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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순 지키미 게시판/깨어나라 고봉순

불의에 침묵하는 KBS 정규직들에게 고함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11. 13.


방송국은 골품제 사회다.

거칠게 나눠보자면
사장 직계가 성골이고
공채 기자나 PD는 진골이다.
비정규직은 육두품이라 절대 간부가 될 수 없다.
외주제작사 직원은 그 밑이다.

가장 말단에 있는 외주제작사에 속하는 이성규 PD가 글을 보내왔다.
지금 침묵하고 있는 KBS 정규직들이 꼭 읽어야 할 글이다.
방송국 피라미디의 맨 밑에 있는 그들이 왜 싸우는지...

'흑인 노예가 백인 주인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꼴'이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차라리 이득이 될 수도 있는데...
그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






나는 변절을 고민한다


이성규 / 독립PD


비정규직은 멀리는 입시경쟁, 가까이는 취업경쟁에서 밀려난 소외자다. 나는 방송사 정규직 문으로 들어서는데 실패, 아니 실패가 아니다. 진입할 생각조차 못했으니 좌절이다. 좋게 표현하면 방송가의 프리랜스 PD로 다큐멘터리 영상콘텐츠를 생산하는 창작자도 아닌 노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인하우스 PD(방송사 정규직 PD)가 되는 길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방송가의 ‘루저’(패배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와중에 시간 나는 대로, 아니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언론노조의 ‘언론자유 사수 투쟁’에 동참했다. 소송걸기 좋아하는 변희재의 주장에 따르자면, 나는 386세대의 선동가임과 동시에 ‘방송 노조의 노예’다. 또한 ‘성찰’로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B급 좌파 김규항의 표현을 돌려 치면, 계급성을 망각한 채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인민’의 편에 서지 못한 쁘띠부르조아로서의 ‘PD님’이 된다. 좌우 양쪽에서 채이고 있는 꼴이다.


비정규직 PD로서, 방송콘텐츠를 만들어 온지, 만 21년을 넘어섰다. 월 20만원으로 시작해서 한 때는 월수입 500만원을 넘어선 적도 있고, 97년 IMF긴급금융구제 이후 40대 중반에 이르기 까지 일 년에 2000만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 연출했다. 21년의 방송 생활을 글로 풀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신파가 된다. 최근 들어서야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내 줄 정도의 여력을 갖게 됐다. 아내는 그런 내가 낯설기도 하고 기특한가 보다. “신기하다. 당신이 생활비를 준다는 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독립제작사를 비롯해 방송가의 비정규직 제작진에게 있어서 지난 1년은 사상 최악의 해가 되었다. 앞으로도 암흑이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괜찮은 편이다. 이것저것 다 합쳐서 올해 예상수입이 5천만 원 정도 될 것 같다. 47살이 되어서야 누려보는 호황이다. 제작비가 삭감되고 연출료가 대폭 깎이고 심지어는 일자리조차 잃은 동료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 동료들이 술자리에서 불러주기라도 하면 만사 제치고 함께 한 잔 걸치고, 슬그머니 술값을 내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 술자리에서 나는 가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선배가 인하우스(방송사) 애들 싸움에 왜 끼어들고 지랄이야. 나는 방송사 정규직들이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게 언론의 자유, 그리고 대기업과 조중동의 언론 장악을 막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안 들어. 종합편성채널이고 뭐건 간에 이건 밥그릇 싸움 아냐? 선배도 알다시피 그 밥그릇이 어디 지들만의 노력으로 키워 놓은 밥그릇이냐고. 외주제작사 피 빨아먹는 빨대 노릇하면서, 작가들 등치는 채찍 노릇하면서, 독립 PD들 등골 빼는 꼬챙이 노릇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원청’ 노릇하면서 우리 같은 ‘하청’ 쥐어짜면서 닐니리 맘보 누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선배! 요즘 잘나간다고, 그래서 배부르니까... 인하우스 애들 꼬봉 노릇 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거든.” 술자리였기에 뱉어지는 말이다. 하지만 다음 날 술이 깨면 어김없이 전화가 오곤 한다.


