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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순 지키미 게시판/깨어나라 고봉순

KBS 사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이전투구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11. 19.






'정치의 극치' 보여주는 KBS 사장 공모 감상법


KBS 사장 공모를 앞두고 KBS 노조는 분주히 움직였다. 노조위원장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노조 집행부는 로비에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이사회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사장추천위원회 구성을 주장하며 비대위원들이 전원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아주아주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노조가 KBS 사장 선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바로 KBS 노조였기 때문이다. 

KBS 노조에 대한 KBS 구성원들의 불신은 깊었다. 한 노조 중앙위원은 “KBS 사장 선임에 대한 노조의 태도에는 진정성이 현저히 부족했다. 노조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보다 보여주기식 투쟁에만 매달렸고 사장 선임 과정에 실질적인 견제를 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대세는 이병순 사장의 연임이었다.

정권 입장에서도 이병순 유임은 그리 나쁜 카드가 아니다. 정연주 사장 시절에는 적자였던 데 반해 이병순 사장은 흑자를 달성해서 명분도 있다.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KBS 사원행동) 활동했던 사원 49명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어 견제하고, 노조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정관용·윤도현·김제동 등 진행자를 하차시키는 등 일련의 숙청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무엇보다 이 사장은 격주간으로 진행되는 이명박 대통령 라디오 주례연설을 밀어붙이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생방송 시사투나잇>을 <생방송 시사360>으로 바꿨다가 결국 폐지했다. 탐사보도팀을 해체해 심층 비판 보도 기능을 약화시켰다.

한나라당 의원들과의 관계도 잘 맺어놓았다. 한 친이계 의원은 “이병순 사장은 한나라당 의원이 부탁을 하면 거의 다 들어주었다. 의원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 KBS 기자는 기자가 정치인의 민원 창구가 되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방송의 비판 기능을 약화시키고 말도 잘 듣는 이 사장을 굳이 교체해서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여권의 중론이었다. 이런 인식은 KBS 내부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병순 연임' 선호

11월 초 이병순 사장의 측근인 보도국 간부가 청와대 참모를 만났다는 소문이 KBS 안에 파다하게 돌았다. 심지어 이병순 사장이 함께 만났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소문은 이 사장의 연임이 조율되었다는 ‘이병순 대세론’을 확산시켰다. KBS 사장 공모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이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나 부적절한 논란이 없도록 선임 절차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라고 한 말이 특보 출신인 김인규 회장을 배제한 발언이라고 알려지면서 대세론은 날개를 달았다. 

그러던 것이 11월11일 PD총회를 기점으로 판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KBS PD협회는 ‘이병순 연임 저지’를 1차 목표로 정했다. ‘선 이병순 심판, 후 무자격자 반대.’ 일단 이 사장의 실정을 물은 뒤 부적격 후보가 임명되면 퇴진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정권의 언론장악을 방조해 영향력과 신뢰도 1위였던 KBS 위상을 추락시킨 이 사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D협회 등 이병순 사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쪽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이 사장이 만들어낸 ‘지나친 흑자’다. 내부 자료에 따르면 KBS는 3분기까지 742억원의 비용을 절감해 582억 원(지방사 부동산 매각액 252억 포함)의 흑자를 기록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 사장이 이 흑자를 내기 위해 계약직에 대한 무더기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제작비를 줄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흑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KBS는 500억원 이상 수익이 날 경우 상여금을 주기로 한 노사협약이 있다. 비정규직을 잘라내고 상여금을 받아간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을 받을 일일뿐더러 수신료 인상에도 지극히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임을 지지하는 쪽은 이 흑자를 '공'으로 보는 반면 반대하는 쪽에서는 '과'로 보고 있는 것이다. 



