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가 없고
개념이 없고
전략이 없다"
- 가을 개편안에 대해 한 KBS PD
11월17일 가을 개편을 앞두고
KBS 내분이 극심하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쟁점인지 들여다 보았다.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 '사실상 폐지' 조치에 반발 폭발
<시사 투나잇>팀 PD들은 “‘폐지’라고 써놓고 ‘존치’라고 읽으라고”라는 팻말을 들고 있었다. 맞은편에서는 <미디어 포커스>팀 기자들이 ‘미포(미디어 포커스)는 성역 없이 비판을 했을 뿐이고, 조중동은 미포가 싫을 뿐이고, 이병순은 그래서 미포를 없앨 뿐이고’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었다. 11월5일 점심시간 KBS 본관 로비의 풍경이다.
<시사 투나잇>팀 PD와 <미디어 포커스>팀 기자 그리고 KBS PD협회 회원 등 30여 명은 아침 점심으로 팻말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1월17일로 예정된 가을 개편에서 프로그램 명칭이 각각 <시사터치 오늘>과 <미디어비평>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사실상의 폐지 조처’라며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정부의 방송장악에 반대하는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이하 KBS 사원행동)’은 이번 가을 개편을 ‘코드 개편’ ‘밀실 개편’ ‘주체 개편’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정연주 색깔 지우기’라는 의미에서 ‘코드 개편’이고 일선 PD뿐만 아니라 CP급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밀실 개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주체 개편’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더 필요하다.
KBS 사원들은 ‘KBS는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국가 기간방송이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관을 ‘사회주의적 언론관’이라 해석한다. 언론을 체제의 선전선동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작비 절감’을 이유로 외부 출연진을 대부분 내부 아나운서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식대로 간다’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닮았다며 ‘주체 개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병순 사장이 취임한 이후 벌어진 일련의 격변을 ‘병순사화’로 규정한다. KBS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을 보도 시사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키는 ‘제작진 숙청’이 이뤄진 데 이어 비판적 프로그램에 대한 ‘프로그램 숙청’과 윤도현·정관용·손범수 등에 대한 ‘출연진 숙청’이 이어지자 이에 항의하는 ‘텔레반(방송 근본주의자라는 의미의 KBS 사원행동 별칭)’도 본격 활동을 재개했다.
기훈석 PD 등 입사 7년차 이내(29~34기) 시사교양 PD 20명이 “권력이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시사 투나잇>이 사회 약자와 서민의 편에서 사회를 바라봤다는 증거다”라면서 폐지될 <시사 투나잇>에 지망 선언을 했다. 박석형 PD 등 역시 입사 7년차 이내인 예능 및 드라마PD 29명도 “‘프로그램의 명칭과 제작진을 바꾸겠다. 하지만 <시사 투나잇>은 계속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코미디다. 희극은 우리가 하겠다”라고 성명을 내며 <시사투나잇>을 지지했다.
젊은 PD들은 이번 가을 개편안에 세 가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어처구니가 없고 개념이 없고 전략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을 개편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고 비판한다. 그 과정을 꼼꼼히 살피면 이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월17일이 개편일이지만 고작 20일 전인 10월29일에 KBS 이사회에 보고되면서 개편안의 윤곽이 나왔다. 하차시킬 출연진에게도 이사회 직전에야 통보했다.
이사회에 개편안을 보고한 이후 곧바로 일선 PD에게 맡고 싶은 프로그램 ‘희망원’을 받았다. PD들은 새로 제작되는 프로그램이 어떤 성격인지도 모른 채 선택해야 했다. 한 일선 팀장은 ‘희망원’ 제출에 참고하라며 “각 프로그램 CP를 같이 알려드리면 선택에 도움이 되겠지만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정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안내서를 팀원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많은 PD가 <시사 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 폐지에 항의해 희망원 제출을 보이콧했다. 일선 PD의 반발이 거세자 ‘연예인 호화 응원단’을 구성해 물의를 일으켰던 강병규 하차설이 나오는 등 무마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발 기류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KBS PD협회는 <시사 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의 명칭 변경이 방송 상식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형준 정책국장은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내용이나 MC가 바뀌어도 제목은 웬만하면 바꾸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제작진이 바꾸려고 해도 편성국이나 광고국에서 말린다. 광고 영업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뒤에 ‘시즌 2’ ‘올드 앤 뉴’를 붙이면서도 제목을 계속 가져가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보통 방송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경우는 ‘프로그램이 같은 시간대 타사 프로그램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때, 방송사의 정체성과 어긋날 때, 반사회적인 사고를 크게 냈을 때’ 정도이다. <시사 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시사 투나잇>은 같은 시간대 시청률이 최고였고 광고 판매율도 높았다. 특히 젊은 시청자층을 확보해서 KBS 채널 노화를 막았다. 유일한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인 <미디어 포커스> 역시 경쟁력을 갖춘 프로그램으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었다.
