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도시인들이 ‘귀농로망’을 가지고 있다. 그 로망은 간단하다. ‘언젠가 농촌에 귀농 혹은 귀촌하고 싶다’ ‘그러나 농사는 힘들어서 못 짓겠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많지 않아 조그만 돈벌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그런 로망에 대한 답을 찾아 한가위 합병호에 ‘달콤한 귀농’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경남 하동, 전남 함평, 전북 남원 진안, 충남 서천, 충북 충주 등 전국 곳곳의 귀농인들을 만나고 그 답을 찾아보았다. 마을 사무장 등 일종의 사회적 일자리에 취업하는 방식, 농촌체험마을 등 도시인의 활용해 비즈니스 모형을 만드는 방식, 다양한 농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식 등 다양한 답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농을 빨리 하면 빨리 할수록 경쟁력이 높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은퇴형 귀농은 전원생활형 귀촌에 가까웠고 청년 귀농이 정통 귀농에 가까웠다. 청년 귀농인들에게 농촌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로 전하기로 했다.
농림수산식품부 벤처농업대학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터 전국농민회 등으로부터 청년 귀농인 사례를 추천 받았다. 그들 중 몇은 벌써 억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농촌 총각은 장가를 못간다는 말도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른 전에 대부분 결혼을 했고 미혼 총각들도 어여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심지어 재혼을 앞둔 ‘돌싱(돌아온 싱글)’도 있었다. 그들은 농업 ‘골드오션’을 일구고 있었다.
'농촌에서 꿈을 이룬 88만원 세대' 두 번째 이야기는 농촌에서 농업이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성공한 사례와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례에 대한 이야기다. 농촌 전문가들은 농촌이 잘 되기 위해서는 농사 잘 짓는 사람만으로 안되고 농민이 농사만 잘 지어도 될 수 있게 다른 것도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농촌에 가서 농사 외에 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청년 귀농인'을 만나보았다.
'로컬푸드' 운동의 산파 이재국씨
서천군의 청년 귀농인 이재국씨는 남다른 비전을 가지고 농촌에 왔다. 지역자활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그는 지역의 소농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내건 방식은 바로 ‘지역의 생산물은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지산지소 운동 즉, ‘로컬푸드’ 운동이다.
이씨는 유기농 농산물을 매개로 지역에서 생산자 조합과 소비자 조합을 결성해 유통망을 만들었다. 25농가가 생산하는 40가지 품목을 270가구에 배달한다. 농산물을 그대로 배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부나 장류 등 가공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더하고 있다. 여기에 ‘건강먹거리여행’이라는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서로 만나게 하고 있다.
생산과 가공 그리고 직거래 매장과 소비체험을 엮어낸 이씨는 “이제 농업은 6차 산업이 되어야 한다. 1차 2차 3차 산업을 융합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 생협 운동을 통해 지역의 소농을 살릴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생산자도 누가 먹는지 알고 소비자도 누가 생산했는지 아는 ‘얼굴 있는 먹거리’가 답이라는 것이다.
이씨가 요즘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과수 분양’ 사업이다. 배나무 등 과수나무를 한 그루 당 20여 만원을 받고 도시의 소비자에게 분양하고 농민이 이를 대리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고령인 농민에게 도시 소비자가 자본과 노동력을 보태 ‘합작농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농 농산물 유통 회사 사장, 박대희씨
전남 순천시의 박대희(25)씨 역시 유기농 농산물 유통을 하고 있다. 이재국씨와 다른 점은 판매망이 소비자 조합이 아니라 학교 급식과 인터넷이라는 점이다. ‘생기들녘’이라는 이름으로 농산물 유통사업을 하고 있는 박씨는 광주광역시와 보성 광양 순천 여수 일대의 학교에 친환경 농산물을 급식 식재료로 납품하고 있다.
2005년 박씨는 귀농한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농산물 유통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농산물의 생산을 맡았고, 자신은 유통을 맡았다. 2억2천만원 정도의 비용을 들려 ‘저온냉장 보관창고’를 지었다. 지역 농가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유기농 농산물 재배 농가를 모아 100가구 정도의 작목반을 꾸렸다.
농가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박씨는 “농가에 찾아갔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버지 바꿔라. 아버지랑 통화하겠다’라는 말이었다. 내가 책임자라고 말해도 믿지 않고 그냥 잔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신뢰를 쌓아갔다. 농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도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었다. 농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박씨와 결국 거래를 텄다. 요즘 박씨는 순천대 농업경제학과에 편입해 늦깎이로 공부하고 있다.
아버지 박주상(53)씨는 “농민들은 자기 고집이 강하다. 속으로 도둑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농민들을 설득하고 관리하는 아들이 대견하다. 요새는 아들이 더 낫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농장에서 올리는 수입은 20~25% 정도고 아들이 유통을 통해서 얻는 수입이 75~80%를 차지하고 있다.
꽃집에서 먹는 꽃차 꽃음식, 박상호씨
취미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귀농하는 사례도 있다. 충남 예산군의 박상호씨(35)가 대표적인 사례다.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대학 강사로 일하던 그는 꽃에 관심이 많았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화 사진을 찍었다. 야생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귀농하고 꽃차와 꽃음식 개발에 나섰다. 식물자원학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펜션을 지어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방문객들에게 꽃차와 꽃음식을 보여주며 홍보하고 있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제품 판매를 하기 위해 올해 냉장창고를 짓고 제품을 가공하고 있다.
(주, 박상호씨가 운영하는 펜션에 가시면 꽃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야생꽃을 체험하고, 꽃으로 도배된 복층형 방에서 꽃잠을 주무실 수 있고, 각종 꽃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각종 꽃차로 마음을 정돈할 수 있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분들은 꼭 한번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7전8기로 일어선 청년귀농인, 신중우씨
‘청년 귀농’에 성공사례가 많기는 하지만 귀농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귀농 9년차인 충남 연기군의 신중우(34)씨의 귀농 역사는 실패의 역사였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갑작스럽게 귀농을 결정한 후 그는 번번이 농사에 실패했다. 천운마저 따라주지 않아서 어렵게 지어놓은 비닐하우스가 폭설에 주저앉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백만원의 성금을 모아서 보내주기도 했다.
그가 얻은 교훈은 ‘대출은 덫이다’ ‘판매처를 먼저 생각하라’ ‘정보가 생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후 함부로 대출을 받지도 않았고 판매처도 확보하지 못한 채로는 농사를 짓지 않았다. 정보를 모아 시장의 변동에 대비했다. 그렇게 마지막에 정착한 농사가 묘목농사였다. 2만평의 부지에 50여종의 수목을 심어 시장상황에 맞춰 출하하고 있다. 주로 가을에 씨를 거둬서 봄에 식목일에 맞춰 출하하지만 다양한 판매망을 통해 연중 판매하며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전국을 돌며 만난 청년 귀농인들은 특징이 있었다. 끝없이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농업대학이나 농업기술센터와 같은 전문 교육기관은 물론 근처 대학에 편입하거나 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꾸준히 자기개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낮없이 노력하며 그들은 농업 ‘골드오션’을 개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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