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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독설

카투사 제대 후 20년만에 용산미군기지를 가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8. 12. 24.

용산미군기지를 가다

 


‘11월30일 오후 1시까지 캠프킴으로 신분증을 가지고 오시라’ 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소속 사무관에게서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 안내 문자가 왔다. 우리나라 땅이지만 신분이 확인되고 미군 측의 허락을 받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용산미군기지의 현실을 실감하게 하는 문자였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주둔지로 수용된 후 114년 만에 되돌려 받은 것을 기념해서 국토교통부는 6차례에 걸쳐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를 기획했다.

 

1990년대 후반 용산미군기지에서 2년 동안 카투사 병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집합 장소인 캠프킴은 갤러리로 활용하고 있었다. 등록을 하고 용산미군기지 방문증과 안내 팜플릿을 받았는데 여권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땅이지만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선택받은 사람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여권 모양 팜플릿이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캠프킴은 용산미군기지에 배치 받은 카투사 사병들이 기지를 출입할 수 있는 ID카드를 발급 받고 TA50(개인 군용 장비)를 지급받던 곳이었다(갤러리로 바뀐 곳은 USO 사무실이 있던 곳).

 

용산공원갤러리 전시회 관람을 마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신용산역 근처의 14번 게이트를 통해 사우스포스트로 들어갔다. 용산미군기지는 크게 4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넓은 남쪽의 사우스포스트, 한미연합사령부가 있던 메인포스트, 맨 북쪽의 캠프 코이너 그리고 한강로 건너편의 캠프킴으로 나뉘어 있다. 지난해 미8군사령부가 평택미군기지로 이전하고 올해 한미연합사령부까지 옮겼지만 네 개의 캠프 중 가장 작은 캠프킴의 사용권만 우리에게 넘어온 상태다. 국토부는 용산미군기지를 앞으로 용산공원(국가생태공원)으로 만들 예정이다.

 

14번 게이트에서는 카투사 병사가 버스에 올라와서 신분증을 확인했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21개의 게이트가 있는데 원래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게이트 가드라 불리는 한국인이었다. 이들이 속한 용역회사가 미군 측과 계약을 맺고 게이트를 지켜주는 것인데, 한국을 지키러 온 미군을 지켜주는 사람이 한국인 경비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사우스포스트 벙커

 

게이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사우스포스트 벙커 건물이 나온다. 이 벙커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지은 시설이다. 벙커 옆에는 원래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있었는데 철거되었다. 광복 후에는 육군본부에서 이 벙커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한강대교 폭파작전이 결정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북한군도 서울을 점령했을 때 이 벙커를 사용한 적이 있다. 용산국가공원이 조성된 뒤에도 이 벙커는 그대로 남아서 ‘기억의 의무’를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우스포스트 벙커를 지나 남쪽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미 육군 121종합병원이 나온다. 지금은 아파트단지에 가려 한강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였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인공호수까지 파서 조경을 했던 총독 관저는 아방궁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일본군사령부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121병원은 식당(DFAC, Dining Facility)이 용산미군기지 식당 중 가장 맛있는 곳으로 꼽혔다. 상대적으로 민간인들의 이용이 많았기 때문에 메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이 식당에서 미군 장교들과 한국군 장교들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군 장교들은 중령이든 대령이든 사병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자신의 식사를 직접 받아 먹었다. 반면 한국군 장교들은 소령이나 대위와 같은 초급 장교들도 줄을 서지 않고 병사들이 자신의 식사를 받아오도록 시키곤 했다.

 

121종합병원은 미 육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군병원으로 장군으로 진급하기 전 대령이 병원장(겸 의무사령관)을 맡고 각 과의 과장 역시 대령급이 맡았다. 한국 전쟁 와중에 미 육군은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야전병원) 체제를 확립했는데 그 모태가 되었던 곳이 바로 121종합병원이다. MASH는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10년 넘게 방영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미 육군은 야전병원을 FST(Forward Surgical Team) 체제로 개편하고 MASH 해단식을 121종합병원 근처 연병장에서 열었는데 이때 MASH 출연 배우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기자가 근무할 당시 121종합병원 근처 연병장에 앨 고어 당시 미국 부통령이 헬기를 타고 방문한 적이 있다. 부대에 비상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병들은 일찍 퇴근시키고 장교들만 징발되었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장교들이 사병들에 비해 훨씬 더 검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장교들이 맡아야 할 일이다”라는 답을 들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소장 출근길이 깨끗하도록 새벽마다 나가서 낙엽과 눈을 쓸고 얼음을 녹이던 훈련병 시절이 생각났다.

