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여, 박원순 시장의 멱살을 잡으시라,
그리고 말하라, 예술성이 공공성이라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미래에서 온 리더다. 문화적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청년허브와 청년청... 그가 서울시에 깔고 있는 각종 도시재생 플랫폼들은 시간을 더할 수록 빛을 발할 것이다. 그의 소신은 미래에 더 평가받을 것이다.
예외가 있다. 문화예술 영역이다. 이 분야에선 후퇴했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왜? 기승전-시민과 함께, 공공성을 예술성보다 앞세웠기 때문이다. 예술성과 공공성의 각축에서 서울시는 큰 고민 없이 공공성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공성 우선주의는 일선 문화행정가들에게 중요한 디렉션이 되었다.
하지만 지극한 예술성은 공공성이 될 수 있어도 지극한 공공성은 예술성이 될 수 없다.
이런 얘기다. 남산예술센터는 창작 초연 극장이다. 공공성보다 예술성에 방점을 찍었다. 이런 플랫폼에서 펼친 밥상인 <푸르른 날에>는 예술성이 공공성이라는 것을 작품을 통해 증명했다. 박근혜 정권이 탄압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도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공공성이다.
제2롯데월드 개관할 때 러버덕 사례를 보자(그리 예술성이 높다고 보지는 않지만). 자질구레한 이벤트 대신 이 러버덕을 선택한 덕에 롯데는 임팩트 있게 개관을 알렸다. 작품을 통해 공간을 재해석 하게 만들었다.
민간이 못하는 것을 공공이 해내라고 공공 문화예술 단체를 두는 것이다. 그 성취는 예술성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지 ‘시민과 함께’하라고 끌어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술성은 세대를 두루 망라할 수 있다. 예술성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적이다. 하지만 공공성은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예술 파괴이거나 예술 회피일 수 있다. ‘시민과 함께’라는 구호 아래 숨어들어간 태만이 얼마나 많은가. 공공성은 함정 덩어리다. 일자리 창출하려는 예술 교육에 ‘오늘 배워 내일 가르친다’는 아이러니가 깃든다.
예술성이 예술단체가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면 공공성 혹은 대중성은 가장 낮은 단계의 성취다. 그것은 상업 예술이나 추구해야 할 가치다. 빈필이나 베를린필이 광장에서 팝스 콘서트 많이 해서 그런 오케스트라가 되었는가, 오직 음악적 성취로 빈과 베를린 시민들의 자랑이 되었다.
대형 대관전 위주로 운영해서 방문자 숫자만 많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보다 그런 상업 대관 안 하는 원칙을 적립한 서울시립미술관이 훨씬 공공적이다. 공공예술은 예술의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시민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예술의 공공성이다. 서비스가 아니라.
서울은 메트로시티다. 세계의 도시들과 다툰다. 시민들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그것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공공성이 아니라 예술성이다. 어설픈 공공성이 자괴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시민들은 메트로시티의 세련미를 원한다. 어설프게 얼버무리는 공공성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박원순 시장의 멱살을 잡고, 3기 시정은 코드를 바꾸라고 말해야 한다. 기승전-예술과 함께, 가 되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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