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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세대 아이콘 100

고졸자에게 경제 위기는 더 가혹했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2. 10.

<독설닷컴>에서 화두를 던진
298세대론(386세대-88만원 세대)에 대해
호주에서 심선희님이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먼저 298세대론이
대졸자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따끔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꺼림직했는데,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다시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고졸자에게 더 가혹했던
10여년 전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은 '298세대론' 관련 글입니다.

2008/12/09 - [298세대 아이콘 100] - 1990년대의 추억을 담은 다섯 통의 편지
2008/12/07 - [298세대 아이콘 100] - 1996년 8월, 내 인생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298세대론)
2008/12/06 - [298세대 아이콘 100] -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의 잔상
2008/12/03 - [298세대 아이콘 100] -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



 

(글 - 심선희, 호주)


안녕하세요. 


다음에 떠있는 블로그 제목을 따라서 글을 읽어보니 바로 저의 세대이야기를 해주셔서 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대학교 위주로 글들을 써주셨더라구요. ^^


저두 대학을 뒤늦게 졸업을 했지만 실업계고 출신으로 IMF를 맞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김영삼 정부의 교육 정책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해주는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안사정도 있고 또 주변에 벌써 대학 나와서 노는 삼촌들도 보이고 그래서 인문계를 갈수 있는 성적에 불구하고 서울에서 1, 2위권에 있는 여자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됩니다.


그 학교는 제가 3회 졸업생일 만큼 나라에서 실업계고 육성을 위해 엄청난 돈을 부어 만든 학교였죠.


학교 과정은 그 당시 한참 유행한 "전산고등학교"였습니다(후에 정보통신고로 변경이 되었더군요). 


대부분의 커리큘럼은 과거의 주산, 회계에서 벗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전산기초 이론에 관한 것들 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여상이나 상업계 고등학교들이 이때쯤(90년대 초반) 이름들이 하나둘씩 전산고등학교나 정보고등학교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쯤 되자 산업인력이 모자랐는지 김영삼 정부는 실업계고등학교를 대상으로 2+1제도를 신설합니다.


2년은 학교를 다니고 마지막 3학년은 산업체로 보내져 싼 임금에 노동력을 착취(?)하는 제도였죠.. 한마디로 인턴제도였던 것입니다..



사진에 나오는 기업은 본문에 나오는 S기업과 상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S대기업과 연계가 되어 있어서 한 반 전체가 S그룹에서 교육을 받고 나중에 각 계열사로 뿌려져 일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제가 들어간 회사는 보험회사였는데 그 당시 5년차 언니가 해줬던 말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학교 안가고 그래서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나이 들면 많이 후회하게 될꺼다"라고.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졸업식 날 제일 많이 우는 애들도 우리반 애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사회의 쓴맛을 먼저 맛본 것이죠.


96년도는 우리가 졸업하고 정식으로 직원이 되었던 해였습니다.


그 당시 기억하는 건 기업들이 초호황으로 인해 인력이 모자랐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96년을 전후하여 참 많이 올랐었고 기업들이 사원들에게 복리후생같은 것도 참 많이 뿌렸던 것 같습니다.


일명 샴페인을 일찍 터트린 시기였죠.


일례로.. S그룹 회장님이 IOC 위원 당선이 되시 마자 S그룹 직원들에게 그 당시 시가로 약 50만원 정도 하던 자동카메라가 한대씩 뿌려졌었습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나오는 선물들.. 그 당시만 해도 IMF는 정말 달나라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정식 입사한지 2년도 안 되는 시점에 IMF가 터져 버립니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제가 부서의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신문을 우편함에서 가지고 팀장님 책상과 팀원 회의실 자리에다가 옮겨놨는데 정말 나라가 망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잘 몰랐지만 나이 드신 과장님과 팀장님의 얼굴들은 모두 굳어져 있더군요.


실질적으로 IMF 가 터진 건 97년 12월이었지만 회사가 느낀 IMF는 그보다 좀 늦은 98년 4월부터였습니다.


슬슬 명퇴 이야기가 나오고 실적 안 좋으신 영업지점장이 짤렸다는 소리가 들리고..


암튼 그 당시 직장 다니던 사람들의 IMF는 98년 봄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험회사에 있다 보니 여러 고객님들이 있는데 그 당시 IMF 터지고 엄청난 고금리에 좋아하시던 분들도 많이 봤습니다.


은행도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았지만 7년 이상 묵혀두면 비과세가 되는 보험 특성상, 정말 돈 많으신 분들은 저축성 보험으로 많이 몰렸었습니다.


저는 실제 보진 못했지만 어느 영업소 여사원은 고객이 자루로 현금을 들고 와서 돈을 입금시키는 바람에 그거 세느라고 새벽에 집에 갔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돈 있던 사람들한테는 IMF는 분명 기회의 시기였죠..


98년.. 당시 저는 산업체 전형으로 야간대에 붙은 대학 새내기이기도 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형편의 친구들(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집안 사정상 실업계 고등학교를 갈수 밖에 없었던..)도 다 각자 회사에서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저를 비롯해 비슷한 나이의 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희망퇴직을 하고 공부에만 전념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희망퇴직....퇴직을 희망한다. 그때 퇴직을 희망했던 사람이 있을까요?  


20대 초반에.. 나라에서 제시해줬던 고졸인력의 찬란한 미래는 단지 희망이라는 걸 너무나도 빠른 시간 안에 깨닫게 되어버린 거지요.


그리고 IMF가 터지면서 영어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됩니다.






그래서 지금 한창 인기 있는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이때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하죠.


저를 비롯한 많은 학교 동기들이 하나둘씩 호주에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000년 이후부터 호주관련 까페들이 생기고 많은 ‘워홀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구요.


저두 워킹홀리데이를 기회로 지금은 호주에서 영주권을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요.


아마 2000년 전후에서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호주로 밀려오기 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은 호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라 호주 브리스번 퀸스트리트 한복판에서 봤었습니다.


아직도 감동으로 기억나는 TV 아나운서의 말은 "잠시 응원을 감상하시겠습니다"였습니다.


한목소리로 부르짖는 "대~한민국" 소리가 여기 호주 아나운서가 듣기에도 참 소름끼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나봅니다.


96년부터 2002년까지 제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썼지만.. IMF를 전후한 저의 20대 초반은 저에게 참 많은 경험과 세상의 무서움을 알게 해준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한번 회사 들어가면 평생 다닐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학벌 장벽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돈 있는 사람은 이런 위기 때 돈 번다는 것을 정말 몸으로 깨달았고, 영어를 못하면 정말 이젠 밥 먹고 못사는구나를, 깨닫게 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취업했던 학교 동기들이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제 글 블로그에 게재해 주시면 M전산여고 3학년8반 학생 좀 찾아주세요.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호주에서.



주> 심선희님이 졸업하신 학교는
미림여자전산고등학교(현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로 추정됩니다. 
3학년 8반 분들은 댓글 주시면, 심선희님과 연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