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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조중동의 소셜테이너 공격, 이래서 문제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1. 6. 23.


예전에는 조중동에 기사가 나와야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김여진 김제동이 트위터에 쓰면 이슈가 된다. 
사회참여 연예인 - 소셜테이너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견제도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주> PD저널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요즘 ‘소셜테이너’가 이슈다. 소셜테이너(소셜+엔터테이너)라는 말은 이명박 정권이 방송 장악에 나서면서 윤도현, 김제동, 김미화 등 사회참여 연예인을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킬 때 이들과 ‘폴리테이너(폴리틱스+엔터테이너)’, 즉 정치참여 연예인과 구분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만들어낸 말이다. 연예인들이 특정 정치인 지지활동을 해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행위와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물론 연예인의 정치 참여 활동 역시 보장되어야 할 권리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연예인이 정치참여 활동을 했을 경우 지지한 정치인이 승리하면 연예 활동에 탄력을 받거나 공직에 진출하지만 패배하면 연예 활동에도 제약을 받아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도 그를 지지했던 탤런트 유인촌씨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되었고 탤런트 이덕화씨는 아들이 청와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한 연예인이 덕을 보기는 했지만 정동영 후보나 문국현 후보를 지지했던 연예인이(몇 명 있지도 않지만)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윤도현, 김제동, 김미화 등의 연예인이 유탄을 맞았다. 정부 비판적인 활동을 하거나 정부가 부담을 느낄 활동을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어이없는 일이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논리로 진행되었다.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예인의 정치참여든 사회참여든 모두 가능해야 한다. 연예인도 양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폴리테이너’와 ‘소셜테이너’를 굳이 구분한 이유는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권력자를 지지하는 정치참여 행위가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수 있지만(물론 문성근 명계남은 무관의 제왕으로 남았지만) 사회참여 행위는 약자와 연대하는 ‘희생’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이 소셜테이너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시대에 와서 한 단계 진화한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한다는 의미가 더해진다. 소셜테이너들은 주류미디어가 아닌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용자들과의 교감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들과 뜻을 함께 하는 신종 팬덤인 ‘소셜디자인그룹’이 생기면서 영향력이 더 커졌다. 김여진씨의 ‘날라리 외부세력’과 박혜경씨의 ‘레몬트리 공작단’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소셜테이너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6월14일자 조선일보에 ‘아슬아슬한 소셜테이너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김제동, 김여진, 박혜경 등 소셜테이너, 즉 사회참여 연예인들의 활동에 대한 글인데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정파적인 문제보다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이슈 선택과 언행에서 절제력을 보이면 “진짜 개념있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말은 좋다.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이슈를 선택해 언행에서 절제력을 보여라’라는 충고가 제법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 바꿔보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나마나한 방식으로 하라’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이슈에 대해서 절제력을 보이는 기사만 쓰는가? 언론의 생명은 공론장 기능이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의 이야기가 나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역할을 바로 소셜테이너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소셜테이너에 대한 충고는 일종의 경고로 읽힌다.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당신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직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는 않았으니 그냥 이 정도 경고해둔다’ 정도로 읽힌다. 조중동이 만들어낸 이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재야에서 이슈의 패자부활전을 도모하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태에 ‘보편적인 공감대와 언행의 절제력’이 없다고 탓하기 전에 보수언론은 자신들의 모습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조중동이 제주도 강정마을의 목소리에 주목했나?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나? 대학생 반값등록금 촛불집회에 신경을 썼나?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해고에 할 말을 했나? 보수언론이 언론의 의무를 방기한 그 지점에서 소셜테이너의 꽃이 핀 것이다. 


소셜테이너들의 어깨는 무겁다. 한 명의 억울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주면 억울한 사람 수십 명이 찾아온다. 한 번 친절을 베풀면 벌써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손을 내민다. 그래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나대고 티낸다는 비난이 들려온다. 그런 그들을 최소한 언론이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먼저 언론이 책임을 다했는지 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