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을 정몽준 의원에게 빼앗겨 선거가 싱거워졌다.” 선거 1주일 전 만난 정두언 의원은 너스레를 떨었다. 상대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한참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은 한가했지만 그의 발은 바빴다. 카니발 승용차 안에서 그는 신사복 바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흰색 운동화를 꺼내 끈을 질끈 동여매어 신었다.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백련시장 주변 상가를 돌며 지지를 호소했다.
지지율 높은 여당의, 실세 의원이라는 정 의원이 이 정도라면 선거를 처음 치르는 정치 신인의 분주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단 이름부터 알리고 봐야 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튀려고 안달이다. 현역 박상돈 의원(자유선진당)과 재벌 그룹 오너 출신인 김호연(한나라당) 후보 틈바구니에서 치이고 있는 통합민주당 천안을 박완주 후보는 선거 막판 ‘무박 5일 연속 유세’라는 고육지책을 펴기도 했다.
선거 2주일 전에 만난 한나라당 양천을 김용태 후보는 생애 첫 선거를 무척 버거워했다. 그는 “가까운 사람부터 지쳐 떨어지고 있다. 맨 처음 집사람이 삐졌고 부모님이 삐졌고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삐졌다. 지금까지 도와달라고 열여덟 번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더 얼마나 주변 사람을 괴롭히고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번 18대 총선에서 정치의 바다에 처음 몸을 던진 신인들이 거친 풍랑에 맞서 분투하고 있다. 기사에서 늘 ‘정치 신인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신선함과 패기를 앞세워’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정치 신인들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다분히 호의적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워낙 욕을 먹고 있어서 ‘반사 이익’을 얻는 셈이다. 지난 3월4일 실시된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현재 거주하는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연임되기를 바라는가, 교체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2.7%가 ‘교체’, 25.0%가 ‘연임’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치 신인은 무조건 신선하고, 모두 패기가 넘칠까? 각 당 공천 과정에서 지켜본 모습, 그리고 선거운동 현장에서 바라본 이들의 모습은 기성 정치인의 행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때로는 기성 정치인을 능가할 정도의 정치 술수를 부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정치 신인들의 치열했던 선거전을 되짚어보았다.
실세에 줄 대고, 공천 못 받으면 탈당
기자 출신인 후보 1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면접장에서 “이재오 의원의 추천을 받고 왔다”라고 말해 공심위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계보 정치를 당연시한 그는 당시 막강 실세로 불린 이 의원의 이름을 팔며 공심위가 자기를 선택할 것을 종용했다. 이재오 의원의 한 측근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재오 의원이 공천을 좌지우지한다는 욕을 먹었다”라고 푸념했다.
역시 기자 출신인 후보 2의 돌연한 출마는 동료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치부 경험도 거의 없었고 정치와 무관하게 사는 기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정치권에 줄을 대왔다. 선거운동 현장에서 만난 그는 “두드려야 문이 열리지. 문이 그냥 열리나요?”라며 자기가 줄을 잘 댔다는 점을 자랑했다.
후보 3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외곽 자문그룹에 속하는 교수를 도와 선거운동에 참여한 정치학 박사다. 직접 정치에 끼어들 뜻이 없는 교수를 대신해서 그가 공천을 신청했다. 그는 “나를 밀어준 교수가 청와대를 두 번이나 방문한 끝에 어렵게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큰 공헌을 한 변호사인 후보 4는 지역구를 쇼핑하듯이 골라서 한나라당 현역 의원들의 불만을 샀다. 메뚜기처럼 이 지역구 저 지역구를 넘나들던 그는 끝내 당 중진을 몰아내고 한나라당 안방에서 공천을 따냈다. 후보 4와 함께 BBK 벤처 사기 사건을 방어했던 다른 변호사들도 무난하게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냈다.
후보 5는 다른 방면에서 공헌을 하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았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대선 전에 특보단에 들어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의 2002년 대선자금과 대선잔금 문제를 제보했다. 검사 출신인 후보 6은 실세 의원의 재판과 관련해 로비를 해주고 가까워져 공천에 도움을 받았다. 그는 “당시 그 실세가 검사장급도 하지 못할 일을 해주었다며 고마워했다”라고 회고했다.
'한나라당은 망해야 할 당'이라고 비난하고도 한나라당 공천 받기도
이번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한 한나라당 한 의원은 자기를 대신해 후보 7이 공천받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예전에 한나라당을 탈당하며 “한나라당은 망해야 할 당이다”라고 당을 저주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역 의원의 탈락이 많았던 한나라당 공천의 경우, 현역 의원보다 더 부정적 인물이 공천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 당 내부 평가다.
