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 5일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고, 그 뒤 6개월 동안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만들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고재열 기자는 현직 <시사저널> 기자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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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8월 삼성 기사가 삭제된 <시사저널>(왼쪽))과 기자 파업 이후 지난 1월 8일 발행된 <시사저널>(오른쪽). |
ⓒ 시사저널 |
1월 8일, 처음으로 내 이름이 빠진 <시사저널>을 받아들었다. 입사 8년차,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책을 들고서도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도저히 책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에는 단 한 명의 기자 이름도 올라 있지 않았다. '발행인 겸 편집인 금창태'의 이름만 실려 있었다.
<시사저널> 899호는 금창태의, 금창태에 의한, 금창태를 위한 <시사저널>일 뿐이었다.
내 이름이 빠진 책, 넘길 용기가 없었다
이른바 '시사저널 삼성기사 삭제 파문'으로 알려진 시사저널 사태는 언론사 편집권의 귀속 문제에 대한 것이다. 편집국 기자와 팀장·취재총괄팀장·편집국장 모두의 판단을 거쳐 실었던 삼성 기사를 금창태 사장이 인쇄소에서 편집국 몰래 빼내 문제가 되었다.
기자들이 문제제기를 하자, 금 사장은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 항의하는 기자들에게 '징계 폭탄'을 내렸다.
그리고 <시사저널> 899호는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는 금창태 사장의 신화를 온전히 실현시킨 책이었다. 1월 5일부터 파업에 돌입한 시사저널 기자들은 이 책의 제작에서 완전 제외되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이 책의 제작 과정에서 금 사장은 실질적인 편집국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외고 섭외도 직접 하고 마감을 독려하는 등 일선에서 투혼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시사저널> 899호는 우리 언론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책이 될 것이다.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편집인이 전권을 행사하며 제작된 책이기 때문이다. 편집권의 배타적 소유자인 금 사장과 대체 인력으로 고용된 비상근 편집위원,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일부 유령기자(공식 임명 절차 없이 책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다)들이 만든 이 책은, 경영진이 편집의 전권을 휘둘렀을 때의 패악을 드러내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다 빼놓고 커버스토리만 살펴보도록 하자. 899호의 커버스토리를 누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썼는지만 살피면 금 사장이 믿는 신화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다.
899호 커버스토리 '노무현, '2012년 혁명’을 꿈꾼다'는 6쪽 짜리 기사는 시사저널 비상근 편집위원이자 여론조사분석 전문가인 김행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담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정몽준에게 줄섰던 정치인, 언론계 컴백
먼저 '누가 썼나'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2002년 대선 이전까지 김행은 <중앙일보>에서 여론조사 팀장 및 조사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여기까지는 문제없다. 문제는 2002년 대선에서의 행보다. 당시 김행은 대선주자였던 정몽준 의원에게 줄을 섰다. '국민통합21'의 대변인을 맡으며 현실정치에 몸을 완전히 담근 것.
현실 정치에 몸담근 언론인, 특히 대선주자에 줄을 댄 언론인은 다시 언론계에 기웃거리지 않는 것이 우리 언론계의 불문율이다. 비록 모시던 주군이 대선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곡필아세'를 반성하고 '부역 언론인'으로서 어떻게든 그 바닥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지, 언론계를 기웃거려 물을 흐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언가의 법도다.
그런데 이 미풍양속을 저버리고 금 사장은 김행에게 손을 내밀었고 김행은 그 '썩은 동앗줄'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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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오전 서울 중구 충정로 시사저널 편집국. 기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무엇에 대해] 주군과 결별한 노 대통령, 많이 밉구나
다음 '무엇에 대해 썼나'를 보자. 자신의 주군이었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과 결별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썼다.
결별 이후 김행을 비롯한 '국민통합21' 관계자들은 '정치유민'이 되어 정치권에서 집단 퇴출됐다. 김행에게 노 대통령에 대한 구원(舊怨)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천국 문 1m 앞에서 입장권이 무효된 느낌이었을테니, 피해의식을 갖지 않았을까? 김행이 노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쓴다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정치보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이런 김행의 피해의식은 기사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노무현 2012년 혁명을 꿈꾼다'라는 중립적인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곳곳에 노 대통령에 대한 깊은 반감을 드러낸다.
