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 월간고재열
  • 어른의 허비학교, 재미로재미연구소
독설닷컴 Inernational/독설닷컴 특파원

독일 <경계도시2> 상영회 - 송두율 교수 강의 전문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6. 10.

지난 6월4일 독일에서 <경계도시2> 상영회와 
송두율 교수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전미영 독설닷컴 하이델베르크 특파원이 이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올립니다. 
찬찬히 또박또박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송두율교수 강연 전문


정리 - 전미영/독설닷컴 하이델베르크 특파원 (트위터/@zinlee1)


1972년 독일대학에서 강단에 섰다. 2009년에 은퇴해서 내 이미지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은 대학에서 한국학생들과의 만남이 흔하지 않다. 그러나 내 세미나에 참석했던 학생들 중에는 지금 한국에서 교수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려울 때 제자들도 고생 많이 했다. 오늘은 세대가 바뀌고 내 제자들 밑에서 배운 학생들도 이 자리에 있을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철학이야기이다.학생회에서 세가지 질문을 해왔는데 하나는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 슐레와 나의관계 두번째로는 한국 사회관계를 통한 평가. 세번째, 경계인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다. 오늘 강연은 경계인 개념을 일차로 설명하고 두번째로 내가 경험한 한국사회, 세번째로 독일 지성사회의 흐름속에서 내가 느끼고 고민하는 과제와 나와 하버마스관계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그 후에 외국에서 활동하는 지성들이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보자. 

경계인의 개념은 독일어로 그렌츠 갱어 (Grenze Gänger)라고 한다. 독일에서는많이 쓰는 개념인데 한국에서는 생경하고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남북양쪽에다리를 건 경계인, 기회주의자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내게 분명히 이편인지 저편인지 밝히라고 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당황했다. 유럽에서 경계인이라는 개념은 경제학에서도 쓰고, 독일사는 스위스 사람, 스위스에 사는 독일사람 등등을 지칭 할 때도 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경제, 철학, 사회학등에서도 쓰이고 있다. 또한 철학과 전혀 관계없는 예술 또는 그것과 다른 분야를 함께하는 사람도 경계인이라 부른다. 

예를들면 예술계에서 유명한 아방가르드 음악가존케이지. 그는 여러 경계를 넘어도 다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음악가이면서 철학가고 작곡도 하고 “선”이라는 것을 일본에서도 배웠다. 음악에서는 특이한 “3분 37초”라는 것을 연주 하였는데 그것은 3분 37초 동안 연주를 안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었다. 우리는 “음악”이라하면 항상 하모니라고만 생각하는데그는 그런 음악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편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예술은 여러 경계선을 넘을 수 록 풍부해지는데 우리는 두가지밖에 없다. 양자택일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 사십년동안 가져온 나의 경계 개념은1. 분단된 땅, 남북이라는 경계위에 선 내 모습. 2. 동양에서 온 학자. - 나는 서양철학에 관한 칸트나 니체, 헤겔을 읽어도 이 독일 사람들과는 다른 성장배경 때문인지 갑자기 루씬도 생각이 나고 그런다. 해방하고 싶은 욕구. 어쩔 수 없이 나는 동양과 양의 차이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모든 논문이나 책을 봐도 독일 철학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3. 제 3세계 후진국 학생. - 내가 독일에서 유학 할 대에는 100마르크가 송금 최고 액수였는데 그때엔 100마르크면 살 수 있었다. 담배가 1마르크였으니까. 그때는 한국이 안 알려졌을 때라 하이델베르크 키르쉬하임(Kirchheim)에서 살때 동네 아이들이 나를 구경하려고 기다리곤 했다. 나는 그 당시 제 3세계 고민을 했다. 베트남 전쟁 때 였는데 한국은 그 당시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제3세계 출신의 후진국 학생의 갈등이 있었다. 

