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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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며,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으며 고재열(<시사IN> 기자) 사람은 때로 쓸데없이 용감할 때가 있다. 내가 그랬다. '시사저널 삼성기사 삭제 사건'을 접하고 나는 갑자기 용감해졌다. 기자들이 파업하는 동안 발간된, 이른바 '짝퉁 시사저널'의 기사에 대해 '이것이 기사면 파리가 새다'라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리고 회사로부터 무기정직을 당했다. 사람들은 내가 '무지 정직'한 탓이라고 위로했지만, 곧 금창태 사장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이 날아왔다. 사람들은 때로 위험할 정도로 용감할 때가 있다. 우리가 그랬다. '시사저널 삼성기사 삭제 사건'을 접하고 시사저널 선배와 후배들은 위험할 정도로 용감했다. 사장이 편집국장도 모르게 기사를 뺀 것에 대해, 편집권은 편집인의 전유물이고, 그래서 편집권 독립을 위한 파업이 불법파업이라는 사장의 말에 대해 우리는 몸을 던져 항의했다. 집회와 시위로 수많은 날들을 거리에서 보냈다. 파업을 했고 단식을 했고 결국은 함께 사표를 냈다. 직장폐쇄를 당한 후, 우리의 편집국은 거리였다. 시사저널 편집국 앞에 천막으로 만든 거리 편집국, 프레스센터의 언론노조 회의실, 용산의 노조 사무실, 방송회과의 방송노조 사무실. 심상기 회장의 북아현동 집앞 농성장까지. 지금의 시사인 편집국을 얻기까지 말 그대로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지냈다. 정치부 기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서대문구-중구-용산구-양천구-종로구, 선거구만 5곳을 옮겨 다녔다. 사무실을 옮길 때마다 브레히트의 시구절.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 신으면서...'를 '신발보다도 더 자주 사무실을 옮겨 신으면서...'로 바꿔서 읊조렸다. 용감한 투쟁의 시간이었지만, 기자로서 소모적인 시간이었다. 정치부 기자로서 가장 큰 장인 대선장에서 나는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대선 12개월 전, 파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선 8개월 전, 퀴즈 프로그램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다행히 운이 따라 퀴즈 영웅에 올라 2천만원의 상금을 받아 아내에게 생활비도 주고 노조에 투쟁기금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대선 4개월 전에는 그림을 파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시 기자일을 하기 위해 나는 기자로부터 멀어졌다. 참으로 험난한 시간이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제목을 조금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파업기간 동안 가장 수난을 당한 이는 옷의 단추들이었다. 구사대 직원들과 밀고 밀리며 멱살을 잡히는 동안 옷의 단추들이 무시로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단추를 옷의 탓으로 돌렸고 아내는 알고도 조용히 속아주었다. 선배 후배들과 함께 사표를 내고 나오던 날 조용히 혼자 되뇌었다. '이제 옷에서 단추 떨어질 일 없겠군' 사람이 쓸데없이 용감해졌을 때,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집단적으로 용감해졌을 때, 그 가족들은 생계가 힘들어진다.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한 선배는 집에 있는 에어컨을 내다 팔았다. 다른 선배는 에어컨을 경품으로 준다는 라디오 프로그램 사연 공모에 응모해 기어이 에어컨을 타내 그 선배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인터넷에 팔며 사람들을 미혹시켜 그림을 팔아 창간 기금을 마련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우리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라고. 멋진 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신매체 창간까지 거쳤던 그 험난했던 시간들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우리가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을까? 우리 중 몇몇은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외면하겠다. 정의의 저편에 서서 그저 묵묵히 지켜보겠다.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 보도를 보면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인질의 숫자였다. 23. 파업 기자들의 숫자와 일치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배형규 목사가 살해되고 심성민씨가 또 살해되었다. 다행히 2명이 풀려났고, 곧이어 19명도 풀려났다. 우리에게 남은 숫자는 이제 20이다. 그동안 3명이 이탈했다. 아니 낙오했다. 파업 과정에서 한 명이, 파업을 마치고 창간 과정에서 두 명이 떠났다(그 중 한 명은 짝퉁 쪽으로 가서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그들이 떠나도 우리는 붙들지 못했다. 남은 스무명의 '철없는' 기자들이 모여서 함께 <시사IN>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행복하다.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기자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전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아직 세상이 그 정도로 병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실패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세상이 우리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스무명의 기자들이 왜 그랬는지를. 왜 고재열 기자의 옷에 단추들이 자꾸만 떨어졌는지를 채식주의자 김은남 기자가 채식까지 끊으며 단식을 해야 했던 사연을 한반도 전문기자 남문희 기자가 투자 유치 팀장으로 변신한 까닭을 노순동 기자가 기사가 아닌 보도자료를 쓰는데 지쳐야 하는 이유를 문정우 기자가 누이들에게 생활비를 받아야 했던 이유를 백승기 기자가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한 까닭을 신호철 기자가 사비를 털어 정명석 중국 현지 취재를 떠나야 했는지를 안은주 기자의 똑똑한 딸 지민이가 매일밤 찐빵을 데워먹고 혼자 놀다 자야했던 사연을 안철흥 기자가 금창태 사장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것을 후회하는 까닭을 안희태 기자가 에어컨을 팔아서 생활비를 대야 했던 까닭을 양한모 기자가 ‘시사저널 편집국’ 푯말을 들고 나온 사연을 동화작가 오윤현 기자가 난데없는 사업계획서를 만든 이유를 유옥경 기자가 6개월 동안 시위용품만 디자인해야 했던 사연을 시사저널 훈남 윤무영 기자가 집에 와서 싸울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연유를 이숙이 기자가 한 송이 국화꽃을 들고 대성통곡한 이유를 이정현 기자가 미술기자에서 카메라 감독으로 변신해야 했던 사연을 갖가지 징계에 시달린 장영희 기자가 끝내 금창태 사장을 고소해야했던 이유를 정희상 기자가 욕심쟁이 만화유통업자 집 앞에서 풍찬노숙 해야 했던 까닭을 주진우 기자가 회사 측이 고용한 용역 건달과 싸워야했던 이유를 차형석 기자가 거리의 사회자로 재탄생해야 했는지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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