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밤이 지나고 다시 날이 밝았다.
머리가 개운치 않다.
그것이 <PD수첩>팀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난 숙취 때문인지
이제 본격적으로 정권의 방송장악 전선에 서게 된
MBC의 현실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어젯밤에 MBC에서 생긴 일을 복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오후 5시에 시작된
<MBC, MB氏를 부탁해> 출판기념회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필름포럼 시사회장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PD수첩> 김보슬PD가 보이지 않았다.
김PD는 전날 전화통화해서 “아마 김현철PD 손에 끌려갈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다.
노조 홍보국장을 맡고 있는 김현철PD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다른 노조원들과 함께 농성중이라고 했다.
경영진이 <PD수첩> 사과방송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박성제 노조위원장이 급히 인사말만 하고 돌아갔다.
양문석 언론연대 사무총장도 인사말만 하고 따라갔다.
‘문화관찰자’ 김완씨는 MBC 노조에 갖다 주겠다고 주먹밥을 챙겼다.
<MBC MB氏를 부탁해>는
‘위기의 MBC를 구하자’는 취지에서 ‘집단지성’을 모은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 출판기념회에 MBC 사람이 없으니
역시 ‘앙꼬 없는 찐빵’ 분위기였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겨레21 최성진 기자와 둘이 궁시렁거렸다.
“출판기념회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냐...”
애를 데리러 처가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김보슬PD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늦더라도 가보겠다고 약속했다.
애를 집에 데려다놓고 뉴스를 틀었다.
사실 좀 쉬고 싶었다. 과도한 블로그질로 몸이 완전히 방전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뉴스에서 “MBC에서 <PD수첩>에 대해서 사과방송을 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춘근PD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조정실 앞에서 사과방송 테이프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다.
이미 사측에서 테이프를 들고 내려왔었다고 했다.
주저할 수가 없었다. 급히 짐을 꾸려 MBC로 향했다.
MBC에 도착하니 머리띠를 질끈 (나비모양으로) 묶은 이춘근PD가 마중나왔다.
프레시안 채은하 기자도 보였다.
오늘 친구들과 맘먹고 놀아보려고 모였다가, 급히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좀 덜 억울했다)
강지웅PD 김종우PD 이중각PD 등이 다른 노조원들과 함께
주조종실 앞에서 사과방송 테이프를 막고 있었다.
강지웅PD로부터 노조원들의 병력배치 상황에 대해서 들었다.
5층 뉴스 주조종실은 기자 등 노조원 50여명이 막고 있고
3층 주조종실은 PD 등 노조원 50여명이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편성국장과 편성부장이 사과방송 테이프를 들고 내려왔다.
PD들은 편성국장과 편성부장을 막아섰다.
잠시 긴장이 흘렀다.
“들어가게 해주라. 테이프만 주고 갈게”
“안 되는 것 아시잖아요. 저희한테 테이프 주고 가세요”
적막과 적막 사이에 이런 말들이 오고 갔다.
편성국장과 편성부장은 주조정실에 들어가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둘만 내려온 것으로도 이는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그것이 노조원들을 기만하기 위한 ‘할리우드 액션’이었음이 밝혀졌다)
5분 정도 대치하다 둘은 총총히 사라졌다.
잠시 후 <MBC 뉴스>에서
엄기영 사장이 직접 출연해 시청자에게 사과하는 뉴스 꼭지가 방영되었다.
PD들이 탄식했다.
“뭐야 사과를 두 번 하겠다는거야? 무릎을 꿇다 못해 아예 엎어지는구만”
남부지법과 방송통신위원회가 명한 정식 사과방송 대신에
사장이 사과하는 것으로 끝을 내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아니었다.
조금 후에 주조정실 모니터로 정식 사과방송 화면이 나왔다.
비상이었다.
사과방송 테이프가 어디서 플레이되고 있는지 PD들이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주조정실 부조종실 여기저기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분노와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 얽힌 복잡한 표정이 읽혔다.
이춘근PD에게 “좀 잔인한 질문이지만, 지금 심정이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10년 가까이 PD 생활을 하며
그는 나름대로 MBC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MBC를 믿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사과방송 고지가 다 끝날 때까지
그와 다른 PD들은 화면이 어디서 와서 송출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노조에서 1층 로비에서 조합원 총회가 있다는 공지를 했다. 3층과 5층에 흩어져있던 조합원들이 로비에 모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박찬정 기자 양효경 기자 이정은 기자...
박찬정 기자가 와서 말했다. “이렇게 보게 되네요...”
이정은 기자가 와서 말했다. “1년 전에는 제가 취재하러 갔었는데...”