첫 번째 ‘경계인’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단어이지만 독일서는 흔한 개념이다. 반대로 여기 독일에서는 생소한데 한국에선 잘 알려져있는 것으로는 “레드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병리학 단어이므로 의학자들만 알고 있다. 이것은우리가 서있는 상황을 잘 설명한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엘르의 “사랑의 연주”가아침마다 연주된 후 뉴스를 봤는데 ‘말말말’ 이라는 코너에서 아나운서가 “경계인”을 말하더라. 그 때 내가 속으로 ‘저 사람이 그 말의 뜻을 알고 하는가?’ 했다. 한국에선 경계인이 무엇인가? 기회주의자. 애매모호한 사람. 

나는 한국 법정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야기를 하면 못 알아들을 것 같아 불교의 함구경 구절을 인용했다. 흰소가 검은소에 묶여 있는데 대게는 검은소가 흰소에 묶여있다고 한다. 사실은그것을 묶은 것은 “끈”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놓친다. “경계” 혹은 “경계선” 이라는 것은 전투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나 “경계” “경계선” 이라는 것은 전투적인 개념 아니라 경계가 생겨 제3자가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공간이 더 커지는 개념이다. 둘 중의 하나 선택해야만 하는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창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독일신문 디 짜잇 (Die Zeit) 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생산적인 제 3자 (Produktive Dritte)” 라고 제목을 붙인것 처럼. 다시말해 비튄니스 (Betweenis). 제3세계 사람이 1세계에 와서 문화를 접할 때자기것이 완전히 없어지는것도 아니고 동화되는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생산체계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의 개념” 이 중요한데 우리사회에서는 이상하게 한국사람 아니면비한국사람 뿐이다. 조상따라 가면 어느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나는 일본태생이어서 어릴 때 자꾸 “일본놈”이라고 놀림당하고 “어머니가 일본여자다.” 라며 부정적으로 말하는것을 많이 들었다. 이걸 새로운 가능성을 배제한 순수성이라고 하하는가. 현재 우리는 “나는 나”가 아닌 것을 전제하지 않고 너무 대립각만 세우고있다.“나는 나. 너는 너. 그리고 나와 너 사이에 또 다른 것” 이걸 가지고 고민한 사람은니체다. 그는 이 수수께끼를 해결할 사람은 “동양의 조용함, 서양의 역동성을 결합할 때 이 철학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하버마스가 쯔비센(zwischen) 개념을 썼는데 그는 주관과객관이 아닌 ‘그 사이’ 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개념을 일본학자들이 받았는데 ‘인간과 인간 사이’ 라는 것을 중요하게 역설했다. 

우리말이 원래 ‘인간(人間), 공간(空間), 시간(時間)’등 그 사이(間)가 중요한 것이다. 그 사이를 강조한다. 우리가 생활이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남인지 북인지 혹은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분명히 해야 빨리 빨리 알아먹는 상황이다. 이것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사상가는 김지하라고 생각한다. 그가 최근 내게 1,000여페이지의 원고를 보내왔는데 거기서 그는 “틈” 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틈’이 없으면 죽는다. ‘틈’이 라는 것이 있을 때 ‘제3의 공간’ ‘생명’을 창조할수 있다. 미시적인 세계에 들어가보면 원인과 결과라는 큰 물리적 세계와는 다른 우연성이중요하다. 예술가들이 철학자들 보다 이런것에 빨리 창안했다는 것이 놀랍다.