"극한 상황에서 동물들은 종족보존 본능에서 사정을 한다…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정자(精子)를 남기고 싶어한다"며 매우 우아하게(?) 시작한 이 기사는 곳곳에서 노 대통령을 할퀸다. 김행은 자신의 적의를 굳이 행간에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나는 제 정신이다'라고 진단했다. 노 대통령은 과연 그의 말마따나 '제 정신'일까, 아니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것일까. 만약 당신이 그렇게 본다면, 아주 순진하다."
"그런데 '먹고 사는 문제'에서만은 진보 개혁 세력으로 통칭되는 운동권 출신 집단이 철저히 무능했다. 게다가 부패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일단, 정권을 내주는 것이 순리다."
"당의 고문으로 남을 수도 있고, 쪼그라든 정당 형태로라도 전국에서 2~3% 정도 지지율을 얻은 후 전국구로 진출할 수도 있다. 여차하면 고향인 봉하 마을에서 기초의원이라도 할 사람이다."
"지난 2002년 대선도 따지고 보면 천운과 개혁당 세력·노사모라는 소수 세력만으로 잡은 정권이다. 그들의 무기는 오직 기득권에 대항하는 민중 동원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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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측 주도로 만들어진 <시사저널> 899호(2007.1.16일자)가 9일 오전 서울 중구 충정로 시사저널 편집국에 놓여 있다.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어떻게] 관심법으로 쓴 기사... 기사수업 해줘야겠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썼나'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의견은 분명하다. 단언하건대, 이것은 기사가 아니다. 이것이 기사라면 파리가 새고 모기가 차세대 전투기다.
나는 이 기사에서 취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글쎄 궁예가 썼다는 '관심법'으로 노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어 썼다면 모를까, 기사의 구성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원한다면 나는 김행을 위해 기자 수업을 해줄 용의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그에게 기사와 잠꼬대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기사와 관련해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바로 이 기사는 <시사저널>에 실렸던 기사라는 점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지난 891호 <시사저널>에 내가 쓴 '친노무현 세력의 차차기 집권 시나리오'라는 기사와 대동소이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891호 기사는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쓰여졌고, '대통령의 정액' 같은 고상한 표현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899호 편집 과정에서도 이 사실이 환기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굳이 왜 '복제저널'을 만들었을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노 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을 '부관참시'한 이유가 무엇일까? 부적절한 기자가 부적절한 주제에 대해서 부적절한 방식으로 기사를 쓰는데, 데스킹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발행인 겸 편집인'이 이에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는 금 사장의 잘못된 믿음이 이 '불량상품'을 낳은 원흉이라 할 수 있다.
내 기사 베낀 복제저널... 금창태의, 금창태에 의한, 금창태를 위한
듣자 하니, 금창태 사장은 899호 편집을 마치고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자 정신이 실종된 899호는 나에게 '짝퉁 시사저널'일 뿐이다. 국회에서 만난 취재원들의 899호에 대한 반응은 나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시사저널 기자가 만들지 않은 유일한 <시사저널>이어서 소장 가치가 있으니 한 부 달라는 것이었다.
제발 꿈이었으면. 요즘 시사주간지가 논술교재로 인기라는데, 편집자의 편견으로 얼룩진 899호가 그들에게 끼칠 해악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가 좀 흥분한 것일까? 흥분했을 것이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 사장에게 <시사저널>은 단순한 밥벌이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내 청춘의 가장 큰 도막을 통째로 갖다바친 <시사저널>은 내 존재 그 자체이다.
<시사저널>이 명품 시사주간지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이렇게 부끄러운 책을 만들지는 않았다. 척박한 언론환경 속에서도 <시사저널>이 '강소매체'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의 자유만큼 언론의 책임을 생각한다'는 창간정신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짝퉁 시사저널'은 이같은 기자정신을 짓밟은 폭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금 사장이 어서 빨리 정도언론의 길에 동참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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