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엿보기(업계에서는 ‘컨닝’이라고 한다)’를 한번이라도 해보신 분들은 로댕이 오뎅이 되고, 오뎅이 다시 덴뿌라가 되는 슬픈 전설을 들어보았으리라. 촛불집회 때도 이런 자기 변이 과정을 거친 구호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였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패러디한 ‘김밥천국 명박지옥’이라는 구호가 광장을 평정했다. 시민들은 무료로 나눠주는 김밥을 나눠먹으며 이 세기의 구호를 연창했다. 그러나 촛불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자 이 구호는 금세 비굴해져, ‘명박천국 서민지옥’으로 바뀌었다.
여기까지는 오뎅에 대한 것이고, 이제 마지막 덴뿌라 얘기다. 지난주와 이번주, 연 이어 참사를 당했다. ‘디지털 디재스터’였다.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전부 지워졌고 최근 한 달간 찍은 사진이 담긴 디지털 카메라를 분실했다(혹시 ‘삼재’가 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컴퓨터가 멈출 때마다 움찔움찔 했다).
임기응변이 뛰어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는 좋은 버릇이 있는 나는 백업도 해두지 않았다. 패닉상태에서 머릿속에 스스로 맴도는 구호가 하나 있었다. ‘백업천국 분실지옥, 백업하고 천당 갑시다.’
다음 블로거뉴스에서 ‘베스트 블로거’로 선정되어 받은 사이버머니로 산 디지털 카메라도 아까웠지만 그 속에 담긴 사진이 훨씬 더 아까웠다. 특히 정부의 ‘언론 장악 그랜드 슬램’ 장면을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나름 특종도 있었는데...
‘언론 장악 그랜드 슬램’은 정부가 YTN에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고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시키고 MBC에서 <PD수첩> ‘광우병편’에 대해서 사과방송을 틀게 한 것을 일컫는다. 지난 한 달 동안 정부는 이 세 가지 대업을 모두 완성했고, 나는 이 장면을 촬영했다
이 글을 읽으신 분 중에 혹시 제가 잃어버린 디지털 카메라(소니W300)을 습득하신 분이 있으시면 꼭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카메라가 아니면 메모리카드라도...우리 언론 자유를 기키기 위해서...꼭...부탁드립니다.
(이 녀석을 잃어버린 날은 8월19일 수요일입니다. 잃어버린 곳은 아마 경희대 청운관 7층이나 종로 주점 육미나 청진동 해장국집 맞은편 지하의 둘둘치킨, 혹은 저녁 7시 쯤 경희대에서 종로방향으로 탔던 택시나 그 반대 방향으로 11시쯤 탔던 택시, 혹은 새벽 2시쯤 경희대에서 광장동으로 탔던 택시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술이 왠수입니다. 흑흑...)
작년 ‘시사저널 사태’를 겪으며 6개월간 파업했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문제의 방송사 기자들에게 쉽게 ‘빙의’가 되었다. ‘24시간 뉴스채널’이 ‘24시간 편파방송’이 되지 않을까, ‘국민의 방송’이 ‘권력의 방송’이 되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정직한 보고자’가 ‘우리 시대의 비겁한 방관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분실한 카메라에는 이 세 방송사에서 벌어진 지난 한 달간의 일들을 담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MBC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아까웠다.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PD수첩> PD들이 경영진이 몰래 끼워 넣은 사과방송을 막기 위해 분노와 충격과 당황스러움을 안고 주조정실과 부조정실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은 나밖에 못 찍었는데...
다시 기자들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그때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다’라는 경영진의 말에 발끈했다. 특별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것도 아이었고 두드러지게 운동권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들은 자존심의 상처를 입자 ‘무대포’로 달려들었다. 오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기자들은 대책 없이 파업을 했고, 대책 없이 사표를 냈고, 대책 없이 창간을 했다.
비슷한 장면을 세 방송사에서도 목도했다. “공영방송은 정권의 철학을 구현해야 한다”라는 말에 KBS 기자들도 발끈했다. 고참 기자와 PD가 KBS 사내게시판을 통해 격문을 올렸고 입사 4년차인 31기 기자와 올해 갓 입사한 34기 등 기수별 성명서가 잇따랐다. 심지어 베이징 올림픽 현장 중계팀도 성명을 발표했다.
똑같은 현상이 YTN에서도 나타났다. 낙하산 사장이 ‘잠입 출근’을 하자 YTN은 노조위원장을 새로 선출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MBC도 마찬가지다. 경영진이 사과방송을 내보내려 할 때 50여명의 기자들이 뉴스센터 입구를 막아섰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사실 대부분이 모르는) 전쟁이 이들 방송사에서 벌어졌는데, 그 참혹한 현장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YTN과 KBS와 MBC 기자들에게(그리고 PD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돌아간다. 감사원의 KBS 부실 감사에 대해서 감사하라, 검찰의 <PD수첩> 편파 수사에 대해서 수사하라, 건국절에 밀린 광복절을 다시 광복시켜야 한다, 여기저기서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베이징에서 익어가는 금메달에 모두 묻힌다.
주)
다음 주엔 휴가입니다. 며칠 동안은 정부의 언론장악 문제에 대한 글을 포스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할만큼 했다’고 생각해서 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너무 방전된 느낌이라 충전을 위해서 쉬려고 합니다. 이후에 새로 선발한 인턴과 함께 더욱 열심히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밀린 글들을 내일까지 집중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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