 칸딘스키라는 화가가 1927년에 막스프랑크와 가까워서 양자역학세계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는 제목이 ‘운트(Und- 그리고)’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거기서그는 어떤 현상을 빨리 부정 혹은 긍정하는 것이 현대 모순이라 지적하고 앞으로올 세계에서는 ‘Und als Auch(이것 그리고 저것 또한)’ 이 혼동처럼 보이는 것이다음 세계에서는 질서가 될 것이라고 했다. ‘화가들도 이런 말을 하는구나.’ 화가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이런 사고를 제일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김지하다. 최근 그가 보내 준 이 책을 보니 ‘혼돈적 질서 혹은 혼돈’을 통해 질서가 가능하고 역동성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제3”이 있어서 불안한 세력들이 많다. 우리는 ‘웃으면서 중간에서 취하는사람. 불쌍한 사람, 어느편에도 못 끼는 사람’ 같은 이야기를 ‘제3자’라고 많이하는데 오늘 우리 세계에서는 ‘제3세계’ 라는 것이 생산적이고 새로운 전망을 열 수있다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남과 북이 서로를 바꿔 볼 수 있는 공간이 만남으로써 성립될 수 있다. ‘남이 이럴것이다.’ ‘ 북이 이럴것이다’ 해도 만나서 얘기해보면 다르다. 이런것이 나는 ‘제3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자들이 서로 만나면 나는나. 너는 너가 아니라 관점을 서로 바꿔볼 수 있는 사이(間)의 새로운 개념, 삶의 형태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다른 시대를 살았더라도 거의 비슷한 결론에 오기도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야기나 칸딘스키가 말하는 것,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인 프랑스의 수학자 미셀세를이 ‘제3’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을 보면 사고 체계가 동서양이 비슷하다. 개체가 아니라 체계라는 체계이론. 그것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화엄경에도 나오는데 모든 것이 서로를 비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이 공간이라는것이다. 고정된 공간이 아니고, 무엇을 담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공간. “Räumlicher Fluss” 모든 공간이 열리니 “실시간”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화엄경에 보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비춰줄 수 있는 서로의 주체인 제3. 중간. ‘間’을가능하게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칸딘스키가 비판한 속도숭배, 물신숭배의 시대, 모든것을 빨리빨리 결정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칸딘스키라는 화가가 그런 것을 미리 이야기 했다. 또한 석가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석가와 제자가 정원을 산책하는데제자가 불교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석가가 대답을 하지 않고 정원의 대나무를 턱으로 가르켰다. 제자는 그 뜻을 못 알아 듣고 여기 작은 대나무 저기 큰 대나무 이것저것 살펴 보았다. 알고 보니 작은 대나무와 큰 대나무는 땅 밑에서 다연결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도토리나무는 도토리가 떨어지면 다른 개체가 되어 또 나오는데 대나무는 그렇지않다. 다 똑같이 자라고 죽순이 자라는 공간도 일정하게 공간이 있다. 남북도 마찬가지다. 남이 혹은 북이 잘 살 수 도, 못 살 수 도 있지만 남북은 다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가 상처입으면 다른 하나도 마찬가지로 상처를 입는다. 

‘북풍’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남과 북, 서로 대치하며 관계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과 북의 관계에는 삼투압이 있다. 하나가 죽어 썩으면 다 죽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체계가 제3을 이해하고인정하는데 가장 중요하다. 이것과 저것 그리고 그것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찾는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철학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다 보면 일종의 다름 속에서 같음을 확인 할수 있다. 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것이 실제적으로 정책에 반영되면 남과 북이 서로 이해하는 것을 돕고 통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현실은 경계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북도 마찬가지. 경직되고 대립되어 서로 싸우면서 닮는다. 동양과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경계인. 한국에서는 내가 말하는 이것의 이해가 부족하다. 현재 쓰고 있는 독일어 자서전에서 이 개념을 반복할 것이다. 한국이 제3세계인가 2세계인가 아니면 1세계인가. 나는 이런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끊임 없이 고민하고 있고 제3세계의 고민과 가난, 박해, 빈곤에 대해 책을 읽고 쓰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많은 사회학책이 있는데 내가 공부할 때는 제3세계와 관련한 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십대에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내가 말하는 경계인. 그것은 트렌눙(Trennung- 분리)이 아닌 츠비쉔 라움(Zwischen Raum- 사이 공간)이다. 틈이 없으면 죽는다. 뭐든지 틈을 남겨야 한다. 한번은 어떤 학생이 마기스터 논문으로 니체에 대해 쓰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왜 니체에 대해서 써야 하는가?”로 논문을 써보라 하니 못 쓰더라. 아이덴티티는자기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언젠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는데 남쪽에서 열 명, 북에서 열 명, 해외에서 두 명정도가 판문점에서 모여 우리 통일된 한국사회가 추구해야할 것을 한단어로 설명해 보는것이다. 

