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2>는 불편한 영화다. 취재현장에서 취재원에게 악다구니처럼 들러붙었던, 그리고 들러붙어서 살아야 할 우리와 같은 기자들에겐 특히 그렇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두드러진 악역은 기자들이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얼굴을 유지한 송두율 교수를 기자들은 괴물이라 전한다.
<경계도시2>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큐멘터리의 긴 호흡이 김장김치라면 우리(기자)들이 만드는 것은 그저 겉절이에 불과하다는... 송 교수에게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드는 우리(기자)들을 보면서,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보는 내내 불편했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답을 위해 맥락과 상관없이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지는 조선일보 기자들...
영화를 보고 나오며 트위터에 '섹스로 귀결되지 않는 홍상수 영화같은 다큐멘터리'라는 말로 형용해 보았지만 사실 이런 표현은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묘사로는 불손한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먹물냄새가 나지만 기실 아랫도리에 관한 영화다.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드러내지만 언저리에 맴돈다. 몸으로 체득한 것이 아니라 곁눈질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의심을 부르지만 행동은 믿음을 부르는 법이다. 시대의 고민을 안고 역사와 맞섰던, 그러나 광기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인간 송두율과 그를 동정과 연민과 의심과 감탄의 눈길로 보았던 감독의 복잡한 시선이 드러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가볍게 표현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것은 역사지 눈요기꺼리가 아니다. 홍상수 영화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영화다.
<경계도시2>를 보면서 '아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렇게 죽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조금 과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랬다. 시대의 광기와 지식인의 졸렬함이 빚어낸 그 마녀사냥을 보면서 예수를 떠올린 것은 무리한 상상력은 아니었다. 진영의 안녕을 위해 송두율 교수에게 전향을 강요하는 한 지식인의 모습은 예수를 판 유다와 그대로 겹쳤다.
취재 때문에 마지막 부분 10분~20분 정도는 보지 못했는데, 듣자하니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이 영화를 다시 볼 멋진 핑계가 생겼다. 3월18일 개봉하면 개봉성적표에 한 표 보태고 싶다. 이 영화가 <워낭소리>와 같은 기적을 낳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송두율 교수에게 되돌려줄 유일한 위로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고쳐질 수 없는 것이고 역사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욕의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다른 문제다. 잘 숙성된 김장김치같은 이 영화를 우리가 꺼내 먹는 이유는 이런 역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경계도시2>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말은, '모두가 송두율에게 훈수를 두려했다'라는 감독의 나레이션이었다. 사실 기자들도 취재현장에서 펜을 내려놓고 훈수 두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기사로 개입한다. 어디서나 경계인은 어렵다. 남과 북의 경계인으로 살고 싶었던 송 교수도 그런 경계인의 우를 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그의 노동당 가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3년 전 겪었던 ‘시사저널 파업’이 떠올랐다. 그때도 훈수 두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왜 그리도 사람들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지. 그때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으며 우리가 아직도 몰상식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했는데, 200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몰상식의 범람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시대를 응시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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