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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행복한 책꽂이

만화의 지평을 넓힌, 품격 있는 만화 5권 소개합니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4. 9. 10.






자크 라캉으로 김치찌개 끓이는 법
<맛있는 철학>/철학 자문 신승철·요리 자문 박준우, 권혁주 지음/애니북스 펴냄




‘맛있는 철학 책’이 한 권 나왔다. 철학자의 질문을 만화로 그리고 음식으로 풀어냈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만 스토리 위주로 풀어서 재미있는 음식만화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읽게 된다. 읽으면서 사람 사는 이야기 속에서 발생하는 철학적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요리를 통해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데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평소에 먹던 요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저자는 이미 <움비처럼>에서 시를 만화로 풀어낸 적이 있다. 

저자는 요리와 철학은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요리는 목적이 명확하다. 먹기 위해서 만든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요리의 과정은 논리적인 측면이 많다. 인과관계가 명확하다. 그런 면도 철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는 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한 저자는 “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러면 나는 지금 고민이 뭐냐고 되묻는다. 자기 고민이 있어야 철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이다”라고 설명했다. 

철학자 12명의 대표 개념을 12가지 음식에 빗대어 이야기를 구성했다. 호라티우스의 ‘카르페디엠’을 볼로네즈 스파게티로 풀어내고,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무화과 샐러드로 설명하고,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양파 수프를 통해 해설한다. 그 밖에도 자크 라캉의 김치찌개, 키에르케고르의 시래기국을 맛볼 수 있다. 

철학과 음식을 배합해 만화라는 국물에 넣어 ‘음식 철학 만화탕’을 끓이면서 그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배합 비율이다. 그는 “철학은 조금만 들어가도 철학에 대한 만화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이스커피에 커피가 조금 들어가도 커피의 성질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되도록 음식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철학을 음식 이야기로 풀면서 저자 또한 음식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음식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저자는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요리를 직접 해보았다. 생각해보니 요리를 배운 적이 없었다. 왜 학교에서 요리를 안 가르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조언을 해준 박준우 푸드 칼럼니스트는 실험적인 음식을 많이 한다. 정해진 레시피를 따르지 않고 마음속으로 맛을 그려서 점점 맞춰간다. 그런 과정을 경험해보면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맛있는 철학>은 학습만화처럼 단순히 철학의 개념을 만화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음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엮어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래서 철학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숙성된 철학만화가 되었다. 아쉬운 점은 서양철학자의 질문과 서양음식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철학은 날이 서 있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수월했다. 반면 동양철학은 포용적이다. 앞으로 동양철학과 동양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보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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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만화가의 36년, 그 그림이 아프다
<피부색깔=꿀색>/전정식 글·그림/박정연 옮김/길찾기 펴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최악은 내가 왜 불행한지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원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입양아 유리는 훨씬 빠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역시 입양아인 유리의 누나는 마약 과용으로 죽었다. 다리가 짧았던 입양아 브뤼노는 목을 매달았다. 입양아 안느는 혈관을 끊어서 죽었다. 입양아 미셸은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 모든 한국인 입양아들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다.”

벨기에 입양아 출신 전정식 작가가 그린 자전 만화 <피부색깔=꿀색>의 내용 중 일부다. 거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많은 입양아들이 어른이 되어 한국에 돌아와 부모를 찾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좋은 양부모 만나 번듯하게 자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그러나 그들은 20만명이 넘는 해외 입양아 중 살아남은 일부다. 많은 입양아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다.

전씨가 입양아를 표현하는 말들은 적나라하다. 고급 승용차처럼 벨기에 부유한 부부의 상징 코드, 다른 사과까지 썩게 만드는 양동이 속의 썩은 사과, 얼굴에 멍이 들어 있으면 반품되는 하자 있는 상품, 망가지고 질리면 쉽게 버리는 장난감…. 입양아들끼리는 서로 말을 걸지 않으며 마주치는 게 싫어서 길을 돌아갔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자라면서 동양적인 것에 끌리던 저자가 빠져든 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라 일본 문화였다. 사무라이와 제국 기병의 늠름함에 반했고 일본산 전축으로 일본 음악을 들으며 일본 문화에 빠져들었다. 저자는 “진짜 내 선조, 한국의 선조들에 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를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보냈으니, 선조들이 나를 배신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용서할 수가 없었다”라고 그 심정을 표현했다.

