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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깊숙히 들여다보기

의학드라마 '골든타임'에 대한 실제 의사들 반응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9. 13.


건물에서 떨어진 응급환자를 데리고 119 구급대가 병원에 들어선다. 응급실 당직의사가 이들을 막아선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드잡이 끝에 겨우 응급실에 들어선다. 다음은 수술실이다.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실이 없다. 결국 수술실이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한다. 겨우 살았다. 교통사고로 온 여성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번에도 수술을 받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데, 도중에 사망한다. 


드라마 <골든타임>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출혈환자나 혈액응고장애 환자에게 쓴 약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직원이 와서 호통을 친다. 보험 인정을 안 해주기 때문에 나중에 삭감이 되어 병원 적자를 늘리는 원흉이다. 의사는 “환자가 나빠지고 난 다음에 약을 쓸 수밖에 없다”라고 한탄한다. 


응급의학과를 배경으로 한 <골든타임>은 미국 드라마 <ER>(Emergency Room, 응급실)과 비교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드라마다. 왜? 응급환자에 대한 프로토콜 상의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장비 인력 시스템이 있는 다 있는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드라마가 <ER>이라면 그런 장비 인력 시스템이 없는 나라의 현실을 고발하는 드라마가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골든타임’은 중증외상 환자의 생사를 결정짓는 최소시간인 한 시간을 뜻한다. 


2010년 의학드라마 <산부인과>의 대본을 쓴 최희라 작가가 쓴 <골든타임>은 우리 의료 현실에 ‘돌직구’를 던지는 사회성 짙은 의학드라마다. <하얀거탑>과 <브레인>의 성공 요소인 병원 내 갈등과 불우한 천재의 좌충우돌을 활용하되 여기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남녀 주인공들의 애정 갈등을 중심축으로 삼지도 않는다. 응급 의학 체계, 특히 ‘중증 외상센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살 수도 있는 환자를 죽게 만드는 우리 의료 현실을 고발한다. 그러면서도 15%대의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골든타임>은 우리나라 의학드라마의 진화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 ‘여기’ ‘우리’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최 작가는 “2012년 대한민국의 의료현실을 바탕에 깔고 직업인으로서 의사가 할 법한 현실적인 고민들을 담았다. 살릴 수도 있는 목숨을 놓치는데, 그것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방치하는 것에 대해 환기하고 싶었다.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도 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적중했다. 법조 현실을 고발한 <추적자>처럼 사회성 짙은 드라마가 흥행했듯, <골든타임>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이국종 교수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진 <골든타임>에 대해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문과)는 “병원 내의 권력투쟁보다 중증외상의 응급의료 상황을 통해 공공의료 문제에 집중하는 <골든타임>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의학드라마이다. 복지를 강조하면서 영리 목적의 민영의료보험 도입을 서두르는 이율배반의 21세기 한국의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국종 교수는 ‘중증 외상센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드라마가 다시 한 번 이를 환기하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인 인제대학교 해운대백병원은 중증 외상센터를 육성하고 있는 곳이다. 응급헬기 착륙장이 있고 24시간 응급수술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골든타임>이 주목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판단이다.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병원 현실과 환자의 생명 사이의 판단, 위험하지만 효과가 큰 수술과 안전하지만 효과가 작은 수술 사이의 판단, 병원 시스템을 따를 것인가 환자를 구하기 위해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에 대한 판단, 최선과 차선을 고르는 것이 아닌 최악과 차악 사이의 판단을 하고 이를 감당하며 고뇌하는 의사 최인혁(이성민 분)을 보여준다. 


판단의 갈림길에서 최인혁이 남긴 대사들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시 개복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직 살아있지 못할 겁니다. 오늘 살아 있어야 내일도 있습니다.” “환자 아직 살아있어. 그걸로 된 거야” “지금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중에 선택해야하는 상황이다. 의사에겐 가장 괴로운 일이지” 


의사들의 고뇌를 잘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골든타임>은 의사들이 가장 즐겨 보는 의학드라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의사들의 트위터 타임라인이 뜨겁다. ‘심전도 단자 달 때 순서가 틀렸다.’ ‘(CT 보고) 골반이 부셔졌다고 하는데 내가 보니 정상이다’라면서 ‘지적질’을 하면서 보기도 하고 해파리에 쏘인 피서객들을 식초를 발라 치료하는 장면을 보면서 효과가 있네 없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작가가 대본을 쓸 때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다.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것과 의사들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개연성을 갖추는 것이었다. 최 작가는 “극중 배역들이 흘려보내듯 말하는 사소한 대사에도 의료 현실을 담았다. 사실적 묘사를 위해 그 분야 전문의가 보고 ‘말도 안돼’라고 말하면 다 뜯어 고쳤다. 해파리를 식초로 닦아내는 장면에 논쟁이 있지만 응급의학 교재에 나오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의사들은 <골든타임>을 어떻게 평가할까? 트위터를 통해 반응을 모아보았는데 대체로 후한 편이었다. “현실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나름 노력을 많이 한 모습이다. 아쉬움 속에 떠나보낸 환자들이 생각난다”(@mdearnest 공중보건의) “일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심평원의 보험 삭감 때문에 기구나 혈액을 제대로 못 쓰는 건 실제 일이라 호응도 있는 것 같다”(@ywmed98 심장내과 의사) “초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리얼했다. 수술실에서 등장하는 장비와 이를 사용하는 모습이 기존 의학드라마와 달리 다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seehag 마취과 의사)


