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정태춘과 박은옥은 늘 거리에 있었다. 거리에 있는 그들과는 늘 약속 없이 만났다. 거리에 가면 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추모 공연장에서... 촛불집회에서... 평택 미군기지 반대 집회장에서... 혹은 전시회 오프닝에서...
다시는 거리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말자고 노래했던 그들은, 다시는 기자들을 기다리지 말자고 노래했던 그들을, 늘 거리에서 만났다. 지인들이 “왜 아직도 그러고 사냐?”라고 타박해도 그들은 거리로 나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정태춘과 박은옥을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면 메일에 내 사진이 오곤 했다. 아마 이제 내가 그들을 찍은 사진보다 그들이 나를 찍은 사진이 더 많을 것 같다.
거리행의 주동은 정태춘 선배로 추정된다. 그런 남편을 구경하는 것이 재밌는지, 아니면 불안해서 따라오는 것인지 박은옥 선배도 늘 함께 한다. 정 선배가 사진 취재를 하는 동안 박 선배는 주로 인터뷰를 한다. 그들에게 참 많이도 취재 당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르포가수’라 부른다. ‘전업관심가’로 이슈의 현장에 달려온 그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르포가수’만한 것이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세상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는 그들을 가까이에서 본 결론이다.
거리에서 그들은 늘 다른 모습이었다. 굳이 노래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용케 찾아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 고 노무현 대통령 49재 때 정 선배는 무대 연출가로 참가했다. 카메라는 후배 윤민석에게 맡겼다. 정 선배가 마련한 무대에서 박 선배는 노래를 불렀다.
그보다 한달 전 성공회대에 있었던 노무현 추모콘서트에서 정 선배는 나레이터였다. 그의 낭랑한 나레이션이 추모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날 박 선배는 특별공연을 준비하는 권해효씨의 노래 선생으로 분투했다.
둘을 가장 자주 본 곳은 촛불집회가 열리는 거리였다. 둘은 이름 없는 시민이 되어 거리를 배회했다. 마주치면 황야의 총잡이처럼 누가 먼저 카메라를 꺼내 찍나 내기라도 하듯 나와 정 선배는 서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얼마 전 청운동에서 한 재미교포 콜렉터가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역시 약속 없이 둘을 만났다. 이날 박 선배는 정 선배가 만들어준 가죽 소품을 자랑했고 박재동 화백은 그런 박 선배의 캐리커쳐를 그렸고, 정 선배는 아내를 그리는 남자의 사진을 찍었고, 나는 아내를 그리는 남자의 사진을 찍는 남자의 사진을 찍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거리 공연을 할 때는 가끔 종로의 커피전문점에서 만나기도 했다. 커피를 마실 때의 그들은 참 여유로웠다. 그곳의 사람 중 누구도 그들이 커피를 마신 뒤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주치다 간혹 그들의 노래를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새삼 그들이 가수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들의 노래는 마치 후렴구 같았다.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나온 나들이의 후렴구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는 가사가 길어져 있었다. 시조로 말하자면 3장6구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설시조와 같은 노래였다.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인지, 가사가 길었다.
그 긴 가사로도 다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노래만들기를 멈췄다. 그리고 불려가는 자리가 아닌 자신들이 꾸민 자신들만의 무대에 오르는 것도 멈췄다. 그리고 거리에 나왔는데, 용케 그 기간이 내가 그들을 만난 기간이었다.
그들이 거리에 나왔던 이유 중 하나는 거리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주변을 맴돌면서 더불어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둘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꼬였기 때문이었다. 윤도현밴드 공연을 함께 보러 간 제주에서도, 고택에서 열린 음악회가 끝난 뒤 지리산에서도 지인들이 여기저기서 달려왔다. 그들과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가 지역에 내려가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도 있었다. 조선희 선배가 쓴 글을 보니 고 노무현 대통령이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에 함께 노래방에 가서 ‘떠나가는 배’를 불렀다고 하는데, 그 분위기가 어땠을지 둘과 여러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나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숱한 사람들... 만약 정태춘과 박은옥이 사람 그 자체를 추구하지 않고 사람을 이용해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했다면 그들은 훨씬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돈과 관련해서.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추구했고 사람을 남겼다.
둘의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해 100인 위원회가 꾸려졌다는 것이 그 증거다. 100인 위원회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다음 카페(http://cafe.daum.net/jungparklove)를 만들고 둘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꾸몄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했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은 그림을 그려 기념 전시회를 열었고(경향갤러리), 영상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은 뮤직비디오를 선물했다(임순례 감독).
그 100인 위원회에 포함되는 호사를 누렸는데, 아직 아무 것도 못해드렸다. 공연에 임박해 겨우 이렇게 글을 한 편 썼다. 이 글이 그들의 노래 인생 30년을 기념하기 위한 100인 위원회의 100가지 이벤트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만 갈무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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