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에서는 '르포르타주 만화'를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르포르타주 만화'는 만화가 더 이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을 증거하는 예술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르포르타주 만화에 퓰리처상을 주는 이유>를 올립니다.
이 글은 만화평론가 김낙호 님이 쓰신 글입니다.
그리고 만화카페 룰루랄라 운영자이신 이성민님의 르포만화 대표작 10선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국내 대표적인 르포만화가로 꼽히는 최호철 작가의 작품. 한 장의 그림에 상황을 담아낸다.
글 - 김낙호 (만화평론가)
우리가 현재 르포만화라고 칭하는 만화양식은, 몇 가지 흐름이 겹쳐지며 생겨난 것이다. 그중 하나는 만화와 저널리즘의 오래된 결합이다. 다만 원래 저널리즘과 만화가 만나는 주된 방식은 시사풍자 만화였는데, 언론의 경우 글로 된 기사는 비교적 건조하게 사안을 사실 위주로 서술하는 것에 몰두하고 만화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생생한 시각적 비유를 통해 상황의 본질을 잔뜩 과장해서 유쾌하거나 서늘한 충격을 주는 것으로 분업이 이루어졌다.
또 다른 흐름은 수기형식 만화의 발흥이다. 소재에 따라서는 논픽션 사연이 어떤 픽션보다도 더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했으며, 주로 자전적 경험담으로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주로 주류 오락물보다는 독립만화계에서 작가주의적 의지의 일환으로 생성되었다. 즉 사회적 사안을 소재화하는 저널리즘적 전통, 논픽션 사연을 다루는 방식, 사안을 설명하는 기술 등이 합쳐지며 현재 르포만화의 모습이 만들어진 셈이다. 잘된 르포만화는 생생함을 잃기 쉬운 일반 기사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독자를 각각의 사연에 몰입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고라즈데',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전 세계적으로 르포만화의 장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가운데 하나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나치 치하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아버지를 취재해 그 사연과 취재과정을 같이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피해자인 유대인의 비극적 불쌍함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 경험과 현재의 모습, 가족 관계와 또 다른 인종 편견의 불씨들을 고루 중층적으로 보여주어 큰 호평을 받았다.
결국 르포르타주(르포·기록문학)로서의 저널리즘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에 퓰리처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쥐>는 등장인물들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미국인은 개 등으로 표현되어 각 국민의 특성과 상호관계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효과와 함께, 가벼운 어린이용 활극처럼 보이기 쉬운 모습 속에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넣는 치밀함을 구현한다. 즉 르포라는 정공법과 만화의 분방한 표현력을 함께 활용한 것이다.
자전적 요소보다 현장취재의 저널리즘적 엄밀함을 훨씬 부각시켜서 ‘만화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것은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다. 작가는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이후 팔레스타인 분쟁지역에 방문해 현지인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을 취재하는 우유부단한 서방인인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사연들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극화해 촘촘히 보여준다. 이 작품도 역시 단순히 피해자의 불쌍함이 아니라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가 굴러가고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명작이다.
국내 만화작가들의 대표적인 르포만화들
보수·진보 르포만화 다 있는 일본
이후 사코는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안전지대 고라즈데>에서 한층 서로에 대한 오랜 역사적 가해·피해 관계로 비틀린 사회의 모습을 처연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사코의 작품들은 극적인 경험일수록 더욱 인터뷰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표현기법을 구사하는데, 만화라면 당연히 드라마화된 에피소드로 표현될 법한 생생한 비극적 경험담의 묘사에서 오히려 인터뷰 대상의 얼굴을 보여주고 상황 설명을 말풍선에 하나 가득 빽빽하게 담아내서 역설적으로 현실감 넘치는 상황을 만들곤 한다. 작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들을 곱씹어보며 길거리를 거니는 대목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황량하고 생생한 풍경들이 끌어내는 감성도 일류 저널리즘의 면모를 보여준다.
혹은 기행문의 느낌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사의 아프가니스탄 참상 취재과정을 담은 모리스 기베르의 <사진사>, 캐나다 애니메이터 기 들리즐이 바라본 버마(미얀마) 사회의 모습인 <버마연대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사>는 ‘국경 없는 의사들’과 함께하며 1986년 소련 점령 당시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은 사진사 르페브르가 찍어온 실제 사진들을 삽입하고, 그 앞뒤 맥락을 만화화한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정지된 장면의 실제 사진과 유연한 이야기의 만화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깊은 상흔들, 그 속에서도 생명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떤 기사의 글귀들보다 뛰어나다.
<버마연대기>는 들리즐의 아시아 방문기 만화 3탄에 해당하는데, 전작에서 다룬 중국 쉔잔, 북한 평양에 이어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나타나는 경직성과 기이함, 그래도 사람들이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관찰한다. 이 작품들이 단순한 유람기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개별 사연들을 에피소드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 자신이 궁금해하는 어떤 모습을 더욱 깊게 파고들어가는 쪽으로 뚜렷하게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사안 설명에 훨씬 중점을 두는 방식은 일본에서 쉽게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과거사를 버린 강한 일본을 주장하고 제국주의를 미화해 일본 극우파들의 교과서 격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고마니즘 선언>, 그와 정반대 관점에서 만들어진 가리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 등이 쉽게 떠오르는 유명 작품이다. 본격적인 학습만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작품 속 해설자의 사안 설명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취재로 모은 다양한 실제 사연이 유기적으로 함께 섞여 여느 시사월간지의 심층취재 르포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많다. 다만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보니 에피소드 선택의 의도성이 너무 뚜렷하고, 복합적인 층위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단순화해서 설명을 계속 진행하려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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