 

121종합병원에서 다음 방문지인 ‘일제시기 용산 위수감옥’으로 가는 길은 용산미군기지에서 가장 한갓진 곳이다. 소프트볼이나 야구를 하는 운동장이 있고 길의 중간에는 대형 골프 연습장도 있다. 골프 연습장 남쪽에는 9만여평 규모의 미군 골프장이 있었는데 1992년 이곳을 반환 받아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을 조성했다.

 

용산미군기지 내 주거지역 면적은 대략 38%에 이르는데 메인포스트에는 주로 병사들이 이용하는 막사가 있고 사우스포스트에는 하사관과 장교들이 이용하는 관사가 있다. 사우스포스트 남쪽 일대는 시설물이 적어 그냥 두어도 바로 공원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투어에 참가한 한 시민은 이 풍경을 보고 “한가한 미국의 지방 소도시에 온 느낌이 든다”라고 표현했다.


 

버스투어 참가자들에게 첫 하차를 허락한 곳은 일제 강점기 시절 군 위수감옥이던 곳이었다. 철수 전까지는 미군 의무부대가 이곳을 사용했다. 담으로 쓰이던 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생긴 총탄 구멍이 많았다. 담장 안에는 빈 건물이 몇 동 있는데 그 중에는 감옥으로 쓰던 시절 치료(병감)와 취사(푸주)를 위해 사용하던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구 서대문형무소와 마찬가지로 사형수의 시신을 나르던 쪽문은 봉해진 채로 있었다.

 

용산미군기지에서 미군들이 사용하는 건물은 모두 번호가 붙어 있는데 세 종류로 구분된다. T로 시작하는 번호가 붙은 건물(임시 시설), S로 시작하는 번호가 붙은 건물(반영구 시설) 그리고 그냥 번호만 붙은 건물(영구 시설)로 나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임시 건물일수록 지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T로 시작하는 퀀셋막사(반원형 막사)는 대부분 1950~60년대 지어진 것들이다. S로 시작하는 건물은 1970~80년대 지은 것이 많다고 했다. 유추하자면 초기에 미군은 용산기지를 임시로 이용하는 곳으로 간주했는데 나중에는 영구적으로 쓰는 시설로 생각하고 건물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위수 감옥 아래에는 미군 군용차 주차장(Motorpool)이 위치하고 그 옆에 대형 주유소가 있었다. 이 주유소의 기름 탱크가 바로 녹사평역 일대 기름 유출의 원흉으로 꼽힌다. 미군이 용산미군기지에서 완전 철수한 이후에도 기지 내 환경을 복원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 중 이 기름 탱크가 가장 큰 난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위수감옥 터에서 좀 더 올라가면 해발 70m의 둔지산 정상이 나온다. 둔지산은 남산으로부터 한강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곳에는 미군 헌병감 사무실이 있었다. 미군은 감옥으로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수감옥 위에 헌병감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미군이 일본군의 부대 배치를 참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용산미군기지는 남산에서 두 줄기의 산줄기가 내려와서 부대를 품은 형국인데 일본인들은 그중 왼쪽 산줄기에 비중을 두고 일본군사령부와 총독 관저를 그쪽에 두었다. 미국인들은 언덕이 좀 더 높은 오른쪽 산줄기에 비중을 두었다. 둔지산 줄기의 마지막에는 미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 부지가 있다. 언덕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리버뷰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 형태다. 미군 철수가 완료 되어도 이 부지는 반환되지 않는다. 관할도 미국 국방부가 아니라 국무부다.

 

둔지산 정상에서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사우스포스트와 메인포스트를 연결한 고가도로를 지나 미8군사령부 청사와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청사로 쓰던 건물 옆에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미8군사령부는 일본군이 막사로 쓰던 시설이라 건물에 일본군을 상징하는 별 문양도 남아 있다. 한미연합군 사령부는 우리 정부가 지어준 것으로 한옥 기와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뒤 언덕 위에는 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 있는데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단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이 건물은 일본군 장교의 숙소였다. 용산미군기지 안 건물 중 약 8%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버스투어에 동참한 신주백 한림대학교 교수(일본학연구소)는 “용산미군기지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인 만큼 보전이 중요한 이슈다”라고 지적했다.


