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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독설

일본 ‘재특회’를 보면 ‘일베’가 보인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3. 5. 27.


(시사IN 298호 커버스토리 '일베 사용설명서'에서 일본 '재특회'와 한국 '일베 현상'을 비교했습니다. 기사 양이 넘쳐서 잘라낸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잘라낸 부분을 얼기설기 이어서 만든 글이라, 섞어찌개 같은 글인데... 자세한 내용은 시사IN을 읽어 보시고 이 내용을 참고 자료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의 르포르타주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일베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사회적 잉여가 된 청년들이 어떻게 ‘넷우익’이 되고 국수주의자가 되는지를 당사자 인터뷰와 현장 취재를 통해 꼼꼼하게 분석했다. 이 책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를 분석하면 우리의 ‘일베 현상’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앞으로 ‘일베충’이 어떤 행동을 할지, 그들의 미래까지 읽힌다.   


기존 우익 단체들과 달리 인터넷을 기반으로 모이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한다는 것, 본명이 아니라 아이디나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다는 것 등은 기본으로 닮았다. 야스다 씨는 일본 재특회의 특징을 “언제나 집단으로 행동하고,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며, 동영상이나 사진 촬영을 과도하게 고집하는 등 운동성과를 인터넷으로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 인터넷이라는 드넓은 공간에 흩어져 있던 개인과 개인이 뭉쳐서 개인의 속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끼리 단결한다”라고 묘사했다. 


한국의 극우를 살피기 위해서 일본의 극우를 살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의 극우가 일본 극우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세대 극우 세력이 일본 극우 세력과 닮은 모습은 해방 공간에서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이 쇠퇴하고 친일파가 우익 세력의 영역을 차지하던 모습과 유사하다. 주로 우익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된 반민특위기 친일 경찰에 의해 해체된 후 친일파들은 ‘빨갱이를 잡자’며 친일청산 프레임을 공산주의자 청산 프레임으로 전환시켰다. 일베 회원들도 광주민주화운동의 과잉진압을 부정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등 ‘독재청산 - 민주화 프레임’을 깨고 ‘종북 프레임’으로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모습이 닮았다. 


사회적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진보가 아니라 극우로 치닫는 모습은 유럽의 ‘네오나치’ 현상에서도 목격되는데, 우리에게도 낯선 현상은 아니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보수 정치인인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 동조한 무리 중에는 소작농들도 있었다. 지주 아들들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서 좌익이 되곤 했는데 지주에 대한 반감이 좌익에 대한 반감으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라고 말했다. 


‘좌익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일본 넷우익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작가 시부이 데쓰야는 “인터넷에서는 ‘좌익=모범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요. 그에 비하면 우익은 파괴력이 있고,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죠. 기존 언론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속마음’이 인터넷 여론을 지배하게 되었어요. ‘차별은 나쁘다’가 아니라 ‘차별은 정말 나쁜 것일까?’하는 도발이 매력적이죠. 인터넷의 마력은 터부를 깨는 쾌감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극우 논리가 더 이상 ‘이념 소수자’가 아니라 보편화 되었다는 것이다. 야스다 고이치는 재특회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한 고등학교 교사의 말을 소개했다. “예전에도 어른스럽고, 머리가 좋고, 교사에게 논쟁을 거는 학생은 있었어요. 비교적 좌파적인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었죠. 그런데 요즘에 논리로 교사를 이기려 드는 아이는 오히려 ‘우파적인’ 아이들이에요. 우익이 훨씬 잘나간다니까요.”


자신들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청년 극우세력의 동인은 소영웅주의다. 야스다 씨는 재특회 회원들이 소영웅주의를 발휘하며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유사 가족’이라 할 만큼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도 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헬로 키티 상품을 모으는 중년남성, 용무늬 점퍼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점잖은 옷인 청년, 미국인 남편과 부유하게 살며 유명인 친구를 많이 두고 있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바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등이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가 바로 재특회라는 것이다. 