일본에서는 벌써 시도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출한 개념은 아름다울 미(美)였다. 이것은 강렬함도 있었지만, ‘우리는 잘 사는데 덕이 부족하다’하여 나중엔 덕(德)으로 바뀌었다. ‘남북이 가져야할 최고의 이념은 무엇인가’로 우리도 그런걸 시도해 보자. 언뜻‘높은 문화를 가진 통일된 나라를 가지고 싶다’고 하신 김구선생의 말이 생각이난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분이 그런 개념을 가지고 씨름했하는 것이 놀랍다. 

그가 가지고 싶던 나라가 강대국이 아니고 높은 문화를 가진 나라라니. 나는 그것이 우리가 시도 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것을 통해서 틈을 만들고 ‘기회주의자. 애매모호한 사람’ 으로 해석되는 경계인이 한국사회에서도 자기 아닌것과 스스로 관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옛날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베트남여자와 결혼한 한국남자들 사이에서 제3세계문제가 있지 않나. 나도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독일인 며느리가 있고, 손주에게도 또 다른 아이덴티티가 생길 것이고 그 다음 세대는 또 다를 것이고… 우리는 이미 엄청 많은 경계를 넘고 있다. 거기에 대하 두려워 하지 말자. 

독일에 있는 우리들도 Deutsch-Koreanisch 뿐만 아닌 Deutsch-Japanisch,Deutsch-schwedisch와 같은 다양성 (Mehrmalige Identity) 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생산적인 제3자 (Produktive Dritte) 로서 말이다. Entweder..Oder (이것 아니면 저것) 는 악마의 산물이다. 그것은 파괴 뿐. 생산적이지 않다. 세 번째 내가 60년대에 독일로 유학왔을 때 독일 전국에 한국학생이 250명, 프랑스에100명 정도 있었다. 지금은 왠만한 독일의 도시에 유학생들이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 뒷받침할 수 있으니 나올 수 있다. 내 시절에는 선발된 엘리트들만 유학을올 수 있었다. 나는 독일 오기전에 독일말을 한번도 못 들어봤다. 

내가 유학오던 시절 60년대에는 유신이 있었다. 그리고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지만 계획경제는 아닌- 그러나 비슷한- 개발독재체제가 있었다. 국가가 모든 것을통제하고 원할한 자본유통을 위해 노동운동 탄압하고 통제장치를 만든 결과로70년대에 ‘성장’을 가져왔지만 민주주의에선 오점을 남겼다. 또 그것이 광주로연결이 되어 결국은 광주민주화항쟁을 야기하게 되면서 경제발전과 정치가 동시에 발전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4마리용’이라 해서 한국이 경제발전의 긍정적인 모델이 됐었다. 

최근엔 워싱턴 콘센스에 이은 ‘베이징 콘센스’ 라고 해서 국가가 정치는 억압해도경제는 억압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이루어졌던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볼륨이 작다. 경제 전체적 볼륨도 일본의 8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과는 몇분의 일이 될 지 모르고.. 어쨌든 수출주도형 한국모델이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 

