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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연극이 끝나고

요즘 연극이 '독재시대'를 추억하는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4. 24.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공간개념이 아닌 시간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도 당대에는 비극이지만 지나고 나면 희극이 되는 것이다. 비극이 희극을 잉태하기 때문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라는 칼 마르크스의 명제가 성립한다. 


요즘 연극계의 화두는 ‘독재 시대 연극’이다. 독재 시대를 기억하거나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다룬 연극이 줄 지어 무대에 오르고 있다. 기억의 방식은 주로 희극이다. 고통스러운 시대를 즐겁게 기억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비극이 타인에게는 희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는 비극이 자신에게는 희극’이 되는 것이다. 


유신 시대 유신 반대 유인물을 만들었던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7인의 기억>과 한강 난개발 문제를 다룬 <순우삼촌>을 잇따라 무대에 올린 서울시극단의 김성만 단장은 “절망의 시대에는 희극이, 번영의 시대에는 비극이 흥한다. 지금은 희비극이 교차하는 시기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연극을 통해 요즘을 해석하자면 비극이 반복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멀리 떠나온 줄 알았던 비극을 다시 겪으면서, 그들의 비극이 나의 비극이 되면서, 지금 우리의 비극을 타자화한 희극이 나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재를 위무하기 위해 과거의 비극을 불러내지만 기억의 방식은 유쾌할 수 있다. 


비극이 반복되는 지금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창작자에게는 행복한 시기다. 역사의 비극이 풍부하게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요와 번영의 시대, 자유와 낭만의 시대에는 관객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독재 시대 이야기가 통한다. 그때 거기의 이야기가 오늘 여기의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해서 느낌이 풍성해진다. 


어렵게 부활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벼르는 명동예술극장은 6·25 한국전쟁의 비극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오장군의 발톱>을 35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세종문화회관 전속 극단인 서울시극단은 독재에 대한 집단 기억을 복원하는 이야기인 <7인의 무대>로 봄 무대를 장식했다. 주목되는 신예연출가 김재엽씨는 386세대 언저리에서 어설픈 운동을 경험했던 91학번의 이야기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로 롱런 중이다.   


이 세 작품의 배경은 각각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기, 1970년대 초반 유신독재기, 그리고 1990년대 초반 6공화국 말기다.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 3대에 걸친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의 경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세 작품이 오늘 여기의 우리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살폈다.  




■ 오장군의 발톱 


박조열 작품 <오장군의 발톱>은 명동예술극장이 ‘한국현대연극풍경’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올렸다. 1974년 쓰여진 이 작품은 원래 1975년 명동국립극장 무대에 상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연 불가’ 판정을 받고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서울의 봄’을 거친 후 1988년에야 극단 미추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1997년까지 재공연되다가 이후 주요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오장군의 발톱>이 부활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하나는 이런 작품을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작품이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신 시대처럼 이런 연극을 상연하지 못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는 소구력이 없었던 이 연극이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함께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꽃분이에게 장가들 날만 기다리던 무지렁이 농군 ‘오장군’은 오부자네 아들 오장군 대신 징집 통지서를 받고 입대한다. 전선에 총알받이로 팽개쳐진 그는 어느 날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다’고 외치는 동쪽 나라 사령관의 ‘안마병’으로 발탁된다. 무리한 작전으로 고립무원에 빠진 동쪽 나라 사령관은 순박한 그를 속여 서쪽 나라에 붙잡히게 만들고 역정보를 흘린다. 그가 진짜인 줄 알고 전한 가짜 정보에 속은 서쪽 나라 사령관은 뼈아픈 패배를 하고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총살한다. 억울해하는 오장군에게 그를 “그자는 죽음까지도 연기로 장식했다. 아무리 무식한 시골뜨기라도 이보다 더 시골뜨기 같을 수는 없다”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마지막 순간 “어무이 꽃분아 먹쇠야 보구 싶다’라고 외치고 죽은 그를 동쪽 나라 군대는 ‘동쪽 나라 만세’ 하고 외치며 죽었다고 칭송하면서 그가 전선에 나가기 전에 깎아두었던 발톱을 가족에게 전달한다. 

36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을 보면서 ‘지금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이 연극이 시대를 앞섰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36년 전으로 회귀했기 때문일까? 오장군의 모습에서 ‘오래된 미래’를 볼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적진에 버려져 모든 것을 떠안고 총살당한 오장군의 모습은 천안함 침몰사건 당시 모든 것을 알고도 바다에 들어가 정부의 모든 책임을 떠안고 사망한 고 한주호 준위의 모습과 겹친다. 