 

11월1일 한국과 미국의 국방장관이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에 적용할 연합방위지침에 서명했는데 전환 이후 한·미 연합군의 사령관은 한국군 4성 장군이, 부사령관은 미군 4성 장군이 맡기로 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미군이 다른 나라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는 전통인 ‘퍼싱 원칙’이 깨진 것이라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미군의 우위에 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용산미군기지는 미 2사단 지역만큼 힘들지 않아 미군과 카투사 사병이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갈등도 제법 많았다. 갈등을 빚는 경우에 카투사 병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것이 바로 인종 차별 이슈였다. 인종 차별 문제를 관할하는 EO(Equal Opportunity, 기회균등과)에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의 미군들은 꼬리를 내렸다. 인종 차별은 성군기위반(SHARP, Sexual Harassment & Assault Response and Prevention)과 함께 중요한 사안이라서 잘못하면 강등(Demotion)까지도 될 수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옆 사무실에서 미군 하사관이 사무실에서 20달러를 잃어버렸다며 건물을 청소하는 한국인들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군 중대장을 찾아가서 한국인들만을 대상으로 조사받는 것은 인종차별이니 미군들도 조사를 받으면 우리가 조사하겠다고 따졌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 하사관이 찾아와 돈을 찾았다며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미군과의 갈등을 제외하면 용산미군기지는 카투사들에게 특권의 성이었다. 카투사 병사 중에서 용산미군기지에서 근무하는 병사를 ‘용투사’라고 불렀는데 이들 중에서도 ‘땡보직’으로 꼽히는 몇몇 부대가 있었다. 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은 그중 하나로 남산 밑의 종교휴양소(RRC, Religious Retreat Center) 등과 더불어 ‘땡보직’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는 흔히 말하는 빽이 좋은 병사들이 주로 근무했다.


 

처음 용산에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선임병들로부터 호구조사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자 돌아가시기 전 직업을 물어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니 그때서야 안도하는 눈치였다. ‘용투사’ 중에는 워낙 빽을 가진 병사들이 많아서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그런 병사를 파악하기 위해서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기자의 보직은 카투사인사과의 정훈병이었다. 정훈교육과 상벌 업무를 맡았는데 나름 ‘땡보직’이었다. 선임병은 제주 갑부의 아들이었고 그 그 선임병의 선임병은 장관을 지낸 국회의원의 아들이었다. 고참들이 열심히 호구 조사를 한 이유가 있었다. 용산미군기지라는 특권의 성에는 특권의 방이 있었고 그 방에는 또 기가 막히게 특권의 의자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빽들의 향연’이 빚어낸 웃지 못할 드라마도 몇 번 보았다. 옆 부대에서 한 카투사 병사를 징계하려고 할 때 그 병사가 3성 장군인 친척의 빽을 써서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대 선임병이 다시 빽을 썼는데 그 선임병의 친척은 4성 장군이었다. 그래서 징계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기자가 근무할 당시에는 카투사 선발 방식은 시험을 통하는 선발과 논산훈련소에서 추첨을 통해 선발하는 방법이 함께 쓰였다. 훈련소 추첨 선발 과정에 부정이 많았는데 입대 시기를 조절해서 선발되게 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훈련소 선발 병사의 집 주소는 대부분 강남구였다. 병역비리 수사가 한창일 때 뉴스를 보고 우는 사병이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부모님도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처벌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 했더니 자신이 한국군으로 복귀해야 할 것 같아서 운다고 했다.


 

특권의 한 축에는 미군 군속으로 일하는 한국인들과 김치GI라고 부르는 교포 1.5세 2세 출신의 한국계 미군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 섹션에 카투사 배치를 신청하곤 했는데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군 파견대장이 용인해주면 쉽게 관철되곤 했다. 그래서 미군이 아니라 한국인과 일하는 카투사도 종종 있었다.

 

구 한미연합군사령부 청사를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했는데 청사 뒤에 유유히 흐르는 만추천이 버스투어 참가자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남산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양쪽을 둘러 싼 형세라 그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개울이 만들어졌다. 만초천은 대부분 복개되었는데 부대 안의 지류는 복개가 되지 않아서 물 흐름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용산국가공원을 설계한 이로재 건축사무소의 함은아 부소장은 공원을 조성할 때 이곳의 물 흐름을 살려서 활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둔지산과 만추천 등 용산미군기지에는 우리가 되찾아 와야 할 우리 이름이 많다. 미군은 부대시설은 주로 숫자로 표시하지만 체육관과 같은 편의시설에는 한국전쟁에 희생된 미군 사병들의 이름을 붙인다. 도로와 캠프에도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를테면 미군기지 중 캠프 보니파스(2006년 반환)가 있었는데 이 캠프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희생된 보니파스 소령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메인포스트 한가운데 있는 일본군 병기지창 무기고 터는 이번 용산미군기지 버스투어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들르지 않았다. 이 건물이 있는 곳 주변은 미군의 생활 시설이 즐비했다. ‘미8군 클럽’이라고 부르던 클럽하우스, 볼링장, 푸드코트, 체육관 도서관 등 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더라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시설을 구비해 두었다. 클럽하우스 지하에는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있었고 1층에는 슬롯머신 등 위락시설이 있었다.