제 발전 모델에는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계시장으로의 철저한 개입, 다른 하나는 세계시장에서의 독립이다. 중국, 알바니아, 쿠바, 북한이 여기에 속한다. 요즘에는 브릭스(BRICs) 라고 하여 자원, 인구가 많은 곳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자본이 없는 한반도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상치된 남북의 모델이 있다. 북은 소위 ‘주체’라는 내부 완결적인 지향이 있다. 그것이 안 되니 지금은 수출도하고 외화벌이도 하여 내부 완결형이 외부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남쪽은 원래 노출이 되어 있는 모델이다. 수출이 안 되면 쓰러지는 모델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가지 글로발리제이션(globalisation)에서 취약성을 드러냈다. IMF, 경제위기. 정말 위기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또 올 것 이다.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빈부격차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전체적인 문제가된다.여기서 문제핵심은 우리에게 중국이 가지고 있는 의미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볼륨과 다이나믹. 나는 중국에 매년 가는데 없던 빌딩이 엄청 들어선다. 차도 많고. 중국이 G2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서 경제적인 모델, 문화적인 모델로 한국이 완충지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있느냐가 중요하다. 문화적인 통합이 제일 늦게 온다. 27개국 유럽연합은 큰 나라인 독일, 프랑스, 영국을 작은 나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견제하는 세력들이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한 힘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는다. 물론 유럽연합에 독일이 큰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3국 밖에 없는 동북아시아는 통합이 힘들다. 일본과 중국관계도 있지만중간에 한반도가 끼어있고, 그 한반도는 분단이 되어 있다. 

중요한것은 ‘분단 된한국이 완충 지대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미국, 일본은 분단된 남북 관리가 편하다. 그러나 한국의 조그만 볼륨이 커져가고, 남과 북이 제3을 만들면 만들수록 통일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연방제든 연합체든 어떤 체제이던지 간에. 그것들은 다 제3이고 제3의 공간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인 것이다. 

최근 그리스 위기에서 유럽연합을 위해 독일이 도와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북아를 살리기위해 일본을 살릴 수 없다. 그럴 체제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개념’이다. 요즘엔 ‘민족은 죽은 개념이다. 허구의 개념이다’ 라고 하는데 서구 역사학자들은 달리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폴란드와 독일의 관계 혹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좋다고 해도 항상경계한다. 

민족국가가 성립된 이후에 통합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통합 후에도 유럽시민으로써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유로화를 보면 앞에는 유럽연합마크가 있고 그 뒤에는 각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이 있다. 이들은 통일이 되어도 자기의 아이덴티티는 가지고 있다. 가치는 같아도그 역할은 각 민족 국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참 힘들다. 한,중,일 정상회담도 하고, 하나의 아이덴티티를추구하며 유럽연합처럼 만든다고도 하는데 큰 그림으로는 그래야 겠지만, 우리가생각할 때 인식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전제로 한다. 여전히 휴전선, 압록강, 두만강 등 공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가 있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통합속에서의 전체개념. 경계개념을 희소하게 한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경계’라는 개념은 희박하지만 체계이론 (System Theorie) 라고 할 수 있다. 경계는 커뮤티케이션을 전제로한 수평선이다. 결국엔 하나로 다 연결된다. 선(Linie) 같지만 선 (Linie)이 아닌. 이런 체계로 끝까지 올라가면 이론적으로 세계사회 경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휴전선만 넘으면 총질하고 가자지구(Gaza) 못지 않은 경계선이 있는데 그걸 소멸할 노력없이 민족 국가가 끝났다느니 하면서 세계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비약이다. 경계 공간을 확충하려는 노력. 관점의 차이를 넘어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것을 구하려는 노력이 공자가 이야기 하는‘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구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 자로서 지적 성장, 지적 편력기 1967년에 하이델베르크에 왔을 때 유학생이 7명 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철학하면 칸트. 헤겔이었다. 독일말은 못해도 책은 열심히 읽었다. 김택일 선생 덕이다.원래는 프랑스를 가고 싶었다. 그 당시 우리는 중국에 들어 갈 수 없었을 때인데프랑스와 중국이 외교를 맺어서 ‘프랑스에서 공부하면 중국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친구인 불란서 학자 분께서 프랑스 비싸니까 가지말라고해서 갑자기 독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철학과 졸업할 때에는 헤겔로논문을 썼지만 중요한책은 안 빌려줬었다. 그래서 일본책들을 읽어보니 재미 있어서 하이델베르크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원래 밑에서 배우고 싶었던 교수가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있었는데 오고 나니 그는 은퇴하고 없었다. 스위스에 있다고 잡무 보는 조교가 말해주었다.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나에게는 하버마스 교수가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하버마스가 누구인지 몰랐다. 오는길에 도서관에서 하버마스의 책들을 읽어보니 ‘아. 철학도 이렇게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가 알았던 사변적 철학이 아닌 개발폭력에 관한 혁명이론. 

