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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키 작은 영화들

리메이크 영화의 전범이 될 <하녀>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5. 4.



영화 <하녀>는 현대적이다. 그것은 김기영 감독의 원작이 현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임상수 감독이 현대적으로 잘 재해석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무엇보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인면수심이 되는 '그들' 재벌의 행태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녀>는 영원히 현대적일 것. 


<하녀>는 사회학 전공자로서 임상수 감독의 특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누릴 것을 다 누리려는 욕망,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박이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개연성을 만들어낸다. 재벌 안에서도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엄정함과 그들에 기생해 살아가는 지식인의 비열함까지.  


무엇보다 배우들이 눈부시다. 전도연의 연기력이 살아있고 윤여정의 인생인 녹아있고 서우의 가능성이 확인되는 영화다. 여기에 이정재의 적절한 쓰임새까지(이정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게 해 오브제로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고전영화 리메이크의 교본이 될 수 있을 듯(원작을 본 사람들은 다른 평가를 내릴 지도 모르겠지만).


<하녀>는 전도연과 윤여정 두 하녀의 영화다. 이들을 부리는 ‘마님’, 박지영과 서우는 맞수가 되지 못한다. 캐릭터도 평면적이고 연기도 눈부실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박지영과 서우를 중심으로 보면 '하녀'는 어설픈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설프지 않다. 전도연과 윤여정을 중심으로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 


<하녀>를 이해하기 위한 한 단어는 '아더메치'다. ‘아니꼽구 더럽구 메시꼽구 치사해도 참는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고참 하녀 윤여정의 직업윤리이면서 자본주의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다. 아더메치의 달인 윤여정과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꾼 전도연은 그래서 다른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듯. 




'하녀'에서 이정재는 훌륭한 오브제 역할을 해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연기가 아니라 설정으로서 역할을 해냈다. 임상수 감독은 그가 연기로 보여주지 않고 보면서 상상할 수 있도록 연기를 자제시켰다. 이것은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점이었다. 여성 관객들은 불편함 없이 이정재의 몸만 즐길 수 있을 것. 


<하녀>가 풍부하게 읽히는 것은 드라마에 재벌이 풍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익숙한 신데렐라이야기가 색다르게 전개된다. 영화 속 전도연(하녀) 캐릭터는 캔디와 신데렐라가 믹스된 캐릭터다. 합쳐서 '캔디렐라' 정도. 드라마와 차이가 있다면 외롭고 슬프면 우는 캔디라는 것이고, 백마 탄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 


한국은 드라마가 세기 때문에 영화가 스토리텔링의 보완재 역학을 한다. 드라마에는 못된 '시어머니'가 나와 설치니 영화에는 못난 '친정엄마'가 나오듯 재벌2세와의 러브스토리에 대해서도 드라마에서는 ‘사랑일 수도 있다’라고 말하고 영화에서는 ‘사랑일 리가 없다’ 고 꿈 깨라고 말한다. 마치 드라마 속 환상 품으면 ‘이꼴난다’라고 말하는 듯.


<하녀>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대저택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에서 ‘그 안에서 벌어릴 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영화는 현실적이지 않은 설정에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반면 드라마는 재벌가와 재벌기업을 현실적으로 설정해 놓고서 그 안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차이. 




재벌드라마는 세뇌한다. 하나, 재벌2세는 아픔이 있을 수 있다고 세뇌한다. 둘, 재벌2세도 평범한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세뇌한다. 셋, 재벌2세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있다고 세뇌한다. 넷, 재벌2세 말고도 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세뇌한다. 여성 시청자들이 즐기는 것은 공든 세뇌. 


<하녀>는 다르다. 꿈에서 깨라고 말한다. 임상수 감독은 특기인 재벌과 재벌가 안주인들의 뇌를 해부하며 까발리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재벌2세라면 저렇게 자기만 생각하겠구나, 재벌2세에 딸 시집보낸 엄마는 저렇게 까지 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러다 찾아오는 불편한 결말. 


<하녀>는 우화다. 가진 자들의 속물성, 그리고 그 속물성에서 파생한 잔인성, 그리고 그런 것에 기대는 나약함이 담긴 알레고리다. 앞에서는 애정이 넘쳐 죽겠다는 듯 오버하다가 뒤에서 '개새끼' '개같은년' 욕하는 재벌2세 부부, 딸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악역을 도맡는 장모, 그러나 독기를 품은 하녀에게는 한없이 무력한 그들, <하녀>는 재밌다.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감정의 진공청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