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미화노조 이영숙 분회장(가운데) 등이 노조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최저임금 - 비정규직 - 고된 근로조건...
그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한 그릇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노조를 결성하고 승리하신 그 분들의 이야기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모두 빼았기고 있다고
우리는 지기만하고 있다고
희망이 없다고들 하시는데,
이 할머니들 이야기를 읽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대학 상대로 연전연승하는 할머니 노동자
‘우리는 빵과 함께 장미도 원한다’는 구호가 등장하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는 1985년 미국에서 벌어진 이주 노동자 캠페인 ‘용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Justice for Janitors)’를 소재로 한 영화다. 학대받는 이주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한 이 영화에서 노동자들은 갖은 협박과 방해를 극복하고 노조를 조직해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한다.
첨단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했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마트에서 일하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이었다. 마지막 행진 장면에는 이들과 연대하는 한인 대학생들도 함께했다. 그 중심에 있는 구호가 바로 ‘빵과 장미’였다.
정말 낭만적인 이야기다. 이 ‘빵과 장미’가 한국에서 ‘밥과 장미’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참혹했다. 우리의 환경미화원들은 아직 ‘밥’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인 이날 고려대학교 본관에는 50여 명의 대학생이 민주노총 공공노조 산하 공공서비스지부 고려대분회 노조원들과 함께 점거농성을 벌였다. 노조원은 대부분 60세 전후의 할머니였다.
2008년 연세대 미화노조 할머니들은 학생 조직인 ‘살맛’과 연대해 용역업체가 착복한 임금을 학교 측으로부터 받아냈다.
점거농성은 12월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학교가 청소 용역업체를 교체하면서 환경미화 할머니들이 그전에 맺은 임단협을 승계하지 않으려고 하자 학생들과 할머니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학교 곳곳에서 전쟁이 치러졌다.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써붙이면 학교 직원들은 이를 뗐고 학생들은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환경미화 할머니들은 학교 본관에서 밥을 지어 학생들을 먹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학생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폐지 전쟁 치른 고려대, 청소할머니들 재공격
예일대생들이 명예박사를 받으러 온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야유했듯이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을 막다가 핵심 학생들이 출교되기도 했던 고려대생들에게는 본관 점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교수를 감금했다는 누명을 쓰고 7명이 출교를 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화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본관을 점거했던 하버드생들처럼 과감히 본관 점거에 들어갔다. 총학생회가 나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조직한 ‘미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학생대책위원회’ 소속 학생들이었다.
이번에는 학교가 아무 말도 못했다. 학교가 환경미화 할머니를 직접 고용한 것이 아니라 용역회사가 고용한 것이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고, 또 학생들을 제 3자라고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학교 건조물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환경미화 할머니들의 요구가 너무나 기본적이고 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지시를 받은 용역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60세까지 낮추려던 정년을 70세로 유지하기로 했고 단체협약은 승계하기로 했다. 폐지 판매비용으로 식대보조금 2만5000원을 지불하기로 했고 노조전임자도 유지하고 1년에 두 차례 노조 단합대회도 보장하기로 했다. 할머니들의 완승이었다.
"100년 전통의 고대에서 100년 동안 폐지는 우리 것이었다"
학교 측이 완패한 이유는 반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 전에 고려대는 환경미화 할머니들과 전쟁을 치렀다. 발단은 폐지대금이었다. 고대 할머니들은 폐지를 모아 팔아서 식대에 보탰었다. 용역회사에서 나오는 식대는 한 달에 3만5000원이었다. 아침 점심 두 끼와 토요일 아침 등 할머니들은 한 달에 50끼를 이 식대로 해결해야 했다. 한 끼에 700원꼴이었다. 할머니들은 폐지를 판 돈으로 쌀을 싸서 보충해왔다.
그런데 용역회사가 폐지대금을 가져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유는 학교 측이 등록금 동결을 이유로 청소용역비를 줄였기 때문에 수입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역회사는 폐지를 건드리면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 그릇의 밥이 달려 있는 폐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할머니들은 ‘성전’을 시작했다.
공공서비스노조 고려대분회 이영숙 분회장(64)은 “고려대가 설립된 후 지금까지 100년 넘게 폐지는 우리 것이었다. 한 끼 700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서 폐지를 가져가라"라고 말하며 노조원을 독려했다. 폐지에 관해 1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려대 학생도 거들었다. 이것이 ‘1차 폐지전쟁’의 시작이었다.