그래서 그를 수소문 해서 찾아 갔다. 그 당시 나는 24살 하버마스는 39살 이었다. 그가 하이델베르크에 있다 프랑크푸르트로 옮겼다. 나도 함께 옮겨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67년 펜덴뮐러가 자살했다. 학생들이 교수를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프랑크푸르트에 갔더니 68년 유럽혁명으로 전쟁통이었다. 밖에 나가면 반전구호만 들렸다. 그 당시 학생들은 하루종일 마르크스 이야기만 했다. 독문과에서도 마르크스, 경제학과에서도 마르크스, 철학과에서도 마르크스, 호치민, 혹은 김일성. 그래서 김일성 논제를 나도 몇 가지 접했다. 김일성 가치. 체게바라. 마오 문화혁명 등등을 읽으니 ‘왜 내가 헤겔을 하고 있나’ 싶었다. 내가 누군가 정체성 문제에부딪혔다. 그래서 철학을 때려치고 칼스루헤 공대로 갔지만 주변분이 ‘공학은 너 말고도 할사람 많다. 그러나 철학은 니가 해야한다’라고 설득해서 다시 철학을 계속 하게됐다. 아버님의 설득도 있었다. 그렇게 되어 나는 자연계열에 있으면서 시험은 철학으로 봤다. 그 때 나의 테마는 동양 사상에서의 헤겔, 막스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그 때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동양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가 문제였다. 그런 책만봐도 엄청난 것을 4년만에 독파하여 학위를 끝냈다. 그 후 서울대로 갈까, 하버마스를 따라 갈까, 토론토로 갈까 고민 했다. 그 당시까지는 학위를 마치고 독일에 남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내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알고 싶어 독일에 3년 있을 각오를 했는데 뮌스터에서 오라고해서 가서 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유신이 터져서 잠깐 반유신투쟁을 하게 됐는데 그 당시 제3세계 문제가 내 아이덴티티였다. 그 때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전쟁으로 굶주린 경험이 있는 나. 그때 나는 제1세계와 3세계의 지적인 만남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했고다행히 하버마스와 밤새 책을 읽으면서 하드트레이닝을 했다. 이것은 나의 지적자산이 되어 준 일생의 중요한 기억이다. 

70년대 말 넘어가면서 석유파동이 있었고 독일은 반전투쟁의 인텔리들이 바데르마인호프나 녹생당을 창당했다. 바데르 마인호프의 일부도 녹색당으로 가서 요시카 피셔와 같이 반정부와 평화운동, 혹은 환경운동을 결합시키려고 움직였다. 80년대 중반에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있었다. 사회변혁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당시 지적 분위기는 희망적이기도 있었지만, ‘수술을 했는데 환자가 죽어버린’ 상황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사은 정치와 경제를 동시에 개혁 하지 않고 먼저 경제부터 개혁하였고 여전히 중국 공산당 정권은 정권을 쥐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엘친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러시아의 꿈은 푸틴식의 정치로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되었다. 자고로 재정이 있어야 복지국가를 하는데 독일은 아데나우어때부터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CDU가 들어서도 기본 뿌리가 흔들리는 일은없다. 

물론 독일도 경제위기에서 흔들리는건 사실이지만 ‘반전의 과제, 평화의 과제, 유럽통합’과 관련해서는 나름대로 녹색당의 비전이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사회민주주의 (Sozial Demokratie) 의 명제들을 녹색당이 수렴했고, 녹색당이 제기한 문제들을 사회당이나 사민당, 기민당이 과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역사적인 독일 통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의 전체적인 긴장완화, 유럽의 동서냉전체제가 허물어지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통독이 되고도 한동안 어려움이 있었지만 독일은 세계화 (Globalisierung) 와 거의 비슷하게 유럽통합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유럽안에도 발전 속도차이가 있다. 