 

용산미군기지는 하나의 자급도시였다. 미국 대학의 분교도 이곳에 강의실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가장 큰 시설은 버스터미널로 전국 각지의 미군부대로 가는 버스가 이곳에서 운행되었다. 미군 자체 대중교통 체제까지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현재 이 터미널은 축소되어 드래곤힐 호텔 옆으로 이전했다.

 

PX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을 카투사도 이용할 수 있었다. 기자는 용산미군기지에 근무할 당시 도서관을 주로 이용했는데 월간 <말>지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월간 <말>지에는 주한미군 비판 기사가 자주 나왔는데 그 기사를 미군기지 한가운데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메인포스트를 다 둘러본 버스는 왕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있던 캠프 코이너로 이동했다. 남단은 조선 시대에 종묘와 사직단과 함께 중요한 장소로 취급되던 곳이다. 버스투어 안내를 맡은 김천수 용산문화원 연구실장은 “미군들이 남단 터의 석물이라고 보존하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석물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단 터 외에도 캠프 곳곳에서 조선시대 석물을 발견할 수 있다.

 

캠프 코이너는 일본군 야전 포병부대가 주둔하던 곳인데 사우스포스트와 메인포스트와 달리 막사를 제외하고는 생활 편의 시설이 거의 없는 곳이다. 막사도 대부분 비어있고 부대시설도 비어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캠프 코이너의 북쪽 일부는 반환되지 않고 미대사관 신축 부지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곳을 비롯해 앞서 지적한 미 대사관 부지 그리고 버스투어팀이 마지막에 들른 드래곤힐 호텔과 방호부대 부지는 아직 반환 계획이 없다. 이런 곳을 빼고 용산공원으로 쓰이는 부지는 73만평 정도다.

 

이중 사우스포스트의 드래곤힐 호텔은 용산미군기지에서 단일 건물로 가장 큰 건물이다. 부지도 8만여평에 이른다. 1987년 미군 전용 숙박 시설로 쓰던 종로구 내자호텔 대신에 지어준 곳이다. 4성급인 드래곤힐 호텔은 미군들의 휴양 시설로 주로 미국 본토에서 오는 신병들이 자대배치를 받기 전 묵는다. 그래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 정류장이 이 호텔 앞에 있다. 드래곤힐 호텔은 용산미군기지의 정중앙에 있는데 미군은 단순한 숙박시설에 불과한 이곳을 반환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114년 전 일본군이 용산 땅을 수용할 때 그들은 헐값에 300만평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이후 일부를 돌려주었지만 일본군은 118만평 정도로 기지 규모를 유지했고 미군도 그 대부분을 이어 받아 기지로 사용했다. 일본군은 통으로 빼앗고 미군은 통으로 넘겨받았지만 돌려줄 때는 통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다. 반환 대상에 미국 대사관 신축부지, 미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 드래곤힐 호텔과 방호부대 부지 등이 빠져있다. 공원화 대상은 약 73만평 정도다.


한·미 정상간 용산미군기지 평택 이전이 합의된 것이 2003년인데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이전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 1000여 동의 건물 중 이전이 마무리 된 건물은 100동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이전하지 않은 예하 부대가 많아 여전히 기지는 미군이 관리하고 있다. 미군으로부터 관리권이 되돌려 받아 다시 국민의 품으로 되돌려 주기까지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용산공원특별법이 제정된 것이 2007년이고 종합기본계획이 수립된 것이 2011년인데 아직까지 조성 사업은 첫삽을 떼지 못했다. 2020년 전시 작전권이 반환될 때까지 한미연합군사령부 일부도 이곳에 잔류한다. 토양 정화 사업과 문화재 조사 사업을 거쳐 2022년 정도에 본격적인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될 예정인데 일반에 공개되는 시점은 2025년 이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드래곤힐 호텔 로비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평택미군기지로 대부분의 부대가 철수해서 용산미군기지 내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는데도 드래곤힐 호텔의 상점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그 중 한 곳에서 애플파이 하나와 피칸파이 하나를 사보았다. 카드가 해외에서 결제된 것으로 문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