싸움은 금세 불이 붙었다. 이영숙 분회장은 마이크를 잡고 “우리는 여기서 청소하는 노동자다. 한 달 3만5000원으로 밥 먹고 산다. 배고파서 못살겠다”라고 외쳤다. 이들의 배고픔을 외면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노조, 교수회, 정규직 대학노조 등 모두가 들고 일어섰다. 할머니들에게 다이어트를 강권하는 학교 측을 대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8년 성신여대 학생들(위)은 15일 동안 미화노조 할머니들과 함께 싸워 해고된 노조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
3일 만에 고려대생 1만명 서명해
무엇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폐지대금을 할머니들에게 주라는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점심시간에만 서명을 받았음에도 3일 만에 1만48명의 서명이 모였다. 학생대책위를 주관한 한 학생은 “3일 만에 1만명이 넘게 서명을 한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등록금 인상 반대 서명을 한 달 동안 받아도 이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학생들이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학교와 용역회사 측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용역회사 측은 2만5000원을 일괄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고대 옆 동덕여대에서도 환경미화 할머니들의 승리가 있었다. 지난해 8월31일 노조를 조직한 동덕여대 환경미화 할머니들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11월30일 시작한 파업이 12월4일까지 5일 동안 진행되었다. 파업에 돌입하자 학교는 이틀 만에 쓰레기하치장으로 돌변했다. 학생들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청소를 할 수 없게 만드는 학교 측을 비난했다.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학교 측은 항복했다.
학교 측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1년에 5~6회씩 재단 창립자 가족묘 벌초에 동원하는 것이 부당노동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최저임금보다 4000원 더 주던 임금을 12만5000원이나 인상해주었고, 해고자를 전원 복직시켰음은 물론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도 지불했다. 새로 인력충원도 5명 해주기로 했으며 파업기간 중 임금도 지불하기로 하고 폐지비용은 조합원에게 주기로 했다.
성신여대에서는 2008년에 큰 다툼이 있었다. 2007년 노조가 설립되었는데 학교는 노조활동을 한 환경미화 할머니 전원에게 해고통보를 했다. 할머니들은 보름 동안 농성했다. 남편이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상황에서도 농성장을 지킨 노조원도 있었다.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헌신적으로 도왔다. 비를 맞으면서 교내 선전전을 진행했고 학생들은 지지 쪽지를 붙이는 것으로 호응했다.
결국 학교가 두 손을 들었다. 해고자 전원이 복직되었고 총장이 직접 교섭장에 나타났다. 용역회사와 함께 학교 측도 합의서에 날인했다. 공공서비스노조 서울경인지역 권태훈 조직부장은 “원청회사 최고경영자가 하청회사와 노동자 간 교섭장에 나타나고 하청회사 노사합의서에 날인한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간접고용에다 비정규직인 상태인 60세 전후의 청소할머니들이 이런 ‘전설’을 만드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환경미화 할머니들의 승전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감독자의 강압적인 통제와 폭언, 그리고 금품갈취에 맞서기 위해 2007년 결성한 덕성여대 미화노조는 지난해 등록금이 동결된 상황에서도 임금 5만원 인상을 관철시켰다. 정규직 임금도 동결된 상황이었다.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도 곧 미화노조가 설립될 예정이다.
연세대에서는 2008년 ‘살맛’이라는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연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학교 측이 체불임금 3억5000만원을 지불하게 했다. 용역회사가 아니라 학교 측이 직접 지불하게 만들었고 용역회사와의 임단협에 학교 측 관계자가 입회인으로 참관해서 합의서에 날인하게 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환경미화 노동자 노조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청주대에도 미화노조가 조직되어 용역업체의 횡포에 맞서고 있고 한양대(안산캠퍼스)에서는 연말에 용역업체를 바꾸면서 노조활동을 한 노동자를 집단해고하려는 것에 대해 총학생회와 미화 노동자들이 맞서고 있다. 2009년 12월 동덕여대 미화노조 할머니들은 5일간 파업해 학교 측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최저 임금 수준의 임금은 12만5000원이나 올랐고 해고자들은 전원 복직되었다.
노동운동사 다시 쓰는 청소 할머니들
대학 환경미화 노조 조직이 탄력을 받은 것에 대해 공공서비스노조 관계자는 “학교는 사기업과 다르다. 굉장히 부담스러워한다. 그리고 청소할머니들의 요구가 소박하다.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수준의 것을 요구한다. 최저임금 위반 등 대부분 열악한 고용조건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측이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대학 미화노조의 기원은 2002년 고려대노동절 행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절을 맞이해 고려대 학생들은 학내 청소용역노동자 실태를 파악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휴게실에서 쉬고 식대는커녕 한 달 임금이 40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노동조합 조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핵심 노동자 몇 명만 해고당했다. 다시 ‘불철주야(불완전노동 철폐를 주도할꺼야)’ 팀을 만든 학생들은 비밀리에 환경미화 할머니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 결실을 2004년에 맺었다.
할머니들이 노조 결성에 적극적인 이유는 임금이나 근로조건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고려대분회 김윤희 병원대표는 “노조 없을 때는 소장이 그랬다. 당신들은 말이니까 앉지 마라. 자도 서서 자라. 그러면 우리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복창해야 했다. 늙어서 까먹는다고 매일 아침 그 짓을 시켰다”라고 말했다.