후보 8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하고 친박연대에 입당해 출마했다. 그러나 그의 선거사무실에서 본 그의 실체는 달랐다. 그의 사무실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와 찍은 사진으로 급하게 명함을 바꿔 선거운동에 나섰다.
한나라당 당적으로 출마한 후보 9는 친박연대 후보와 ‘원조 친박’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친박연대 후보는 박근혜 후보의 광역선대본부장을 지냈고 그는 대외협력부단장을 지냈다. 정책과 공약을 뒤로하고 두 후보는 ‘누가 박근혜 전 대표와 가까운가’를 두고 다퉜다.
후보 10은 젊은 나이에 친박연대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받아 당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박사모’ 활동을 했다고 했지만 ‘박사모’ 관계자들도 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 존재가 확실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건설회사 사장인 그녀의 어머니는 박근혜 전 대표 외곽단체의 여성 공동의장을 맡고 있었다.
후보 11은 가장 희한하게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후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의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공신이어서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애초 이 교수가 비례대표 공천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이를 자신에게 양보해 현역 중진의원을 제치고 지역구 공천을 따냈다.
후보 12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불운한 예비후보다. 이명박 대통령 측근의 친구였던 이 교수는 대선 과정에 외곽 자문교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측근이었던 친구가 권력 투쟁에서 밀리며 덩달아 공천에서도 밀렸다. 2004년에도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던 이 교수는 이번에 지역구 공천에 이어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지만 이마저도 탈락했다. 이 교수의 같은 과 동료 교수는 그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했다. 그는 “학생들 보기가 창피하다.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정치 실습을 한 것인가. 그렇다면 점수는 F학점이다”라고 비꼬았다. 아마 2012년 총선에서도 이 교수는 정치 신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것이다.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해 당 공약도 무시
후보 13은 민주당 후보다. 그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많은 지역구 상황을 고려해 당론과는 배치되는 ‘종부세 폐지’를 공약했다. 그는 대선 전에 주군을 따라서 한나라당을 탈당한 정치인이다. 그의 몸은 민주당에 와 있지만 그의 머리는 아직 한나라당에 머물러 있었다.
한나라당의 충청북도 후보 14와 경기도 후보 15, 그리고 경상북도 후보 16은 당론과 별개로 ‘한반도 대운하 추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후보 13은 ‘대운하의 중심, 충주는 항구다’를 으뜸 구호로 내걸었고, 후보 15는 ‘대운하 여객 물류센터’ 건립을 지역발전 공약으로 내세웠다. 후보 16은 대운하 사업으로 지역개발을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당 공천을 받은 후보 17은 공천을 받고 바로 지역의 친박근혜 정치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명박계인 한나라당 후보를 견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정치의 기본 공식을 그는 충실히 따랐다. 앞서 언급했던 후보 3은 한나라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에 영향력이 큰 구(舊) 민주당 중진 정치인을 찾아가 민주당 후보를 견제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후보 18은 선관위 주최 토론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상대인 진보신당 후보로부터 맹비난을 당했다. 상대 후보는 “선관위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최 후보자 토론회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참한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이자 유권자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행태다”라고 비난했다. 후보 18뿐만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 많은 정치 신인들이 토론회를 회피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한나라당 후보 19는 경쟁자인 민주당 현역 의원으로부터 공약을 베꼈다는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의원은 “그가 제시한 공약들은 대부분 내 의정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복사한 듯하다”라고 비난했다. 많은 정치 신인이 현역 의원을 향해 ‘지역을 위해 해놓은 것이 없다’며 비난하지만 이들 역시 공약 베끼기를 통해 ‘지역을 위해 고민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친박연대 비례대표 후보인 후보 20은 인척인 연예인을 선거전에 등장시켰다. 해당 연예인이 자기 정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그는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인척인 그 연예인이 캐스팅에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후보 20뿐만 아니라 많은 후보가 이번 총선에서 연예인들을 거리 유세의 ‘얼굴 마담’으로 동원했다.
유세 현장에서 만난 한 다선 의원은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는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소주값 좀 줄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것 바라고 온 것 아니야’ 하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구 정치인을 대신해 새롭게 18대 국회에 입성하는 정치 신인들이 정치 개혁을 이룰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사IN> 30호 기사, 2008년 04월 08일 (화) 10:14:16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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