“선배 미안해. 내가 술이 많이 취해서, 그만 욱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미디어법은 나쁜 것이란 생각이 들어. 나도 확 지르고 싶은데, 먹고사는 것 때문에. 알잖아. 그러다가 찍혀버리면, 이 동네에서 종치는 것.” 대세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양가감정을 지닌 독립PD들이 여의도에 많다. ‘언론자유 사수와 미디어법 무효 투쟁’에 원칙적으로 동의를 하면서도, 맺힌 게 많다 보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다.


독립PD들 보다 훨씬 급이 높은 언론노조의 KBS 계약직 지부장이 KBS 사장직에 응모를 했다. 이병순 사장의 비상식적 비정규직 해직에 대해서 알리기 위해 서란다. 손뼉을 쳤다. “옳거니. 잘한다.” 하지만 손뼉의 잔향은 너무도 짧게 끊어진다. 노조조차 만들 수 없는 독립PD와 작가를 비롯한 외주제작진으로선 언감생심인 탓이다. KBS의 계약직조차도 직접적이진 않지만 어찌됐든 우리에겐 ‘원청’이다.


그 밖에 실크로드 CEO포럼의 여원동 수석부회장도 그 대열에 섰다. 여원동은 올해 서른두 살로 인터넷신문 솔루션을 주력사업으로 하는 ‘마이미디어DS’의 대표다. 실크로드 CEO 포럼의 회장은 변희재다. 그는 지난 1월 독립PD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린 바 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변희재지만, 오늘은 눈 뚝 감고 그의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약자와 서민을 보호하겠다고 노래를 불러대는 방송노조가 이제껏 방송 권력에 착취당하는 외주업체와 작가들의 권익을 주장한 바는 없다. 방송노조가 지지했던 KBS 정연주 전 사장이 외주업체 제작비를 일방적으로 40% 삭감했을 때도 그들은 침묵했다. 더구나 희생양이 된 외주업체 PD들의 모임인 독립PD협회 소속 386세대들이 정 사장 사수 투쟁에 앞장서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들은 이번에도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신문이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라며 방송노조를 지원하고 나섰다. 흑인이 백인의 밥그릇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격이다. 방송 권력의 외주업체 장악은 경제 영역을 넘어 정신의 영역까지 파고든 것이다. 이른바 노예근성이다.“ - 동아일보 1월 9일 <방송 귀족들에 빼앗긴 영상세대의 꿈>


전체적인 글의 내용은 이렇다. 방송법 개정은 콘텐츠 산업발전인데,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386세대의 독립PD들이 발전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386 독립PD들은 영상세대인 2030세대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라도 길을 비켜달라는 것이다. 그 2030세대가 이번에 KBS 사장으로 응모한 인터넷 신문 솔루션 사업을 하는 여원동인가 보다. 이건 우리보고 길을 비키라는 정도가 아니라, 저 위에서 우리를 짓누르겠다는 해프닝으로 보이는 것이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변희재의 주장대로 흑인이 백인의 밥그릇을 위해 투신하는 게 우리였다면, 실크로드 CEO 포럼의 2030세대는 남들이 피땀 흘리며 개간한 길에 비단을 깔아달라고 떼쓰는 것에 다름없어 보인다. 비단길에 올라서 물 좋은 오아시스 꿰찬 채, 대장 노릇하겠다는 것일까? 허경영이 대선에 출마했다고 진짜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처럼, 실크로드 CEO 포럼의 구성원이 KBS 사장의 야망을 가지고 응모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상식적인 시대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그들은 방문진 및 KBS의 이사직을 노렸고, 이미 이문원은 KBS 시청자 위원의 자리에 올랐다. EBS와 SBS까지 노리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여의도의 독립PD들은 늘 ‘낮은 곳으로 천착’하며 방송 콘텐츠를 만든다. 하지만 실크로드 CEO 포럼의 2030세대는 비단길의 비적이 되어 날로 먹으려 한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까. 방송사가 어쩌다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잡것들에게 능욕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방송가의 가장 밑바닥을 치는 독립PD에게도 이건 블랙코미디다.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이 일만 배를 할 때, 단식을 할 때, 편집기를 끄고 찾아갔다. 최상재PD는 우리 눈에 외롭게 보였다. 물론 그의 결연함은 실로 존경스러웠지만 말이다. 최상재 위원장은 동료 언론인에게 1만 배와 단식에 함께 동참하자는 게 아니었다. 미디어법과 관련한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보도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언론노조의 정규직 조합원들은 스스로 귀를 막았다. 이건 누군가의 표현대로 ‘비상식적 사회의 비상식적 행동’이다. 최상재 위원장의 외로운 투쟁은, 종합편성 채널의 향방에 가려지고 있다. 이건 무관심일까? 아니면 현실적 패배주의일까?