예로 발전 속도차에 관련하여 각 나라의 ‘실업자’에 관한 정의도 일치가 되지 않고 있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실업보험을 하려면 실업자 기준을 정해야 하는데 그런 정의도 유럽연합이 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발전 속도가 빨랐는지 동유럽이나 그리스 같이 재정이 안 좋은 나라가 들어오면 충격이 오기도 한다. 허나 요즘엔 미국중심적인 경제권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유럽경제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유럽의 꿈은 통합이다.이런 모델이 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연구거리가 된다. 그리고 요즘한국의 지적사회가 사회변혁을 통해서 많이 변했다. 옛날 우리 때는 오직 마르크스만. 조금 지나서는 마르크스와 막스베버만. 그러다 그 후엔 막스베버만 공부했었다. ‘탈현대’라고 내가 명명한 포스트 모더니즘시대에서 독일은 탈현대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에 가서는 한동안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게 독일로 역수입되어 여기 젊은 학자들이 강의를 한다.

독일도 느끼고 있는 다문화. 다양성의 문제. 포스트모던이 제기한 문제들. ‘건물에 어떻게 다양성을 줄 것인가’ 해서 건축에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나와 슈투트가르트에서 다양한 건물들이 나왔지 않은가. 또한 철학을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나오고, 나는 오히려 동양적인 시작으로 강의도 했는데 지금은 독일 학계에서는 이 포스트 모더니즘 만큼 특별한 테마가 없다. 

그래도 말하자면 환경, 생명과 같은 테마가 있겠고 인터넷에서는 정의성, 도덕성, 윤리성의 문제들이 있겠다. 하버마스와 나와의 차이는 크다. 하버마스가 본에 있을 때 그는 하이데거와 토론을 했을 정도다. 그 분은 경제문제, 전쟁문제 등 그때 그때 시기마다 직접적인 발언을 한다. 물론 내 문제에 관해서도 여러번 발언을 했다. 어쨌건 하버마스 교수는 히틀러 유겐트에서도 있었다. 

나는 또 하나의 진보를 강조한다. ‘진보’는 ‘진보’지만 거꾸로 계몽적인 과제들을파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지 않기 위해 항상 소통 (Kommunikation)이 중요하다. 그것은 모든것의 핵심이다. 진실은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힘에 의해 진실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대화를 통해 발견될 수있다고 한다. 나와 같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온 사람들에게는 애매한것이 있다. 예를들면 중심부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를 받아 들일 수 있지만 나와 같이 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레닌도 그랬다. 레닌이 그 당시 창조적으로 아방가르드 건물 양식을 기획하고 움직이는 철탑도 생각 했지만 농민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나갔다. 그에게는 묘하게선진성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이 있으나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변방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사투리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한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들은 어디든지 있다. 나중엔 중심부에 대한 거부감이 될 수 도 있는데 그것은 자기정당화라고 할 수 도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 하버마스처럼 내가 똑같이 사고한다고 해서 우리문제가 해결되는것도 아니다. 

물론 그는 진지하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제자를 정열적으로 지도하며 나같은 제3세계 학생에게도 신경을 쓴다. 그는 또한 상당히 열린 자세로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것이 지적인 모험이라고 하였다. 작년이 그의 80세 생일이었다. 나는 하버마스를 존경한다.한번은 그가 발표를 하는데 내게 도와달라고 하셔서 도와 드렸더니 한국에 발표된 그의 논문에서 내 이름이 적힌 각주가 지워졌었던 적이 있다. 하버마스 교수가화가 나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해서 했다. 그게 한국의 지적 분위기이다. 불쾌한경험이다. 또 다른 하버마스 교수와의 일화가 있다. 내가 감옥에서 ‘안중근 평화상’을 받았다. 나는 감옥에 있어서 나갈 수 없어 아내가 대신 받았는데 하버마스는 내가 수상하러 감옥 밖으로 나온 줄 알고 얼른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그는한국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면 민족반역자라고 사람들은 비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