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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즐겨라. 트위터라는 '소셜 부비부비 서비스'를...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5. 10.





트위터가 화제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트위터에 안달복달이다. 선관위가 트위터에 얽매이는 까닭은 아마 ‘트위터만 막으면 된다’라는 판단이 서서 일께다. 선관위의 예민한 촉수는 벌써 나에게까지 뻗었다. 서울시장 후보 관련해 재미삼아 트위터에 올려놓은 설문을 문제 삼아 시비를 걸었다. 이런 선관위의 히스테리에서 ‘트위터 포비아’가 읽혔다.

 

트위터는 그냥 사람들이 잡담을 떠는 곳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왜 무서울까? 왜 시덥쟎은 농담이 두려울까? 아마 그 공포는 ‘개똥녀’에서 발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개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가 개똥을 치우지 않은 일 때문에 ‘개똥녀’로 매도당하며 모든 신상정보가 털리는 여대생의 모습을 보면서 인터넷은 ‘한 방에 훅 가는 곳’으로 각인 되었다.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최진실씨 등 연예인들의 자살도 악성 댓글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이런 공포증이 더해졌다.

 

맞다. 그런 곳이다. 인터넷은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이것은 사람이 개를 무는 사례나 마찬가지 얘기다.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희귀한 사례라는 방증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개가 사람을 물 듯, 인터넷은 혹은 모바일은 자고 일어나니 이슈가 되는 ‘이슈의 패자부활전’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억울해 죽겠다’고 올려 놓으면 최소한 억울해서 죽지는 않게 알아주고 위무해지는 곳이다.

 

이런 이슈의 반역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블로고스피어와 트위터다. 인터넷이 모바일로 무대를 옮기면서 그런 경향성은 더욱 커졌다. 둘은 뉴스 생산의 민주화와 유통의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언론사가 독점하던 뉴스 생산구조를 블로그가 깼고 언론사가 독점적으로 행하던 뉴스 유통 전쟁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트위터 이용자도 참전했다. 블로그콘텐츠가 모이는 메타블로그와 트위터러의 RT(retweet 전달)는 이를 가능하게 한 ‘디지털 불’이었다.

 

이 생산과 유통의 민주화를 통해 이름 없는 시민의 폭로와 허약한 구멍가게 언론사의 뉴스가 주류언론사 뉴스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아바타>의 신령스런 나무처럼 씨줄과 날줄로 얽혀 ‘집단지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모두가 블로그라는 뉴스의 성을 쌓고 트위터라는 뉴스의 길을 내 누구나 뉴스 생산자이여 유통자이며 현명한 소비자인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즐겨라. 아바타들이 몸으로 맞 비비는 '소셜 부비부비' 서비스의 시대다. 

 

이제 관건은 두 가지다.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절실한 뉴스인가 하는 것과 이를 전하려는 소통의 의지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나 하는 것이다. 프로 저널리즘과 아마추어 블로거리즘으로 구분하던 이분법은 사라졌다. 뉴스의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1부리그와 2부리그,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가 따로 없다. 블로그와 트위터는 거대한 이슈의 원형경기장을 만들어 무명의 뉴스 검투사들이 싸울 수 있게 판을 만들어 주었다.

 

이 원형경기장은 한 사람의 승자를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다. 더불어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파워블로거로서의 경험(블로고스피어에서 꽤 잘 나갔다), 그리고 파워트위터러로서의 경험(팔로워 2만 명은 나같은 ‘듣보잡’에게는 기록적인 수치다)을 합친 결론은 블로그와 트위터로 ‘모든 시민은 미디어다(이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창간 명제를 넘어선 것이다)’라는 명제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블로그와 트위터는 뉴스의 원형경기장에서 ‘1인 미디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창과 방패다. 둘의 관계는 이제 비유하자면 ‘사랑 없는 섹스와, 섹스 없는 사랑’의 관계와 같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불완전 미디어’다.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시대, 이 뉴스의 창과 방패로 무장한 ‘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가 이슈의 패자부활전을 이뤄내는 곳이다.

 

하늘의 별과 같이 미디어가 많아진 시대다. 그러나 결코 넘치지 않는다. 그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시위한다고 해서 은하수를 구조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는 ‘1인 미디어’의 역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왜? 모두가 소중하니까.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