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에!
그는 진짜 아티스트입니다.
자기 자신과 음악 밖에는 관심이 없는...
하지만 번잡한 세상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호명했습니다.
강산에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오므라진 무대,
그래도 강산에는 노래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콘서트 당시 강산에 공연 장면
"분노는 보편적으로 저항은 예술적으로"
탁현민 - 공연기획자, 한양대 겸임교수
강산에를 만났다. 일없이도 자주 만나는 몇 안 되는 가수이기도 하지만, 이번엔 그의 공연 어쿠스틱레인보우를 함께 준비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작년 한해 나는 그에게 진 빛이 적지 않다. 꼭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는 노무현대통령의 추모공연과 노무현 재단의 출범공연에 기꺼이 출연해주었고, 이런저런 돈 안되고 힘 만드는 시민사회단체 행사와 연결 할 때마다 싫은 내색 없이 나서주었다. 그래서 그에게 진 빛이 좀 과하다 싶을 때는 자청해서 그의 공연을 연출하겠다며 나서곤 하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다. 작년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갸륵한 심정 쯤 되겠다.
그는 돈보다도 혹은 명성보다도 '공연'을 좋아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공연에 함께하는 것에 무엇보다 행복을 느낀다. 적지 않은 노래이력과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늘 실험적인 것을 찾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론 그래서 좀 더 안정적으로 노래하고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기도 한다. 안타깝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이후 추모공연을 준비 하던 때, 구상에 골똘하던 나에게 그가 했던 충고는 '분노는 보편적으로 저항은 예술적으로'였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이 공연으로서 그리고 분노이상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저항은 예술적이어야 했다. 썩 달변이 아닌 그가, 이런 매끈한 말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수가 이런 말을 하는, 아니 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나를 충분히 매료시켰다. 사실, 예술이 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일종의 책무라 할 수 있다. 체제에 저항적인 문화가 풍성할수록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쉼 없이 창작되고, 소비될 수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은 당연하다. 80년대 이전까지 음반과 영상물 모든 창작물들에 대한 사전심의제도가 있었을 당시와 거꾸로 거슬러 가고는 있지만 오늘 우리의 문화현실을 비교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 소수자들을 위한 공연 <어쿠스틱 레인보우>
두번째 출연자 '강산에'
그러나 예술의 책무가 그러하다는 것은 또 그래서 강산에가 그러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산에가 주류음악시장과 미디어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을 낳게 되었다. 그는 상관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그의 공연장에 비어있는 자리를 보게 되거나 그의 노래가 예전같이 불려 지지 않을 때마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또 대중예술과, 대중예술인의 책무에 대해서 목소리 높였던 것에 부끄러울 뿐이다.
세상이 진보해야 한다고, 예술이 그러한 상상력을 견인해야 한다고 그것이 진정한 대중문화의 방향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체적으로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는 가수는 외면당하는 현실, 그것이 일정부분 당파적이거나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미디어와 주류시장에서 뿐 아니라 보편적 대중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절망적이다.
누군가 썼다. 이명박대통령의 당선은 결국 인격적, 도덕적 하자에도 불구하고 그저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넘어간 일종의 계약 결혼 같은 것이라고, 사랑없는 결혼이 행복할 수 없다는 지고의 진리를.
''문화예술 지못미' 프로젝트 > '소셜 엔터테이너'를 보호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풍'에 상상력을 불어 넣은 탁현민 교수 (4) | 2010.05.18 |
---|---|
책 읽는 김제동은 '신영복빠'였다 (3) | 2010.02.26 |
윤도현의 손이 여자 손보다 예뻐진 이유 (6) | 2009.12.11 |
우리가 모르는 이승환의 은밀한 선행 (10) | 2009.11.21 |
배우 윤계상에 대한 사과, 변희재에 대한 경고 (110) | 2009.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