"이번 KBS 가을 개편은 이병순 사장의 정연주 색깔 지우기"
KBS PD협회는 이번 가을 개편을 ‘정연주 색깔 지우기’라고 보았다. ‘정연주 사람이다’ ‘정연주 사장 시절 잘 나갔다’고 말이 도는 사람이나 프로그램은 여지없이 철퇴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런 개편안은 담당 CP들도 알 수 없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한 라디오 중견 PD는 “완전 벽돌이 된 기분이다. 개편이 두 주도 안 남았는데 CP도 모르고 MC가 누군지도 모른다. 말이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김형준 정책국장은 “제대로 된 논의 없이 개편안이 진행되면서 제작진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KBS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업이어야 하는데, 이런 식의 의사결정으로 어떻게 공영방송의 근간을 지킬 수 있겠는가. 시청자들이 들고 일어설까 두렵다”라고 말했다.
출연진을 하차시킬 때 사측이 내건 명분은 ‘경비 절감’이었다. ‘경비 절감’ 차원에서 외부 출연자를 내부 인력으로 교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체된 윤도현은 회당 180만원을 받고 있었다(처음 150만원을 받았다가 한 차례 30만원 인상됨). 강호동·유재석 등 다른 MC에 비해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손범수씨의 경우는 동료 출연자가 같이 출연료를 낮춰서 계속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묵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작 수익성 확보를 위한 경비 절감 철퇴를 맞은 쪽은 외주제작사들이었다. 이미 정연주 사장 시절 최고 30%까지 제작비 삭감을 당했던 외주제작사는 이번에 다시 추가 10%를 삭감당했다. 한 외주제작사 대표는 “외부 협찬 조건을 완화하는 대신 이전에 20% 내외를 뗐던 수수료를 이제는 50%나 떼겠다고 한다. 앞으로 외주제작사들은 협찬을 확보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빌 것이다. 공영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 같다”라고 비난했다.
KBS PD협회는 가을 개편과 관련해 프로그램 폐지와 출연진 하차에만 주안점을 두고 있을 뿐 정작 개편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없다는 점을 비판한다. 김덕재 PD협회장은 “<바람의 나라>를 기획했던 드라마기획팀 이강현 선임PD(전 KBS PD협회장) 등 사장 직속으로 정책 기획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정연주 전 사장의 측근’이라며 다 찍어내버려서 제대로 개편 전략을 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KBS 사원행동은 이번 가을 개편을 통해서 ‘이병순 사단’의 윤곽이 드러나리라 예상한다. 구세력이 이병순 사장을 등에 업고 ‘앙시앵레짐(구체제)’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꼽는 대표적인 구세력은 ‘호돌이’라 불리는 학도호국단 출신 특채 기수다. 군사정권 시기에 학도호국단 특채를 통해 KBS에 들어온 보수적인 중견 사원들이 무리한 MC 밀어내기의 숨은 힘이라는 주장이다.
KBS 사원행동 소속인 한 PD는 “큰 문제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한 아나운서를 ‘정연주 사람’이라고 공격하며 마구 흔들고 있다. 그런데 대체 인물로 언급되는 사람은 이전에 비리와 스캔들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안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KBS 가을 개편안의 전반적인 특성은 ‘프로그램 연성화’라 할 수 있다. 1라디오가 뉴스시사 전문채널에서 종합정보 채널로 바뀌고, <시사 투나잇> <미디어 포커스>가 사실상 폐지되며, <단박 인터뷰>가 미담을 전하는 <느티나무>로 바뀌고, <대한민국 일요일밤> <국민소통 버라이어티 뉴스왕> 등 연성 토크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정연주 사장 시절 KBS는 ‘친정연주 세력’과 ‘반정연주 세력’이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제 이 전선은 ‘반이병순 세력’과 ‘친이병순 세력’으로 이름을 바꾸어 또 대립한다. 현재의 대립 양상은 정연주 사장 시절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KBS 내부 구성원들은 이런 분열이 프로그램 질 저하로 이어질까 염려하고 있다. ‘국민의 방송’이 ‘정권의 방송’으로 바뀌는 와중에 겪고 있는 KBS의 성장통은 더욱 심해지리라 보인다.
이런 사내 갈등의 한가운데 있었던 라디오본부장이 지난 10월29일 사망했다. 대통령 라디오 주례 연설 편성 문제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그는 대통령 라디오 연설이 방송된지 사흘 뒤에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2주일 만에 지병인 간경화로 사망했다. 직접 사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KBS 내외의 갈등이 망자에게 큰 짐이 되었으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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