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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자들, PD들

비상식적 사회의 비상식적 행동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11. 5.




어느 사회가 상식적인가 비상식적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척도는 바로 사람들의 행위다. 사람들의 예측 가능한 상식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면 상식적인 사회인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행위를 하고 있으면 비상식적인 사회인 것이다. 나는 이 싱거운 진리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깨우쳤다. 

2007년 여름이었다. 세상은 그해 겨울 있을 대통령 선거로 시끄러웠다. 한참 대통령 후보 경선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정치부기자였다. 정치부기자인 내게 대목장이 선 것이었지만 그 큰 장에 팔 것이 없어 서성거리는 장돌뱅이신세였다. 사장의 삼성기사 삭제사건에 항의해 파업을 벌였던 나와 시사저널 기자들은 집단 사표를 내고 신매체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부기자가 가장 바빠야 할 그 시기에 나는 그림을 팔았다. 창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 전시회를 맡아 그림을 기증 받아오고 받아온 그림을 경매로 팔았다. 더운 여름이었다. 인사동 골목길에 불법주차를 무시로 하면서 입에 단내가 나도록 그림을 날랐다. 그리고 사람들을 꼬드겨 그 그림들을 사게 만들었다. 취재해야 할 정치인들은 손님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대형 정치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그 앞에 좌판을 깔고 시사IN 창간독자를 유치했다. 매체를 잃은 기자들을 비웃는 몇몇의 정치인이 있었지만 그것이 부끄럽거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명분만으로 매체가 스스로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그때 우리가 구현해야 할 정의는 바로 창간자금이었다. 이날을 웃으면서 기억할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 속으로 되뇌이면서 홍보 브로셔를 돌렸다(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날이 이렇게 왔다).

2009년 여름이었다. 언론노조가 미디어악법 원천무효를 알리는 방송 광고 제작비를 마련한다며 바자회를 열었다. 경매에 올릴만한 기증품을 달라고 했다. 그 여름의 경매 때 떠안았던 그림을 기증했다. 뭔가 데자뷰가 느껴져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때 ‘우리만’ 겪었던 일을 지금은 ‘모두가’ 겪고 있었다. 이날이 다시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과거가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시사저널 사태’를 열심히 알려주었던 MBC <PD수첩> PD들은 줄소송을 당한 채 피고석에 앉아있었다. ‘올해의 PD상’을 받았던 이춘근 김보슬 PD는 시상식장에서나 입고 갔을만한 정장 차림으로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시사저널 후원 일일호프’ 때 술을 팔아주었던 YTN 기자들은 줄징계를 당한 채 후원 일일호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재판받는 PD, 술파는 기자...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우리만’ 겪는 일을 ‘모두가’ 겼으면서 국경없는기자회에서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는 69위까지 떨어졌다. 참여정부 때보다 30위 정도 하락한 순위였다. 그런데 참여정부 시절 우리의 언론자유지수가 10위 정도 하락한 것을 가지고 난리굿을 부렸던 조중동은 순위가 30위 가까이 하락했는데, 침묵했다. 그때 그들이 난리를 친 것은 순위가 너무 조금 떨어져서였던 것일까?

돌아보니, 주변의 모습은 온통 비상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주일 전 헌법재판소 앞에서 미디어법 무효 판결을 기원하며 1만배를 올렸던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죽은 자들(용산참사)과 죽어가는 뭇 생명들(4대강)을 위한 위령미사'에 참석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최 위원장은 일주일만에 개종한 것일까? 아마 최위원장은 ‘언론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다면 열일 제치고 갔을 것이다.

상식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위령미사’ 때 사제단의 총무인 김인국 신부는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시민들은 그를 진정시켰다. 흥분한 시민을 신부가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마치 <미션>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김 신부는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전경들 사이를 파고들고나서야 미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화롭지 않아보였다. 아주 많이. 

최상재 위원장이 사이비신자가 되는 동안 천정배 의원은 사이비법조인이 되어버렸다. ‘과정은 불법이지만 결과는 합법이다’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해 법무부장관을 지낸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제가 법무부장관 출신이지만 이런 판결은 처음 봅니다.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은 맞는데 아들은 아니다, 라는 것인지...” 뿐이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비상식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헌법재판소 판결에 대한 해설을 듣기 위해 헌법학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 질문을 받아준 헌법학자는 나에게 질문을 유도하고 있었다(내가 답변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에게 헌법재판소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묘안은 이것이라며, 자문자답했다. 헌법을 지켜야 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헌법의 근간을 흔들었고 헌법재판소의 존재 의미를 부정했다. 그 아이러니에 가장 보수적인 헌법학자들마저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기자가 정치인을 취재하지 않고 정기구독 신청을 받던 2007년 나의 악몽은 지금 모두의 악몽으로 재현되었다. 이 종교 저 종교 기웃거리는 언론인,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이해 못하는 전직 법무부장관, 전경과 싸우는 신부, 재판을 취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으러 온 PD, 24시간 뉴스채널의 24시간 투쟁하는 기자... 비상식적인 사회의 비상식적인 모습들이다.  

우리 언론이 상식의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의 화룡점정은 잡지의날에 시사저널 심상기 회장이 이명박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은 일이었다. 기자들을 탄압하는 언론이라고, 기사를 광고와 바꿔먹는 매체라고 시민사회단체에서 취재거부선언을 하고 기자협회에서 제명한 매체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상을 줘야 할 매체가 되었다. 이것이 2009년 대한민국 언론계의 모습이다.


주> PD저널에 기고한 글을 조금 다듬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