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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밑줄 긋는 남자

'월드컵신조어'에 담긴 사회학, "붉은악마에 촛불이 깃들었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7. 4.




국가가 주관하지 않는 국가적 행사


월드컵은 우리 시대 최고의 축제다. 조선시대 산대희(대산대), 고려시대 팔관회를 잇는 국가적 행사다. 비록 국가가 아니라 현대자동차 등 월드컵 스폰서 기업이 주최하지만 전 국민적 축제로 손색이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만개했던 이 축제가 2006년 독일 월드컵의 침체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장을 펼쳤다.


이번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보면 2002 월드컵 열기와 조금 차이 나는 부분이 있다. 월드컵 열기에 2008년 촛불의 문제의식이 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BS가 경기 중계를 독점하는 문제, 스폰서 기업이 거리 응원 때 붉은악마 회원과 비회원을 차별하는 문제, 월드컵 열기에 중요한 사회 현안이 묻히는 문제 따위가 끝없이 환기되는 가운데 열기가 끓어올랐다. 


한국 대표팀이 첫 경기를 가볍게 승리하고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하면서 전반적으로 여유롭게 경기를 관람하게 되자 풍자와 해학이 깃들었다. 이번 월드컵이 지난 월드컵과 뚜렷이 대비되는 현상 중 하나는 ‘말맛’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승패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분산되었다. 때로는 경기에 골을 넣고 수훈을 세운 선수보다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 선수가 더 회자되기도 했다.

   
누리꾼들이 올려놓은 차두리 로봇 설계도. 6월2일 지방선거가 현 정부를 심판하는 결과로 나오고 월드컵 기간에 텔레비전 수신료 인상 등 여론과 동떨어진 일이 벌어지지만 전반적으로 국론 분열 양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는 우리 대표팀의 선전이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후 분열 양상을 보이며 사회불안이 가중된 프랑스나 이탈리아·그리스 등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양박쌍용'으로 시작해 '패널티녀'로 마무리한 신조어


월드컵 대표팀이 남아공에 가지고 간 말은 ‘양박쌍용’이었다. 대표팀 공격의 축인 박지성·박주영, 이청용·기성용 선수 이름을 일컫는 이 말은 경기가 진행되면서 ‘캡틴박(박지성)’으로 특화되기도 하고 선방한 골키퍼 정성용 선수를 더해 ‘삼용’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탈락 위기에 몰렸던 잉글랜드 팀의 웨인 루니가 자국 팬들을 비꼰 뒤 부부젤라 소리만큼 듣기 싫은 선수라는 의미의 ‘루부젤라’로 불린 것과는 대비된다.  


북한팀을 응원하는 시민 조별 리그 뒤 가장 많은 신조어를 탄생시킨 선수는 오범석과 주전 경쟁을 다투었던 차두리 선수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로봇처럼 달린다는 의미에서 ‘차로봇’를 비롯해 ‘차미네이터’ ‘차드로이드’ ‘차이언 맨’ 등 별명이 열 개 이상 등장했다. 아버지인 차범근 전 감독이 원격조종을 하는 아바타라며 ‘차바타’라 부르고 인터넷에 ‘차두리 설계도’가 오르기도 했다. 그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것은 태양열 충전지가 치아에 있어 그런 것이라는 유머도 나왔다. 


그리스와의 첫 경기 승리는 축구 팬들에게 여유를 선사했다. 그리스 팀 주장 카추라니스 선수가 자신의 스파이크에 팬 잔디를 다시 원상 회복시키는 장면을 보고 ‘잔디남’이라며 이번 월드컵 최고의 친환경 선수라고 칭찬했다. ‘잔디의 신 카추라니스’를 패러디한 합성사진 수십 장이 인터넷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대패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도 풍성한 신조어를 남겼다. 경기 전 ‘마라도나 한국 팀에 말려드나, 선수들도 말 안 듣나, 그래서 한국전 승부 말아드나’ 등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이 벌어졌다. 경기를 보고는 머리를 기른 모습이 가수 나훈아씨와 비슷하다면서 ‘마라훈아’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곤살로 이과인에 대해서는 그가 이과인(理科人)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과를 박대하는 한국은 질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월드컵 마케팅엔 '야유', 응원 열정엔 '환호'


나이지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그리스전 선취골에 이어 동점골을 넣은 ‘골정수(이정수)’ 선수에게 관심이 모아졌다. 기성룡 선수가 프리킥으로 찬 공을 헤딩하려다 그의 발에 맞아 들어가자 ‘헤발슛’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마치 골키퍼에게 ‘죄송합니다. 한 골 넣겠습니다’라고 말하듯 고개를 숙이고 골을 넣었다고 해서 ‘동방예의지국슛’이라 불리기도 한다.    


세 차례 조별 리그 경기를 응원하는 동안 지난 두 번의 월드컵에서 그랬듯 여지없이 ‘월드컵녀’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1대 월드컵녀 ‘미나’와 2대 월드컵녀 ‘앨프녀’가 모두 연예기획사가 일부러 노출한 여성이었지만 이번에는 월드컵녀 월계관이 ‘페널티녀’라는, 한국 팀이 나이지리아에 패널티킥을 허용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 평범한 여성에게 돌아갔다. 누리꾼들은 인공 진주 속에서 건진 자연산 진주와 같은 풋풋한 모습을 보여준 그녀를 칭찬한 반면 지나친 노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똥습녀’ 등 월드컵을 마케팅 공간으로 활용하려 한 여성은 비난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최초로 동반 본선에 진출한 북한 대표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다. 브라질전에서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정대세 선수의 모습이 방영되면서 천안함 사태 이후 촉발된 북한에 대한 적개심도 녹아 내렸다. 또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인 정 선수가 북한 대표팀으로 뛰게 된 사연이 전해지면서 일본 내 재일동포 2세인 ‘자이니치’ 문제도 환기되었다. 


세계 최강 브라질 팀을 맞아 브라질 선수들이 수비수를 제치고 제쳐도 계속 막아 ‘양파수비’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선전하자 우리 국민들도 박수를 보냈다. 북한 선수들에 대한 신조어도 많이 만들어졌다. 일부 축구 팬만 알았던 정대세 선수의 별명 ‘인민루니’가 두루 알려졌고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는 지윤남 선수에게는 ‘로동메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북한은 가슴으로 응원, 일본은 머리로만 응원


이처럼 북한 팀에 대한 정서가 뜨거웠다면 일본 팀에 대한 정서는 차가웠다. 대체적 정서는 ‘일본 팀은 머리로는 응원하려고 하는데 가슴으로는 응원이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선전할 경우 아시아 축구의 위상이 높아지고 아시아 지역 티켓도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응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응원하려고 해도 막상 경기를 보면 상대 팀을 응원하게 되고, 응원을 해도 비기는 것까지만 바라게 되고, 그것도 우리 팀이 이겼을 때만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이 일반적 반응이었다. 트위터 여론조사 결과 북한 팀이나 일본 팀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에 75%(300명 중 225명) 정도가 ‘북한만 응원한다’고 답했다.  


전체적으로 이번 월드컵은 우리 국민이 감성적인 응원과 함께 이성적인 응원도 하기 위해 노력한 월드컵으로 기억될 것이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다음 날 트위터에는 ‘수신료 인상, 야간집회 불허 등 월드컵 열기에 묻혀 간과될 사회 이슈를 챙겨야 한다’며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어 ‘시사 16강’이 펼쳐지기도 했다. 대기업의 마케팅과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언론 보도 사이에서도 국민의 이성은 마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