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을 헛되이 보냈던 날은 웃지 않았던 날"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시사회에서 무대 인사를 하며 이준익 감독은 담담하게 말했다. “최근 화장실 낙서에서 기가 막힌 문구를 발견했다. ‘인생을 가장 헛되이 보냈던 날들은 웃지 않았던 날들이다’. 멋진 말이다. 영화가 흥행이 되든 안 되든 웃고 살겠다.” 권력과 반권력을 모두 초월한 인물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적합한 무대 인사로 들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동명 만화(박흥용 작)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만화는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하고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던 2005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한국의 책 100’에도 선정되었던 한국 만화계의 고전이다. 스토리텔링과 작화기법이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국적 상상력의 보고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한국 영화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 명인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을 만나서 어떤 시나위를 만들어내는지는 영화계는 물론 만화계의 관심까지 모으는 작업이었다. 그 만남이 어떤 곡조를 빚어냈는지, 시사회에 참석했던 박흥용 작가를 만나 만화의 영화화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만화와 영화는 다르다. 만화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다. 만화와 영화의 차이만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원작 만화와 영화의 차이는 컸다. 만화에서는 서자 출신의 개차반 견주(극중 그는 ‘개새끼’라는 의미의 견자(犬者)로 불린다. 백성현 분)가 극중 화자다. 그의 시선을 통해 계급주의에 매몰된 양반 사회의 모습과 권력에 집착하는 산채 리더들의 모습을 그린다.
# 이야기의 기둥, '견자'에서 '이몽학'으로
반면 영화에서는 이몽학(차승원 분)의 혁명 여정을 따라 스토리가 구성된다. 영화의 무게중심과 시선이 견주에서 이몽학으로 옮아온 것이다. 블록버스터를 욕망한 영화는 떠돌이 검객보다 냉정한 혁명가를 택했다. 견주와 그의 스승인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 분)은 각각 아버지와 친구(정여립)의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뒤쫓는 인물로 그려진다.
원작 판권 계약을 위해 찾아온 이 감독에게 박 작가는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마음껏 고쳐 창작하시라”며 상상력의 여지를 열어주었다. 바뀐 이야기에 대해 그는 “마치 걸 그룹 소녀시대를 보는 느낌이었다. 섹시한 여성, 귀여운 여성, 참한 여성. 취향대로 좋아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영화에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해 함께 스토리를 끌고 간다”라고 말했다.
원작 만화에 비해 영화에서 현저히 떨어지는 부분은 캐릭터의 완성도다. 꼴통기 빠진 견주는 말썽꾸러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황정학은 구도자가 아닌 복수가로 그려진다. 이몽학은 혁명가가 아니라 야심가로, 그리고 그의 여인 기생 백지(한지혜 분)는 양가집 규수처럼 그려졌다. <선덕여왕> 비담과 <추노> 대길을 보았던 관객에게 견주는 미친 개가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로밖에, <선덕여왕> 미실의 카리스마를 본 관객에게 혁명가 이몽학은 무데뽀 칼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작은 담백한 수묵화, 영화는 화려한 채색화
인물의 성격과 갈등 구조가 바뀐 것에 대해 박 작가는 “인물 캐릭터를 만드는 일은 전봇대를 세우는 것과 같다. 너무 멀면 끊어지고 너무 가까우면 늘어진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이도’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의 캐릭터들은 간격을 잘 유지하고 있다. 다만 기둥 두 개가 흔들리는 것 같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캐릭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연성이다. 그 인물이 그런 캐릭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박 작가는 “관객이 취조하듯 캐릭터의 개연성을 물어도 작가는 알리바이를 댈 수 있어야 한다. 만화와는 다르지만 영화의 인물들은 나름 개연성을 가진다. 그러나 주변의 요구에 감독이 양보한 흔적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구르믈…>의 원작 만화는 서자 견주가 맹인 검객을 따라다니며 깨달음을 얻는 구도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몽학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만화에서는 모호하고 막연한 인물로 그려졌던 그가 영화에서는 전면에 등장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에 대해 박 작가는 “힘 있는 엔진이다.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면 힘이 안 생기는데 힘 있게 끌고 가더라. 역시 이준익 감독은 스토리텔러다. 하지만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아서 후반부에 몰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곰삭은 김장김치가 화려한 겉절이로 재탄생
‘모두가 해 아래 말라버리는 들의 풀과 같다’라는 구도적 개념을 전하는 원작 만화는 영화로 바뀌면서 ‘몽환적 비극’으로 바뀐다. 영화는 일장춘몽의 알레고리다. 신하들의 패싸움만 지켜보던 왕은 허망하게 도성을 버리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빈 도성에 들이친 이몽학은 신출내기 검객에게 칼을 맞고, 그 비극의 현장을 다시 왜군이 덮는다.
허망한 싸움을 마치고 이몽학이 본 것은 ‘떨어지는 해’였다. 왕조의 폐허 위에서 칼을 맞은 이몽학은 사랑했던 여인의 품에 안겨 조용히 읊조린다. “다 함께 꾸는 꿈을 꾸고 싶었다.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임을 보내며 백지는 그 꿈의 빈틈을 지적한다. “당신 꿈엔 왜 내가 없는 거지? 우리 꿈속에서 만나”라고.
만화가 줄 수 있는 재미와 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는 다르다. ‘B급 좌판’에서 원작 만화를 소개하며 영화를 보기 전에 예습할 것을 권했는데 영화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 반대가 낫겠다. 원작 만화가 훨씬 풍부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 보는 것이 낫다. 영화와 원작 만화의 차이를 굳이 들자면 화려한 겉절이와 곰삭은 김장김치 정도로 비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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