재특회를 후원하는 후지이 마사오 씨는 “회원들이 가족 같은 관계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야쿠자 세계에도 그런 요소를 동경하며 조직에 들어온 사람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스다 씨는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은신처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말을 인용하며 “재특회를 보고 있으면, 애국심은 외로운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이렇게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것은 소외감 때문이라는 것이 재특회 경험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솔직히 재특회에는 활동 외엔 아무 취미도 없고, 친구도 적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재특회 활동에서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현 회원, 호시 에리야스) “백수나 은둔형 외톨이였던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다수는 아니다. 직장이나 학력과는 상관없이 어딘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많긴 하다.”(전직 지부장) “조선인을 쫓아내라는 외침이 ‘내 존재를 인정하라!’라는 외침으로 들렸다.”(탈퇴 회원) 


극우의 목소리가 극단으로 치닫게 된 이유가 ‘소외’라는 면에서 우리와 비슷하다.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최대한 20~40세대에서는 야권 지지자들이 담론을 장악했다. 이는 선거에서 50~60세대의 결집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동세대에서는 일베와 같은 일탈현상이 나타나게 했다. 담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얘기 못하는 보수 성향 20~40세대에게 그들만의 해방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의 전통 혹은 신생 보수 세력은 ‘재특회’를 대부분 비난한다. 특히 재특회의 편협성, 공격적인 주장은 다른 보수단체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시위는 좌익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보수파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존 보수층에게는 자민당이야말로 보수의 대표였고, 자민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이상 반체제를 표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신우익 단체인 일수회의 기무라 마쓰히로는 “우익은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불안정 고용이 급증해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해소할 길이 없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배출하기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것 같은데, 이는 진정한 우익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재특회를 비판했다. 초기에 재특회 지부장을 했던 마스키 시게오씨는 “애국의 이름을 빌린 분풀이였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갑자기 애국의 깃발을 들고 정의를 논한다. 전통적인 보수가 다시마라면 재특회는 화학조미료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다수 재특회 회원은 기존 우익 조직의 이런 반발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기존 우익을 혐오한다. 여러 가지 맥락이 있다. 기존 우익엔 사이비 우익, 야쿠자 우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특회의 기본 입장은 ‘기존 우익이 지금까지 세상을 바꿀 만한 일을 했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죽음으로써, 일·중 친선, 동양 평화의 단서를 이룬다면 이렇게 버려짐을 행운으로 알겠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중국과 일본에 계기를 마련하여 양국이 제휴하게 되고, 동양 평화의 다리가 되어,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가 도래할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육군대장이자 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유서 내용이다. 그는 유서에서 재건군(자위대)을 용병제로 하라고 권유하고, 우익적인 학교 교육의 방향을 제안하고, 야스쿠니신사에 전범들을 합사하라고 했는데 일본은 거의 그대로 움직였다. 죽은 도조 히데키의 입이 되어 아베 총리와 하시모토 지사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모습이다.  


정신과의사 출신인 일본의 사회학자 노다 마사아키는 저서 <전쟁과 인간>에서 일본인 과거사를 부정하고 식민지배를 사과하지 않는 것의 결과가 사회적 소외현상으로 나타났다며 “일본은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다’ ‘침략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자학사관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과거를 부인했다. 체험의 부인은 콤플렉스를 만들고, 억압된 마음의 상흔은 감정의 경직과 병적인 충동의 폭발을 가져온다. 과거의 짐이라는 유산은 회사인간, 장·노년층에서 자주 보게 되는 억울증, 아이들이 자폐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노다 마사아키는 “패전 이후 일본 사회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는지, 전쟁에서 얼마나 정신적으로 왜곡되었는지, 되돌아보는 일 없이 약자를 배제하면서 경제활동에 매진해 왔다. 물량에서 미국에 진 것이니까 경제부흥, 공업의 재건,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였다”라며 기억의 왜곡을 짚었다. 독재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고,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폄훼하는 우리에게 이것이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드골 정부는 나치 독일에 부역한 3만8천 명의 프랑스인을 체포해 이 중 천6백 명을 처형했다. 이런 프랑스를 보면서 독일은 감히 나치의 복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에게 종북 혐의를 씌워 처벌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본은 거리낌 없이 욱일승천기를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