특히 다른 의학드라마와 비교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의사들의 마음을 잘 담아낸다는 것이다. “오늘 골든타임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최인혁이 방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샷이었다. ‘골든타임’에서 마음에 드는 건 다른 의학드라마에서는 전공의가 병원 밖 온 곳을 싸돌아 다녀서 참 현실감 떨어진다 싶었는데 여기서는 필요한 장소만 나온다는 점이다”(‏@poogwang 외과 의사) 


의사들은 <골든타임>에서 묘사하는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총상 관리는 우리나라에서 관리가 될까? 칼 맞은 환자는 봤어도 총 맞은 환자는 한 번도 못 봤는데”(@Dr_pearldrip 가정의학과 의사) “문제는 학벌은 최고지만 무조건 환자 잘 보는 의사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환자 잘보고 진단과 치료 잘하는데 학벌 때문에 밀리는 이들 꽤 봤다.”(@peddoc99 소아과 의사) 


일반 시청자들과의 토론도 벌어졌다. 드라마를 보고 의사 일반을 비난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응즙 진료와 주간의 진료와 차이는 뭘까? 응급의 개념은 환자의 상태를 분류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래서 응급실 진료는 도착순서가 아닌 중증도순이다. 그리고 인턴 역시 엄연한 대한민국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면허받은 의사다. 자격증이 아닌 면허를 갖고있 는 의사라는 것이다.”(@JJinnie) 


방송이 끝나고 나면 의료 현실에 대한 토론이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2009년 한 해 동안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에 의해 심정지로 판명된 환자는 24,442명이었고, 이 중 15,268명 (64%)는 가정집이나 아파트에서 발생했다. 심폐소생술을 누구나 익혀야 하는 이유다.”(@DrArrhythmia 심장내과 의사) “공공의료 확충이란 건 참 좋은 말이긴 하나 지금도 전공의에게 지급하는 보조금도 돈 없다고 줄이고 공공병원을 수익성으로 평가하는 판국에 확충이라.”(@doojk 비뇨기과 의사)


드라마로 보는 ‘하얀정글(현직의사가 우리나라 의료현실을 고발한 다큐멘터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골든타임>이 우리 의료 현실의 왜곡을 얼마나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한 의사가 남긴 울분에 찬 트윗을 소개한다. “거지같은 제도가 아니라면 이국종 교수와 같은 외과의사가 천 명 이상 있어서 수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을텐데 아쉽다. 나라가 국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게 한다.”(@mdearnest 공중보건의)







<종합병원>에서 <골든타임>까지, 한국 의학드라마의 진화 


우리나라 의학드라마의 계보는 1994년 <종합병원>(MBC)으로부터 시작된다. <종합병원>은 일반외과를 중심으로 응급의학과 내과 등 종합병원 내 엄격한 서열구조 아래서 고생하는 전공의들의 모습과 의사로서 한계를 느끼며 고뇌하는 모습, 여기에 청춘남녀의 사랑까지 버무린 ‘종합드라마’였다. 무려 2년여 동안 방송된 이 드라마를 통해 신은경 김지수 전도연 이재룡 전광렬 등이 스타덤에 올랐다. 


의학드라마는 1997년 <의가형제>(MBC)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장동건 손창민 이영애 등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에서 비롯된 형제간의 갈등을 다룬 이 드라마를 계기로 의학드라마는 트랜디드라마의 외피를 입기 시작한다. 1998년 <해바라기>(MBC)에서는 연애관계가 더욱 복잡해진다. 2000년, MBC가 주로 만들던 의학드라마 시장에 SBS도 뛰어들어 <메디컬센터>를 제작한다. 


2000년대 초반은 한의학 드라마가 대세였다. <허준>(MBC 1999~2000) <태양인 이제마>(KBS 2002) <대장금>(MBC 2003)이 연이어 제작되어 한류 콘텐츠의 한 조류를 형성하고 한의학과의 수능 합격점수를 높였다. 한 동안 뜸하던 의학드라마는 2007년 다시 꽃을 피워 <외과의사 봉달희>(SBS) <하얀 거탑>(MBC) <뉴하트>(MBC) 세 편이나 제작된다. 이후 <종합병원 2>(MBC 2008) <산부인과>(SBS 2010) <브레인>(KBS 2011)이 제작되었다. 


한국드라마에서 의사가 ‘재벌2세’와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직업으로 꼽힐 정도로 의학드라마가 많이 제작되었지만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미국드라마를 보면 경찰드라마는 형사가 도둑을 잡고 의학드라마는 의사가 병을 고친다. 일본드라마를 보면 경찰드라마는 형사가 교훈을 주고 의학드라마는 의사가 교훈을 준다. 한국드라마를 보면 경찰드라마는 형사가 연애를 하고 의학드라마는 의사가 연애를 한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변곡점이 된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를 번안한 <하얀거탑>과 <브레인>이었다. 병원 내 파워게임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불우한 천재’의 모습을 그린 두 드라마는 주연배우 김명민과 신하균의 열연에 힘입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애정 갈등을 지양하고 병원 내 갈등에 초점을 맞춘 두 드라마는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수술 장면으로 ‘한국형 의학드라마’의 전범을 만들었다. 


최근 의학드라마는 소재가 다양해지고 있다. 보통 의학드라마는 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뇌신경외과 등 외과 중심인데 반해 <산부인과>는 산부인과에서 벌어지는 산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근 종영한 <닥터 진>(MBC)과 최근 시작한 <신의>(SBS)는 현대의 의사가 조선시대(<닥터 진>)와 고려시대(<신의>)로 타임슬립(시간이동)을 통해 이동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그린 퓨전 사극이다. <골든타임> 후속 드라마인 <마의>(MBC)는 어의가 된 조선시대 수의사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