노조가 만들어진 후 고려대 환경미화 할머니들은 학내외 연대 활동을 열심히 했다. 총학생회 등록금 집회에도 참석 했고 고려대 출교생들이 천막농성을 할 때는 명절 때마다 떡국을 끓여다 먹였다. 출교 무효 재판이 벌어지는 법원까지 함께 가서 응원했다. 할머니들의 그런 넘치는 정을 받아온 학생들은 할머니들을 위해 기꺼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반납할 수 있었다.
환경미화 노조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에 대해 권태훈 조직부장은 “요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로서의 자의식이 있다. 본인이 아르바이트나 인턴을 경험하면서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 임금체불 등의 노동시장 현실을 경험했다. 혹은 부모님이 외환위기로 실직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라고 설명했다.
고려대에서 사흘 만에 1만명의 학생이 환경미화 할머니들을 위해서 서명했듯이 성신여대에서는 재학생 9000명 중 6500명이, 덕성여대에서는 재학생 7000명 중 3500명이 3일 만에 서명했다. 고려대분회 김윤희 병원대표는 “학생들한테는 우리가 교과서다. 나이 들고 가진 것 없어 힘들게 사는 우리 모습을 보고 느낀 것을 사회에 나가서 책임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할 때 그런 것을 마음에 담으면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환경미화 노조는 이제 당당히 민주노총의 일원이 되었다. 12월30일, 한나라당의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집회에는 한원순 덕성여대 분회장과 홍현숙 동덕여대 분회장이 노조원들을 이끌고 함께 참석했다. 고려대 이영숙 분회장은 “예전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 인간들은 왜 저러나 그랬는데, 이젠 다들 이유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젊었을 때보다 세상을 더 깨치는 것 같아. 뉴스를 보면 와 닿아”라고 말했다. 환경미화노조의 투쟁가 중 애창곡 1위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다.
1939년생 최경순 할머니의 마지막 출근
2009년 12월31일 새벽 5시15분 미아리고개 버스정류장 동료 한 명과 최경순 할머니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생인 최 할머니는 이날 22년 동안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온 고려대학교에 마지막 출근하는 길이었다. 언덕에서 칼바람을 맞고 버스를 탄 다음 성북구청 앞에서 다시 갈아타서 고려대 이공대 후문에 도착한 시간은 5시55분이었다.
이날은 그나마 방학이라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한 것이었다. 보통 때는 4시30분에는 버스를 타야했다. 최 할머니가 청소를 시작한 것은 1988년 10월이었다. 청소일을 하고 번 돈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왔다. 최 할머니의 친정은 잘살았다고 한다. 피란 가서도 여고에 다닐 만큼 윤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인물이 좋았는데 인물값을 했어. 개떡같은 남편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애들은 인물이 좋아. 우리 둘째는 사람들이 차인표라고 그래”라고 말했다.
쉼터에서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은 최 할머니는 생활환경대학 5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임무는 5층 교수연구실과 실험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맨 먼저 하는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 교수연구실과 실험실 등 총 40여 개 사무실을 돌며 쓰레기를 치웠다. 방마다 보안키가 있어서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불편했다. 번호키는 비밀번호도 외우고 있어야 했다. 일흔 살의 그녀에게 디지털은 짐이었다.
쓰레기를 치우고 난 뒤엔 바닥 청소다. 바닥 청소를 할 때는 실험실을 조심해야 한다. 위험 약품이 많기 때문이다. 교수연구실과 실험실 청소를 마치면 복도를 청소한다. 최 할머니가 청소하는 복도 맞은편 건물에 “너의 젊음을 고대에 걸어라. 고대는 너에게 세계를 걸겠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최 할머니가 황혼을 바친 고대는 그에게 무엇을 줄까?
8시, 아침 청소를 끝낼 무렵 교수 한 명이 출근했다. 최 할머니도 친구 중에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예전엔 부러웠는데 지금은 안 부러워. 내 몸 가지고 내가 벌어먹는데 이만큼 떳떳한 것이 어딨어. 아파트 중도금 이자를 매월 60만원씩 내야 하는데 한 2년만 더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8시45분, 최 할머니가 동료들과 아침을 먹는다. 쌀은 학교와 싸워 지켜낸 폐지 판매대금으로 산 것이었다. 동료들은 최 할머니를 아랫목에 앉게 했다. 최 할머니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오는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로 노조 만든 일을 꼽았다. 퇴사를 1주일 남기고도 그녀는 동료들과 본관에서 이틀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10시, 아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최 할머니는 관리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에 합격하면 정년을 넘겼지만 촉탁직으로 근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위원장도 나와 있었다. 끝까지 동료를 지킨 그를 동료들도 지켜주었다.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최 할머니는 새해 아침 다시 ‘노동의 새벽’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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