만약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분명히 강제징집을 당했을 거라고, 아니면 거리에서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제법 자란 후에 입양되었던 그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의 생활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홀트에서는 급식 시간 동안 소란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씹는 소리만 났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먹고 난 그릇은 늘 거의 깨끗했다.”

입양된 지 36년 만에 그는 고국을 찾았다.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왜 쌀밥이 당기는지 알기 위해서, 위벽에 구멍이 날 정도로 매운맛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자, 나무뿌리를 좋아하는 자신의 진짜 뿌리를 찾아서, 청소년 시절 마약에 취해서 보았던 돌고래 환영 속의 엄마를 찾아서 그렇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꿀색 피부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신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어가지는 못했다. 

<피부색깔=꿀색>은 2009년 국내에 출판되었던 책이다. 이번에 저자의 한국 방문기가 추가되면서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피부색깔=꿀색>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2012년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되었다. 그의 한국 방문기는 <피부색 꿀>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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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잘될 거야
마나 네예스타니 글·그림, 돋을새김 펴냄


시사풍자 만화가 마나 네예스타니는 페이스북에서 유명인이다. 국내에도 팬들이 많다. 이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공감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삽화는 날이 서 있지만 신랄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폭력이 어떻게 순환하는지, 평화적 해결이 어떻게 폭력적 결과를 낳는지, 아이러니한 현실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1973년생인 마나 네예스타니는 지금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다. 2000년 삽화집 <Kaaboos>를 발간했다가 정치적 인사로 분류된 그는 정부로부터 아동물 삽화만을 그리도록 명령을 받게 된다. 그런데 2006년 그가 그린 한 컷의 삽화가 계기가 되어 아제르바이잔 민족단체가 폭동을 일으킨다. 수백명이 체포되고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생겼다. 이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그는 임시석방 기간에 이란을 탈출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서 국제만화가권리협회가 선정한 ‘용감한 시사풍자 만화상’과 유엔 선정 ‘국제언론삽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삽화 중에는 자파르 파나히, 아마드 제이다바디 등 반체제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정치범을 기리는 작품이 많다. ‘괜찮아, 잘될 거야’라는 제목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괜찮은 세상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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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장 피에르 필리외 지음, 시릴 포메스 그림, 해바라기프로젝트 옮김, 이숲 펴냄 


전 튀니지 대통령 벤 알리는 1987년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독재를 했던 하비브 부르기바를 몰아냈다. 그러나 그 또한 독재자가 되었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을 기념해 튀니지에서 제일 큰 광장의 이름을 ‘11월7일 광장’으로 바꿨다. 그의 측근들은 이권을 독점했는데 가난한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이들의 횡포에 바나나 7㎏과 사과와 배 5상자를 빼앗겼다. 압수당한 물건을 되찾기 위해 세 차례나 가서 사정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그는 몸에 송진을 바르고 불을 붙였다. 그의 소식이 전해지자 튀니지 전역이 봉기했다.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11월7일 광장’은 ‘무함마드 부아지지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아랍의 봄’을 이끈 재스민 혁명이다.

이 재스민 혁명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책이 나왔다. 프랑스의 아랍 전문가 장 피에르 필리외가 정리하고 그래픽노블 만화가 시릴 포메스가 그린 만화 <아랍의 봄>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에 어떤 과정을 거쳐 독재정권이 들어섰고, 이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어떤 계기로 혁명이 이뤄졌고, 누가 희생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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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아이
정유미 글·그림, 컬처플랫폼 펴냄


정유미 작가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박찬욱 감독이었다.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정 작가의 단편 애니메이션 <먼지아이>를 처음 본 박 감독은 “단편이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중요한 작품이다. 먼지아이라는 이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계속해서 많은 작품에 등장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먼지아이>는 2009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상영된 이후 70여 개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각종 상을 받았다.

그림책 <먼지아이>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그렸던 손그림 5000장 중에서 고른 그림을 묶어낸 것이다. 이 책이 올해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 뉴호라이즌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뉴호라이즌 부문은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에 주는 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한국 작가가 그림책 분야 대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심사위원들은 “흑백의 대비를 통해 일상의 단면을 상세하게 보여준 힘 있는 작품이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