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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트위터계 간달프, 이외수 선생이 팔로워 20만을 모은 비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6. 30.





트위터에서 작가 이외수씨(사진)는 ‘간달프’로 통한다. 한 번 글을 올릴 때마다 글이 마법처럼 트위터에 퍼지기 때문이다. 트위터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숱한 문청과문학소녀들이 그를 따른다. 얼마 전 그는 김연아를 제치고국내에서 가장 많은 팔로어를 보유한 트위터러가 되었다. 그를 추종하는 트위터러는 20만명이 넘는다. 그 20만명이 열광적으로 반응해 전 세계에서 답변(Reply)과 전달(Retweet)이 많은 트위터러로 10위 안에 꼽힌다.


언어의 사금파리를 찾아 쓰레기통 같은 인터넷 게시판을 뒤지는 그가 건져낸 말을 올리면 트위터러들은 ‘빵 터진다’. 산전수전 공중전, 외계인과 교신하며 우주전까지 겪은 그는 탁월한 고민 해결사이기도하다. 트위터에 중독되어서 고민이라는 트위터러에게 그는 가볍게 “재밌을 때는 그냥 재밌는 것 해라”고 충고한다. 


트위터에서 그는 듣기 좋은소리만 하지 않는다. 누리꾼들이 못된 말을 전달하는 것이 보이면 호되게 나무란다. “어른이 없어진 시대다. 어른이 없어진 데는 어른들 탓도 있다. 어른 노릇을 안 하려고 한다. 요새 어른들은 젊은것들에게 싫은 소리를 안 한다. 나는 한다.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욕 좀 먹으면 어떤가. 아니다 싶으면 따끔하게 얘기한다.”


트위터에 올렸던 글을 모아 <아불류 시불류>(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을 펴냈다. 소생법(<청춘불패>) 생존법(<하악하악>) 소통법(<여자도 여자를 모른다>)에 이은 ‘비상법’이다. 그는 이번 책에 대해 “트위터에 올렸던 글을 보기 좋고 읽기 좋게 그냥 가지런히 모았을 뿐이다”라고 싱겁게 설명했다. 




주> 다음은 제가 2008년 1월에 했던 이외수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강원도 화천군 깊숙이 ‘짱박혀’ 사는 이외수씨를 P당기획의 탁현민 대표(아름다운 시선 캠페인 총괄 기획자)와 함께 찾아가서 만났다. 탁 대표는 이씨가 춘천에 살 때부터 문안을 드리던 ‘문청’이었다. 그 '문청'이 자라서 내로라하는 문화 기획자가 되어 다시 그를 찾았다.  

‘감성 관리사’를 자처하는 이외수씨는 2년 전 오랫동안 살았던 춘천시를 떠나 강원도 화천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감성마을’을 만들어 예비 문학인을 지도하며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성을 불어넣고 있었다. 라고 주장했지만, 실체는 조금 달랐다. 

‘감성마을’에 와서도 그의 기행은 여전했다. 첩첩산중에 둥지를 튼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빠져든 일은 인터넷 채팅이었다. ‘독서 삼매경’이 아니라 ‘클릭 삼매경’에 빠져 ‘계급장 떼고’ 네티즌과 만나는 그는 손주뻘 되는 초딩들에게 ‘민증 까면서’ 빛의 속도로 소통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에게 배울 것은 맞춤법만이 아니었다. 소통을 배워야 한다.

약속한 시간에 찾아갔을 때 그는 낮잠을 고이 자고 있었다. 밤새 네티즌과 소통하느라 그런 것이라고 했다. 깨울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몇 시간 동안 ‘빙고 게임’을 하며 기다렸다. 몇 시간을 기다려 들은 그의 교시는 “가장 위대한 것은 쓰레기통 속에 있다”는 말이었다. 가장 비루한 것 중에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왜 감성에 천착하는가? 
지금까지는 이성이 지배하는 형이하학 시대였다. 느껴야 하는 시간보다 외워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예체능보다 국·영·수가 중요했다. 이제 감성을 중시하는 형이상학 시대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겨냥해야 한다. 두뇌 중심 교육이 아니라 감성 중심 교육을 해야 한다.


감성을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나? 
알려고 애쓰지 말고 느끼려고 애써야 한다. 알 수 있는 것보다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느끼는 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감성을 회복하기 위해 아름다운 시선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상과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이 잘 조화된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 지금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혹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깨져버린 상태다.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웰빙운동’도 온통 먹는 타령뿐이다.