역사는 때로 실없이 반복된다. <오장군의 발톱> 대사처럼 ‘경험은 최선의 교사’이지만 환기하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된다. 늙으신 어머니와 약혼녀 꽃분이, 그리고 말 잘 듣는 소 먹쇠가 함께 어우러져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하다가 시대의 가파른 풍랑에 좌초하는 모습은 용산참사 유가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7인의 기억 


서울시극단이 젊은 연극인과 창작 공동연구 개발 과정을 통해 내놓은 <7인의 기억> 역시 그 시절의 이야기로 오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연출자 장우재씨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볼 때, 우리의 현재를 한발 비켜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발표되자 의협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정독고등학교 학생 7명은 비밀리에 교내에 유신헌법 비판 유인물을 배포한다. 그러나 비밀은 밝혀지고 이들은 모처에 끌려간다. 조사를 받고 배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곧 풀려나지만 이 경험은 이들에게 깊은 생채기를 낸다. 7명 중 서종태는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세상과 벽을 쌓게 된다. 38년 뒤 중년이 되어 학교를 찾은 다른 친구들은 당시 상황을 연극으로 만들기로 한다. 극본을 쓰고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상처가 복기되고 친구들은 힘들어한다. 과거의 악연은 서종태의 딸에게 재연되고 세대 갈등으로 나타난다. 결국 연극은 무대에 오르지 못하지만 후련히 속내를 드러낸 이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이 사건은 실재 사건을 소재로 했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이 사건은 7인 중 한 명이었던 정병호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가 당시 함께했던 친구들의 기억을 문화인류학적 조사작업을 통해 복원하면서 연극으로 재탄생되었다. 연출가는 똑같은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람에 따라 어떻게 왜곡되는지 주목했다. 과거는 결국 현재의 필요에 의해서 끝없이 재탄생된다.   

‘그때 거기’의 유신 반대 유인물은 ‘오늘 여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반대로 재연된다. ‘유신 소년’은 ‘촛불 소녀’가 되어 부활한다. 동맹 휴업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가 수업시간에 잡혀간 고등학생이 있는 이 시대가 고등학생을 지하 취조실에서 고문하던 그 시대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7인의 기억>은 ‘불편한 추억’이 ‘참담한 현재’가 되어 재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7인의 기억>이 38년 전 유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면 젊은 연출가 김재엽씨는 19년 전 ‘분신 정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386세대의 전설에 홀린 신입생 광석, 현식, 재하는 어설픈 운동권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해 봄은 가혹했다. 강경대 박승희 김귀정…. 숱한 이름이 스러져갔고 겁을 먹은 이들은 군대로 영화로 도피한다. 외환위기의 파고를 거쳐 1등신문 문화부 기자와 독립영화 감독 그리고 박사과정 중도 포기자 등 소시민이 되어 살던 이들은 대학 시절 셋 모두가 좋아했던 유정이 연 헌책방 ‘오늘의 책’에 모인다. 이들의 운동권 선배와 연애했던 유정은 끝까지 남아 학생회를 지켰고 구속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그 선배는 셋을 끔찍이 챙겼고 그래서 그들이 가장 존경했다. 그러나 선배를 등졌던 광석과 재하는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오늘의 책’에 모인 이들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씩 꺼내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오늘의 책’은 연세대 앞에 실제로 있었던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다. 10년 전 사라진 ‘오늘의 책’을 추억하며 이들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밑줄 쳐가며 읽던, 그래서 자신을 변호할 핑계를 발견하던, <지식인의 종언>으로 핑계의 끝을 찾던 자신이 배워서 남 주지도 못하고 자신이 갖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소시민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낮에는 선배들과 혁명을 얘기하는 ‘짝퉁 386’으로, 밤에는 후배들과 서태지를 노래하던 ‘신세대’로 살았던 1990년대 초반 학번을 위한 불편한 ‘기억 창고’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집회에서 말보로 담배를 피우다 쫓겨나고 5·18 기념집회 뒤풀이에서 선동을 하고 신해철의 ‘재즈 카페’를 불렀던 주인공들의 모습은 1990년대 초반 ‘삐삐 세대’의 기억을 자극한다. 운동의 끝물과 소비 대중문화의 첫물이 겹치는 시기의 ‘낀 세대’였던 그들은 386세대보다는 발랄하고 88만원 세대보다는 진지했다.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의 주인공들은 번갈아가며 “헌책방의 책들은 다 헌책일까?”라고 묻는다. 연출자 김재엽씨는 “(이 질문이 내포한 답은) 헌책은 늘 새롭게 재탄생한다. 그래서 새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헌책이 새책이 될 수 있듯 60년 전 한국전쟁이, 40년 전 유신이, 20년 전 분신 정국이 ‘오래된 미래’가 되어 현재에 재연되면서 그 시절의 고뇌가 오늘 우리의 문제에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