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편의 ‘공짜 연극’이 있다. 한 편은 대놓고 ‘반(反)이명박 연극’을 표방한다. 다른 한 편은 ‘선진 문화국가로서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추진하는 테마형 문화외교 사업으로, 녹색성장을 주제로 한 복합장르 음악극’을 표방한다. 둘 다 입장료가 없다. 당신은 이 두 연극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삽과 쥐’라는 노골적인 제목이 붙을 뻔했던 반 이명박 연극의 제목은 <아큐, 어느 독재자의 고백>(아큐)’이다. 명계남이 출연·기획하고, 탁현민이 기획·연출했으며, 여균동이 연출·출연했다. 모노드라마 <아큐>는 코르마 민주공화국 대총통 ‘아르피무히 마쿠(아큐)’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누구 얘기인지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도록 온갖 힌트가 제공되어 있는 반MB 연극이다(작품을 보고 자신이 생각한 가치만큼 자율적으로 관람료를 지불한다).
반면 박상천 시인의 시 13편을 음악극으로 엮은 <나무>는 ‘G라인’에 속한다. 11월11~12일 열리는 G20을 기념하는 기념강연회(대한민국 선진화, 길을 묻다), 기념음반(Let’s go), 기념콘서트(아시아송 페스티벌), 기념전시회(한·중·일 삼국 팝아트 전), 기념문학제(세계문학기행), 기념음악회(정명훈 지휘)와 같은 관변 문화 행사 중 하나에 속한 연극이다.
출연자·연출자·기획자가 ‘누가 먼저 잡혀가는지 내기를 걸자’고 농치는 가난한 연극 <아큐>와, G20을 유치한 이명박 대통령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교류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예산 3억원으로 제작된, 풍요로운 연극 <나무>는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아큐, 어느 독재자의 고백
강한 정치성 때문에 연극적 진정성 저평가
처한 상황은 극과 극이지만 <아큐>와 <나무>는 비슷한 멍에를 쓰고 있다. 바로 정치성이다. 친MB든 반MB든 정치적 맥락 때문에 연극이라기보다 선전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 출신으로 대표적 친노 연예인으로 꼽히는 명계남씨와 반MB 성향의 여균동 감독, 그리고 노무현 추모 콘서트를 연출했던 탁현민 (주)P당 대표의 조합은 색깔이 선명했다. 전여옥 의원 팬클럽에서 온 관객 두 명은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항의 표시를 하기도 했다.
강한 정치성 때문에 연극적인 진정성은 묻힌다. “마술사는 진실의 가면을 쓴 환상을 보여주지만 배우는 환상의 가면을 쓴 진실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말이지. 나는 권력의 가면을 쓰고 너희들의 욕망을 보여주지. 그런 의미에서 난 마술사에 가까워”라는 아큐의 독백은 이 연극이 권력에 대한 조롱을 넘어 ‘권력으로부터의 조롱’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큐>의 연극적인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독재자로 비난받는 아큐는 그 같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조롱한다.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뽑아놓고 왜 지랄들이야. 내가 치사스럽게 선거를 조작했니, 투표함을 바꿨니, 돈을 뿌렸니? 나, 이래 보여도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차지한 놈이야. 코르마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 니들이 뽑은 거야.”
그리고 배신을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국민이라고 일깨운다. 정책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국민을 조롱한다. “뽑았으면 일을 하게 해줘야지. 왜 뒤에서 욕하냔 말이지. 내 말이 틀렸어? 그리고 전임자가 하던 일을 뒤집는다고? 전임자하고 같게 할 거면 나를 왜 뽑아. 또 똑같이 하면 똑같이 한다고 지랄할 거 아냐? 달라야지…. 지루하잖아. 안 지루해?”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씨는 “이명박을 선출한 것은 우리 안에 이명박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싸우기 전에 우리 안의 이명박과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큐>는 바로 ‘우리 안의 이명박’을 일깨우는 연극이다. 그래서 통쾌하면서도 불편하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명계남씨에게는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탁현민 대표는 “많이 힘들어했다. 연출자와 계속 충돌했고 강원도 홍천의 집으로 숨어들어 가서 (우리가) 계속 찾아가 달랬다. 작품을 포기하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나무>는 <나무>대로 억울하다. 연극계 최고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김아라씨가 연출하고, 미디어아티스트 최종범씨, 재프랑스 화가 홍현주씨, 국악 피아니스트 임동창씨, 사진작가 임종진씨 등이 쉽지 않은 조율 과정을 거쳐 복합 장르극을 만들어내고 스물한 살 풋내기 배우부터 여든다섯 살 원로배우까지 신구 배우들과 프랑스·브라질·말레이시아·토고 등 외국 배우들이 어우러져 높은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작업했는데, 이 모든 것이 ‘G20을 빛나게 하기 위한 관변 행사’라는 딱지에 묻혀버렸다.
음악극, 나무
‘녹색’만 있고 ‘성장’은 없는 <나무>
‘선진 문화국가로서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추진하는 테마형 문화외교 사업으로 녹색성장을 주제로 한 복합장르 음악극’이라는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있는 <나무>는 정부 정책 홍보를 위한 예술작품으로 비친다. 그러나 작품의 속살은 다르다. 무거운 외피를 뚫고 상상력이 돋아나 있었다. ‘녹색성장’을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사실 ‘녹색’만 있고 ‘성장’은 없다. <나무>를 ‘성장’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브는 공연장 바닥에 테이프로 그린 복잡한 선뿐이다. 김아라씨는 이를 “물이라고 할 수도 있고 길이라고 할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일종의 물길, 즉 4대강인 셈이다. 3억원의 제작비 전부가 정부지원금인 작품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다 표현하고도 공연장 바닥에 테이프 몇 불 붙여놓는 것만으로 예를 표하는 것은 영리한 연출이었다.
연출가 김아라씨는 “연습장의 흰 테이프는 배우들의 동선을 위한 것이다. 그 테이프는 무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나무 한 그루의 그림이며 이 그림은 연극의 종결부분에 거울을 통해 그 형상을 나타낸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다룬 순수연극 한 편이 4대강 홍보라는 정치적 목적극으로 오인되는 것, 심히 우려하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아큐>는 권력자의 처지에서 국민을 조롱하고, 정권의 지원을 받은 <나무>는 정권의 바람과는 다른 것을 표현했다. 누가 누구를 조롱한 것일까? 감옥에 갇힌 아큐는 마지막 순간 말한다. “지금도 니들이 나를 잡아온 거라고 믿고 있어? 니들이 나를 퇴장시킨다고 믿는 거지? 니들이 승리했다고 믿는 거지? 좋아. 믿는 건 자유지만 니들의 자유는 종이짝에 불과한 헛된 망상… 나는… 꿈에서 깨어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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