대상과 합일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기둥이 되어서, 벽이 되어서, 혹은 지붕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산골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돌을 들추면 반드시 개구리가 나왔고 개구리가 튈 방향에 매미채를 대고 있으면 반드시 개구리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발백중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맞히느냐 했더니, 딱 보면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느꼈던 것은 개구리와 일체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물과 일체감을 느끼면 진리가 보이나? 
문학반 연수생에게 소금과 설탕이 되어서 논쟁해보라고 했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소금팀이 설탕팀을 맹공했다. 설탕의 폐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설탕팀이 일거에 제압했다. ‘너희들 개미 모아본 적 있어?’라고 반격하자 소금팀이 허를 찔린 듯 침묵했다.


이곳으로 와서 감성을 회복했나? 
물과 공기가 너무 좋다. 숨을 쉬면 뼛속까지 청량해지고 모든 세포가 투명해진다. 주민이 하는 말이 ‘여기는 일급수는 없고 특급수만 있다’는 것이다. 간섭받지 않아서 좋다. 나무가 돈 달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일의 능률도 높아졌다. 여기 와서 2년여 동안 재출간한 것까지 치면 책을 여덟 권 썼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도 작업실에 앉아서 인터넷만 하지 않나(이외수씨는 디시인사이드의 이외수 갤러리를 통해 네티즌과 만난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시대를 읽지 못하면 의식이 진부해지고 작품의 신선도도 떨어진다. 진짜 위대한 것은 쓰레기통 속에 있다. 그런 곳에서 ‘막장’ ‘찌질이’라며 밑바닥 인생을 자처하는 이들과 만날 수 있다. ‘부채질닷컴’이니 ‘개소문닷컴’이니 하는 온갖 저급한 곳을 돌아다니며 엿보고 다닌다. 삼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서핑하고 채팅한 적도 있다.


네티즌과 세대 차이는 안 느끼나? 
소통의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끼워주면 고마울 뿐이다. 육십이 넘은 영감이 직접 댓글놀이를 한다는 것을 안 믿어서 ‘명품은 아니어도 진품이다’ ‘알바 아니고 직타다’라고 하는데도 여전하다. ‘민증 까라’는 놈에게는 바로 확인 전화를 해주기도 한다. 책을 좀 읽은 놈은 글을 보면 대충 난 줄 아는데…. 하여튼 책을 안 읽으면 뭘 해도 문제다.


신조어도 많이 만들어낸 것으로 아는데. 
‘졸라 무식하고 용감한 삽질’이라는 의미의 ‘졸무용삽’이나 ‘떡밥은 실리적이고 신선한 것으로’라는 의미의 ‘떡실신’이라는 표현을 만들어줬는데, 네티즌이 잘 응용해서 쓰는 것 같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내 중심은 문학이다. ‘이것은 문학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 무엇을 해도 부끄럽지 않다.


네티즌의 비난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가끔 있기도 하다. 그러나 봉이 개천에 내려와 놀 때는 새우의 조롱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겠나.


가장 기억에 남는 비판은? 
극렬 이명박 추종자들이 비열한 인신 공격성 발언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이 인터뷰를 빌려 그들의 근성과 지구력에 찬사를 보낸다. 남의 글을 비판할 때는 글의 요지라도 파악하는 것이 예의인데, 이 시대가 지독한 난독증에 빠진 것 같다. 나는 단순히 이명박 후보가 맞춤법을 틀렸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것을 비판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국민 성공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떠한 성공도 그 성공에 의해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한쪽은 행복해지고 한쪽은 불행해지는 성공이라면 오히려 피해야 한다. 당선자가 ‘내가 있으니 걱정 마시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믿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성공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성공은 무엇일까? 
낭만을 되찾는 것이다. 낭만은 멋이다. 멋은 다양한 아름다움의 요소를 내포한다. 이 시대는 의식이 척박해져 멋을 잃었다. 나는 ‘낭만 관리사’를 자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멋을 되찾기 위해 나를 찾아오는데, 그것을 나누는 데 한번도 인색했던 적이 없다.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가서, 아름다운 시선을 갖는 것이 왜 필요하다고 보는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껴야 사랑하게 된다. 아름다움 잃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잃고 사랑을 잃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잃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키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위치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