노조 사무국장이 사과방송 테이프가 방송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MBC 경영센터 내에 있는 MBC 플러스 회선을 타고 방송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조에서 준비한 여러 경우의 수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허를 찔린 것이었다.
박성제 위원장의 발언이 끝나고 김보슬PD가 나와서 자유발언을 했다.
로비에 내려왔을 때 김PD가 인사도 받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 보였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서 간 것 같았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김PD는 ‘<PD수첩>팀을 믿어줘서 고맙다. 우리는 옳은 일을 했다. 끝까지 함께 해달라’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방송을 마친 손정은 앵커도 합류했다.
손 앵커는 두 번 합류했다.
뉴스를 마친 복장 그대로 한 번 합류했고,
옷을 갈아입고 와서 다시 합류했다.
(노조원들과 함께 앉아 총회에 참여했다)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그때 갑자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전경버스가 MBC 구내로 진입한 것이었다.
노조원 몇몇이 뛰어나가 막았다.
(‘이제는 경찰이 방송사를 자기네 안방으로 아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경버스가 현관 지붕을 박은 것이었다.
시비가 벌어졌다.
노조원들은 ‘누구 요청을 받고 들어왔느냐’고 책임자에게 따져 물었고
‘누가 시설물 보호 요청을 했느냐’며 회사 책임자에게 추궁했다.
둘 다 오리발을 내밀었다.
전경버스는 슬슬 꽁무니를 빼고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전경차에 시민들이 야유를 보냈다.
KBS앞 촛불문화제를 마친 시민들과 취재진이 보였다.
회사 안전관리요원들은 시민들과 취재진이 MBC 구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한 시민이 따졌다. “왜 경찰은 들어가고 시민은 못들어갑니까?”
진보신당 칼라TV 블로거 박형준씨 등이 그들에게 막혀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김철영PD가 칼라TV가 온 것을 확인하고는 박성제 위원장을 불러와 인터뷰를 주선해 주었다.
안으로 들어오니 노조 긴급 총회는 끝이 났다.
노조원들이 늦은 퇴근을 하고 있었다.
<PD수첩> 팀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10층에서 시사교양국 PD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30여명의 PD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주로 <PD수첩>팀 PD들과 고참 PD들이 발언을 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투쟁을 전개해 나갈지와
엄기영 사장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것이 이슈였다.
난상토론이 진행되었지만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다음날 4시에 PD 총회를 갖기로 하고 산회되었다.
PD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국장-CP 술자리와 <PD수첩>팀 술자리로 나뉘어 흩어졌다.
나는 <PD수첩>팀 술자리에 따라갔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어깨가 처진 한 중년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퀴즈영웅 될 때 봤습니다. 나도 울었습니다"
<PD수첩> 조능희 CP였다.
경영진은 사과방송을 내보내는 것과 함께 조CP의 보직해임도 결정했다.
1시쯤 국장-CP 술자리에 있던 몇몇 CP들이 왔다.
경영진의 진행자 교체로 <PD수첩>을 떠나게 된 송일준 부국장도 왔고
8시간 전에 헤어졌던 양문석 사무총장도 (고주망태가 되어) 함께 왔다.
(술자리 대화는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따라간 것이기 때문에 전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술 몇 잔 마시고 혼자 구석에서 졸아서 제대로 들은 것이 없다.)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말한 부분은 '온더레코드'해도 괜찮을테니까)
"내가 죄를 지은 것 같다.
멀쩡한 기자와 PD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난 파업 해봤으니까 이런 말할 자격있다' 이런 태도로
'당신들도 열심히 싸우라' 고 부추긴 것 같다.
이런다고 답이 있을까? 정권은 4년반이나 남았는데...
앞으로는 기사 이렇게 써야할 것 같다.
YTN 노조 이만하면 잘한거다.
KBS 사원행동, 분하지만 참자.
MBC <PD수첩> 쪽 좀 팔고 살아남자...."
세 시쯤 술자리가 끝났다.
대부분의 PD들은 사장 출근 시간에 맞춰 진행될 피켓시위를 위해 집에 갔고
3~4명의 PD들만이 더 마시기 위해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그랜드 슬램’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YTN 낙하산 사장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
KBS 정연주 사장 해임을 위한 이사회
MBC의 굴욕적인 사과방송까지...
세 군데를 다 보니 절망감도 세 배가 되는 것 같다.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MBC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MBC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기영을 몰아내야 하나? 그럼 그 다음은? 엄기영보다 못한 사람이 올텐데...
쉽게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주에는 정치 특집기사도 써야 하는데...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리더기가 먹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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