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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블로거 인큐베이팅

37년 선배 기자와 영화관에 간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9. 17.




연애하는 것 같다.
거의 매일 전화가 걸려온다.
거의 매일 이메일이 들어온다.

이거 어때 저거 어때
물어보는 것 투성이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하는 것도 많다.






연애가 아니다.
상대는 기자 37년 선배인 안병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이다.
최근 나의 권유로 블로그 <안병찬의 기자질 46년>을 시작한 그는 이것저것 요구가 많다.
솔직히 많이 귀찮다.
시사IN 기사도 써야 하고, 블로그도 운영해야 해서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그래도 흔쾌히 들어준다.
그의 의욕 때문이다.
현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강력한 ‘기자 회귀 본능’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베트남전 종군 기자로
패망 직전 최후까지 남았던 한국 기자였던 그는 타고는 현장기자다.
(기자직에 대한 그의 로망은 ‘어느 70대 노기자의 자기 부고기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후배들에게 그는 ‘안깡’으로 통한다.
블로그를 통해 현장기자로 다시 부활하는 그를 돕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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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블로그에 올릴 글이라며 글을 한 편 보내왔다.
지난 달 함께 <님은 먼 곳에>를 봤던 것에 대한 글이었다.
글을 읽고 죄소한 마음이 들었다.
‘베트남전 최후 종군 기자의 <님은 먼 곳에>’ 관람기를 블로그에 올리려다,
이일 저일에 밀려 차일 피일 미루다가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안깡’과 <님은 먼 곳에>를 보러 가게 된 경위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안깡’은 내가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갑자기 전화를 한 것처럼 묘사하셨지만,
사실 그것은 ‘안깡’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다른 일로 전화를 할 때나, 행사장에서 만날 때마다
‘안깡’은 “언제 점심 한 번 먹으러 내 집무실로 와라”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때마다 알겠다고 대답하곤 잊곤 했다.
그런 것이 몇 번 반복되면서 어느덧 멘트가
“넌 왜 한 번 오라는데 안오니?”로 바뀌었다. 완전 ‘부담 백배’였다.


그러다 <님은 먼 곳에>가 개봉하자 ‘이거다’ 싶었다.
‘안깡’에게 전화를 드렸다.
반응은 “남자끼리 무슨 영화냐? 영화는 마드모아젤이랑 봐야지”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좋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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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기 전 ‘안깡’의 작업실이 있는 관훈클럽에 잠깐 들렀다.  
관훈클럽엔 기자 부스처럼 꾸며진 원로기자들의 작업실이 있었다.
(기자 부스는 보통 학교 독서실처럼 꾸며져 있다)
흥미로웠다. 백발의 기자들이 여전히 기자부스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깡’은 월남옷을 한 벌 주셨다. 
전통의상인 아오자이 스타일이 아니라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여성용 상의였다.
그리고 슬슬 젊은 시절의 안병찬으로 돌아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1972년에 월남에 처음 갔다.
그때 그는 9년 차 기자였다.
지금 나도 9년 차다.
그래서 그의 종군기는 더욱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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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안깡’도 자신의 블로그에 쓴
위문공연 온 한 유명 여가수의 밤을 지켜준 이야기였다.
‘안깡’은 기타리스트 남편을 소개하는 기지를 발휘해
군 장성들이 그 여가수를 수청들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의 회고는 담백했다.
무용담은 없었고 오히려 ‘충격 고백’이 있었다.
교전이 잠시 중단된 고지에 헬기를 타고 방문하자는 동료 기자의 제안 때문에
가기 싫었는데 비겁해 보일까봐 억지로 갔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얼마 전 하노이에서 그가 만난 ‘마담 빈’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마담 빈’은 베트남전 당시 파리에서 강화협상을 했던 ‘전설의 여인’이었다.
그는 한국 미스코리아들의 한복 패션쇼에 나타난 ‘마담빈’을 보고 즉석에서 인터뷰를 신청해서 성사시켰다.


그 순간 그를 ‘블로거’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쳤다.
무엇이든 기록하고 언제든 취재하는,
천상 기자인 그를 영원히 기자로 숨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블로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로거’ 제안에 ‘안깡’은 흔쾌히 동의했다.
‘안병찬의 기자질 46년’이라는 이름도 바로 결정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함께 칼국수를 먹었다. 
이야기보따리가 터졌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때 들었던 이야기는 나중에 보완하겠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더듬어 쓰는데, 한계가 있네요.
당시 취재수첩을 찾아 더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안깡’과 헤어지며 혼자 되뇌었다.
‘노 기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록할 뿐이다’라고.
이제 블로그를 통해서 우리는 46년 묵은 노 기자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
이 글을 쓰게 만든 '37년 후배 기자와 영화관에 간 이유'는
'안병찬의 기자질 46년'(since1962.tistory.com)에 가셔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