PD협회가 움직이자 이 사장 진영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라이벌인 김인규 후보 측은 반겼다. 이병순 연임 반대의 구심인 KBS 사원행동의 관계자는 “이병순 연임 저지를 결의하니 김인규 후보 쪽 사람들이 갑자기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11월12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정연주 사장 해임무효소송에 대한 취소 판결이 나자 김인규 후보 측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병순 사장의 존재가 부정된 만큼 김 후보가 유리해졌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사내 김인규 세력이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병순 사장의 견제도 본격화되었다.

사내에서 김인규 견제의 선봉에 선 곳은 뜻밖에도 KBS 노조였다. 11월12일 KBS 노조는  성명을 내고 “김인규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이 사장이 되면 정권의 방송장악 의도로 보고 총파업을 벌이겠다”라고 발표했다. 전날까지 김 회장과 이병순 사장, 강동순 전 감사의 공모 철회를 주장했던 노조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김 회장 견제에 방점을 찍었다.

그런데 노조 집행부가 모두 이병순 사장에게 우호적인 것만도 아니다. 집행부 내부에도 친김인규 성향의 간부가 있다. 노조뿐만 아니라 KBS 전체가 각자의 연고와 인연에 따라 ‘친이병순 대 친김인규’로 갈려 있다. KBS에 정치의 계절이 온 것이다. 경북고를 나온 이병순 사장을 따라서 TK(대구·경북) 세력이 결집하고 경기고를 나온 김인규 회장을 따라서 KS(경기고·서울대)가 뭉치는 양상이다.

아직까지는 ‘이병순 대세론’이 ‘김인규 추대론’을 앞선 상황이다. 이는 1년3개월 전  사장 공모 상황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당시만 해도 김인규 회장이 사장 후보로 손꼽혔다. 그런데 여론 부담 때문에 김 회장이 공모에 불참하면서 KBS사우회장인 김은구씨가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김씨가 정정길 대통령비서실장이 주재한 모임에 참석한 것이 드러나 낙마하면서 그때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이병순씨가 어부지리로 사장이 되었다.

이병순 사장의 신주류 vs 김인규 회장의 구주류 '파워 게임'

당시만 하더라도 이병순 사장은 비주류였고 김인규 회장은 주류였다. 그러나 1년3개월 후 처지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지금은 이병순 사장 세력이 주류이고 김인규 회장 세력은 비주류가 되었다. 심지어 김인규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이병순 측근으로 전향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공채 1기 출신으로 정치부장, 편집국장, 이사를 거친 김인규 회장은 특히 기자들에게 지지를 얻는다. 김 회장은 ‘수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별도로 조직관리를 했다. 반면 비주류였던 이병순 사장은 자신과 같은 비주류들을 결합했다. 특히 기술직 출신인 김영해씨를 부사장에 임명하는 등 기술직을 중용해 이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김영해 부사장 임명 건은 KBS 내 세력 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손병두 이사장은 이병순 사장과 불편한 관계로 알려졌는데 이사회에서 김 부사장 임명을 부결하면서 이런 갈등 양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친김인규 성향의 이사들이 이 부결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KBS 이사회 내부도 갈려 있는 것이다. 

마치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 세력과 친박 세력이 각축하듯이 KBS 내 친여 성향의 세력이 두 패로 나뉘어 갈등하면서 야당 추천 이사들과 개혁파가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야당이나 시민사회 단체에서는 특별히 후보를 내지 않아서 캐스팅보트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KBS 사원행동의 움직임도 일종의 지렛대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장 임명을 앞두고 KBS 내부 세력 판도는 더욱 복잡해졌다. 한 PD는 이를 “남북전쟁도 아니고, 삼국지도 아니고, 완전 춘추전국시대 열국지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가운데 제3 후보론도 솔솔 나온다. 김인규 카드와 김은구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막판에 이병순 카드를 내밀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병순 카드와 김인규 카드가 여의치 않으면 막판에 제3의 카드를 낸다는 것이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 하락이 선명해지면서 제3 후보론도 힘을 얻고 있다. KBS 사장 선임을 놓고 지금 KBS는  난전을 치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