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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연극이 끝나고

세상은 '지랄이 풍년' 연극계는 '풍자가 풍년'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4. 28.

연극 '오장군의 발톱'



이명박 정부는 지랄이 풍년이고, 요즘 연극계는 풍자가 풍년이다. 권력과 금력에 대한 조롱이 각광받는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서거 이후 사회비판적인 연극이 줄지어 등장하고 있다. 암울한 독재의 데자뷔에 독재를 추억하는 것이다. 독재 시대에 대한 이야기나 독재 시대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되짚는 작품이 각광받고 있다.


<늘근 도둑 이야기> <비언소>로 통렬한 풍자와 통쾌한 조롱을 선보였던 이상우 연출가는 번안극 <광부화가들>(명동예술극장 5월5~30일)에서 다시 한번 농익은 해학을 선보인다. 누군가는 까불고 떠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그는 <칠수와 만수> 이후 또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문소리 권해효... 출연진도 예사롭지 않다. 그동안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해왔던 배우들이다. 


풍자극은 촛불집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거치면서 참여 연극이 부쩍 늘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마라, 사드>(박근형 연출)를 선보인 이후 <정말 부조리하군> <꽃님이발관> <태수는 왜> <운현궁 오라버니> <다윈의 거북이>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등이 줄지어 무대에 올랐다. 


재개장한 명동예술극장은 풍자극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오장군의 발톱>을 무대에 올렸고(초연 당시에는 검열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일본에서 웃음을 억제하기 위해 코미디극을 검열했던 것을 소재로 한 호시 마모루 작품 <웃음의 대학>(코엑스아트홀 3월11일부터 오픈 런)은 장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1991년 분신정국의 기억을 담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역시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풀빛극장에서 오픈 런으로 공연되고 있다.  

 

연극 '7인의 기억'

 

봄 무대는 더욱 풍성해졌다. 무죄를 증명하지 못해 죄인이 되는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를 다룬, 프란츠 카프카 원작을 앙드레 지드가 각색한 <심판>(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4월30일~5월9일)이 오르고, 서울시극단은 <7인의 기억> 후속작으로 잠실이 섬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는, ‘한강 르네상스’와 ‘4대강 사업’에 문제 제기를 하는 <순우삼촌>(세종 M시어터 4월22일~5월1일)을 올린다. 


대기업 회장의 만행에 복수하는 이야기를 담은 <리회장 시해사건>(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5월5~9일)은 최근 복귀한 ○○그룹 회장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풍자가 대세인 것은 <왕의 남자> 원작 <이>(부산MBC 롯데아트홀 5월28~30일)에서 한강 난개발을 풍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관심을 얻지 못했던 이런 참여 연극의 무대가 넒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답은 지난해 6월26일 ‘현 시국에 대한 연극인 선언문’에 연극인 1027명이 서명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날 연극인들은 “파행적 정치의 저변에서 권력의 오만방자함과 인간에 대한 무례함을 읽는다. 나와 견해가 다른 자는 먼지라도 털어서 죄를 들추어내는 적대적 편 가르기와 소통의 부재를 읽는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며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군림하는 신자유주의적 독선을 읽는다”라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연극인 선언에 연극계 출신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움찔했다. 그는 “연극인 시국선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딱 그만두고 싶었다”라고 나중에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정작 연극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괴로운 사람은 연극인이었다. 연극인 선언을 주동했던 소장 연출가 5인에 대한 살생부가 나돌았다. 그리고 연극 관련 상을 싹쓸이하고 지원금 공모전에서 빠지지 않던 그들의 이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한 연출가는 “정부 돈 받고 정부 비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동안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는 그 돈 안 받고 실컷 비판하겠다”라고 말했다.    


배우들도 된서리를 맞았다. 국립극단이 4월30일 부로 해체될 예정이다. 국립극장 법인화를 주친 중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상주하는 예술단 중 국립극단을 본보기로 해체했다. 단원들의 연령이 높아 노조 조직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를 장악하려는 정권의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연극계가 ‘낮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객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다. 올봄 이 잔치판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7인의 기억>이 38년 전 유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면 젊은 연출가 김재엽씨는 19년 전 ‘분신 정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386세대의 전설에 홀린 신입생 광석, 현식, 재하는 어설픈 운동권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해 봄은 가혹했다. 강경대 박승희 김귀정…. 숱한 이름이 스러져갔고 겁을 먹은 이들은 군대로 영화로 도피한다. 외환위기의 파고를 거쳐 1등신문 문화부 기자와 독립영화 감독 그리고 박사과정 중도 포기자 등 소시민이 되어 살던 이들은 대학 시절 셋 모두가 좋아했던 유정이 연 헌책방 ‘오늘의 책’에 모인다. 이들의 운동권 선배와 연애했던 유정은 끝까지 남아 학생회를 지켰고 구속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그 선배는 셋을 끔찍이 챙겼고 그래서 그들이 가장 존경했다. 그러나 선배를 등졌던 광석과 재하는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오늘의 책’에 모인 이들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씩 꺼내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오늘의 책’은 연세대 앞에 실제로 있었던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다. 10년 전 사라진 ‘오늘의 책’을 추억하며 이들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밑줄 쳐가며 읽던, 그래서 자신을 변호할 핑계를 발견하던, <지식인의 종언>으로 핑계의 끝을 찾던 자신이 배워서 남 주지도 못하고 자신이 갖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소시민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낮에는 선배들과 혁명을 얘기하는 ‘짝퉁 386’으로, 밤에는 후배들과 서태지를 노래하던 ‘신세대’로 살았던 1990년대 초반 학번을 위한 불편한 ‘기억 창고’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집회에서 말보로 담배를 피우다 쫓겨나고 5·18 기념집회 뒤풀이에서 선동을 하고 신해철의 ‘재즈 카페’를 불렀던 주인공들의 모습은 1990년대 초반 ‘삐삐 세대’의 기억을 자극한다. 운동의 끝물과 소비 대중문화의 첫물이 겹치는 시기의 ‘낀 세대’였던 그들은 386세대보다는 발랄하고 88만원 세대보다는 진지했다.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의 주인공들은 번갈아가며 “헌책방의 책들은 다 헌책일까?”라고 묻는다. 연출자 김재엽씨는 “(이 질문이 내포한 답은) 헌책은 늘 새롭게 재탄생한다. 그래서 새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헌책이 새책이 될 수 있듯 60년 전 한국전쟁이, 40년 전 유신이, 20년 전 분신 정국이 ‘오래된 미래’가 되어 현재에 재연되면서 그 시절의 고뇌가 오늘 우리의 문제에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