박정남이란 독립PD는 'PD저널‘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의 고행으로 지금의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뭔가 결정적인 판단을 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판단은 아마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 될 것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방송가의 밑바닥을 치는 독립PD들이 이럴진대, 저 철통같은 인하우스(방송사)의 정규직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얼마 전부터, 묘한 유혹의 단어들이 내 귀로 찾아오고 있다. 한 다리 혹은 두 세 다리 건너 들어오는 제안이다. “그동안 방송사 정규직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습니까? 독립PD들이 그동안 겪은 착취와 그 서러움을 이해합니다. 미디어 시장의 확대와 고용 창출이란 측면, 그리고 그동안 배고프며 갈고 닦은 실력을 맘껏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독립PD들이 종편 채널 구성에 나서 주셔야 합니다. 독립PD들이야 말로 방송 산업의 역군입니다. 같이 갑시다. 지상파와 한번 싸워봅시다. 진검승부를 할 때가 됐지 않습니까.”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승기를 놓쳤던 북군이 흑인을 전쟁의용군으로 끌어들이는, 선전 선동의 숭고함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단언하지만, 이건 독립PD를 총알받이로 내세우겠다는 것에 다름없다. 달콤한 유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독이 든 사과의 달콤한 향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난 21년의 방송 생활에서 몸으로 체득한 바 있다. 지역민방, 케이블 PP와 SO, 위성 채널 등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헛된 망상을 뿌렸던 걸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미 정치적 의도가 빤히 보이는 종편 채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나는 지금 변절을 고민한다. "선배도 알겠지만, 세상에 다른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해고, 임금 결정의 권리를 갖고 있는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자본가는 아닐지 모르나, 그렇다고 노동자도 아닙니다." 우리안의 카스트다. 그것도 노동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는 분명한 신분제도다. 하층을 이루는 독립PD들이 상층카스트인 방송사의 정규직들에게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묵묵부답 요지부동이다.


달콤한 유혹. 독이 든 사과다. 그러나 어찌됐든 받아먹자는 의견들이 독립PD 내부에서도 설득력 있게 퍼지고 있다. “인하우스 애들도 꼼짝 않고 자신들 밥그릇 지키느라 눈치보고 있는데, 우린 지금 무슨 뻘짓을 하는 겁니까? 선배! 이참에 말(馬)을 바꿉시다. 듣보잡들이 방송에 참견하겠다고 사장이며 이사직에 응모하는 비상식의 시대입니다.” 솔직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으로 귀가 살랑거린다. “너희들이 움직이는 것을 굳이 말리진 않겠다. 이왕 그 쪽으로 줄을 서서 갈 거면 피터지게 방송을 만들어라. 하지만 나는 안 간다.” 이게 지난 며칠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내 변절의 결과다.


방송사의 정규직들에게 정중하고 간곡한 부탁을 하겠다. 술자리에서의 푸념과 한탄을 걷어버려라. 나와서 싸워라. 듣보잡들 조차 나대는 이 ‘비상식의 시대’를 그대들은 그냥 모른척 할 것인가? 그대들의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변절을 고민한다.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다. 동지이고 싶다.


방송사의 정규직들에게 정중하고 간곡한 부탁을 하겠다. 술자리에서의 푸념과 한탄을 걷어버려라. 나와서 싸워라. 듣보잡들 조차 나대는 이 ‘비상식의 시대’를 그대들은 그냥 모른척 할 것인가? 그대들의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으로 인해 나는 여전히 변절을 고민한다.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다. 동지이고 싶다.

2009년 11월 12일(목) 저녁 8시 40분, 여의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