는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새롭다고 칭찬했지만, 이 드라마의 탄생 과정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윤철 PD는 드라마 기획단계에서 50편(인지 1백편인지) 정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패턴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패턴을 드라마에 그대로 대입시켰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현대여성의 에고인 캔디(김삼순)와 슈퍼에고인 신데렐라(정려원 역)의 투쟁기였다.
<온에어>로 김은숙 작가는 새로운 성취를 이루었다.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전문직 드라마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직업 자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심축으로 엮으면서 주인공들의 멜로선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실험적인 작가가 인기 있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반면 인기 작가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김 작가는 인기 작가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온에어>에는 인기 배우들이 카메오로 많이 등장했다. 그들은 대부분 김은숙 작가를 보고 출연했을 것이다. 작가에 방점이 찍힌다는 것은 우리 대중문화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스타 작가’의 시대를 연 김 작가가 좀더 많은 실험을 시도하고, 또 성공시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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