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대선의 기억, "확신범들은 아름다웠다"
2007년 5월17일, 경의선과 동해선 두 남북횡단 열차의 시험운행이 있던 날 탑승자 명단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탑승을 못해서 말이 많았던 사람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였고 탑승을 해서 말이 많았던 배우 명계남 씨였다.
잔칫날 누가 열차를 타고 누가 못 타고가 그리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명계남 씨가 탄 것에 시비가 붙은 것이 흥미로웠다. 대표적인 친노 연예인인 명 씨에 대한 보수언론의 견제가 노무현 정부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계남과 문성근, 연예인 정치참여 새 장 열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끌며 배우 문성근 씨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명 씨의 활동은 연예인의 정치 참여에 새 장을 열었다.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정권교체의 과실을 먹지 않고 끝까지 ‘무관의 제왕’으로 남는다면 연예인의 정치 참여에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이 둘의 무욕(無慾)은 연예인들이 선입관의 부담 없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명 씨와 문 씨가 좋은 전례가 된 덕분인지 2002년 대선에서 연예인들의 활약이 남달랐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탐하는 연예인은 없었다. 17대 국회가 유난히 초선의원이 많았던 것을 감안할 때 이런 결과는 상당히 의외다. 연예인과 가까운 이력을 가진 국회의원으로는 아나운서 출신인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과 한선교 의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연예인으로서 명 씨와 문 씨는 노무현 정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공’은 나누지 못한 반면 ‘과’는 나눴기 때문이다. 친노 연예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면서 이들의 연예 활동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꼬리표가 야기하는 편견의 벽을 넘어 다시 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둘은 상당히 애를 먹었다.
정권교체 이후 행적뿐만 아니라 선거에서의 역할에서도 둘은 고무적이었다. 지금까지 선거에서 대부분의 연예인은 좋은 이미지로 얼굴마담 역할을 하거나 유세 현장에서 치어리더 역할을 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명 씨와 문 씨는 달랐다. 이들은 얼굴이 아니라 머리로 노무현 후보를 도왔다. 문성근은 탁월한 연설능력으로, 명계남은 조직 구성 능력으로 선거에 기여했다. 연예인이 선거에서 정치적 주체로 본격 참전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탤런트 권해효 씨와 가수 신해철 씨의 역할도 복기해 볼만 하다. 이들은 탄핵반대 집회에서 거리의 사회자와 거리의 가수로 나서서 노무현 대통령의 구원투수가 되었다. 이는 연예인의 정치참여와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애프터서비스였다.
2004년 3월20일,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열린 ‘탄핵무효 부패정치청산 민주개혁 완성을 위한 1백만인 대회’에서 권해효 씨는 사회를 보았고 신해철 씨는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 둘을 비롯해 개그맨 노정렬 씨, 배우 오지혜·홍석천 씨, 가수 정태춘·박은옥·안치환·권진원 씨, 록그룹 블랙홀, 신세대 가수 서문탁·조PD·BMK 등 연예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행사 사회를 본 배우 권해효 씨는 당시 기자에게 “이번 탄핵 정국을 ‘친노 대 반노’로 보지 말아 달라. 지난 3월12일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이제 국민의 힘으로 다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워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이고 ‘상식 대 몰상식’의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을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연예계도 대선 열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당시 연예가에서 화제를 모았던 것은 ‘연예인 정당별 지지성향’이라는 문건이었다. 1997년 대선 무렵 SBS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인데, 유명 연예인 100여 명의 지지 성향이 적혀 있었다. 자신을 SBS PD라고 밝힌 필자는 연예인들의 평소 언행을 분석해 정당별 지지 연예인 명단을 올렸다. 개그맨, 아나운서,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로 분류되어 있는 이 명단은 나중에 한 고참 방송작가가 의견을 보태 2002년 판을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인기있는 연예인에 집착하는 정치인들
각 후보 진영에서 인기 연예인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후보들은 의식 있지만 인기 없는 연예인 보다 의식이 있건 없건 무조건 인기 있는 연예인에 집착했다. 그것이 선거판의 법칙이었다.
정치인들의 연예인 구애에서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몇 장면 있다. 2002년 2월9일, ‘god·신화의 미아찾기’ 공연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민주당 이인제 고문은 확실하게 아부했다. god가 “세계를 제패하기 바란다”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이날 방문을 통해 당시 젊은층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그룹 god와의 친분을 과시한 이 고문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2시간30분 동안 자리를 지켰다.
노무현 후보의 모습도 이인제 후보와 다르지 않았다. 월드컵을 통해 국민가수로 부상한 윤도현 씨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당시 노 후보 측근들은 백방으로 애를 썼다. 공연장을 찾아 대기실을 찾아가 지지 의사를 받아냈다. 지지를 하기는 했지만 윤 씨는 노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지지 태도를 유지했다. 탄핵반대 집회에서도 주변에서 참여를 종용했지만 노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집회에서 공연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2002년 연예계는 대선 열기로 뜨거웠다. 정치가 연예계를 달구는 모습은 우리 연예계가 할리우드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 동원된 연예인 규모는 톰크루즈, 스티븐 스필버그, 멜 깁슨, 브루스 윌리스, 아널드 슈워제네거, 로버트 드 니로, 바브라 스트라이젠드, 찰턴 헤스턴, 우피 골드버그, 마이클 무어, 오프라 윈프리 등이 참전했던 2004년 미국 대선을 능가했다.
전체적으로 2002년 대선 당시 연예계 판세는 ‘친노무현계’ 보다 ‘친이회창계’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문성근·명계남·권해효·박광정·방은진·오지혜·공형진(배우), 이창동·임순례·이현승·이민용·여균동·류승완(감독), 전인권·이은미(가수) 등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고, 사미자·양택조·한진희·임채무·전원주·박철·김나운(탤런트), 구봉서·배삼룡·배일집·배연정·이용식(코미디언), 심현섭·강성범(개그맨), 현미·한명숙·김수희·설운도·신성우·박상민·탁재훈(가수) 등이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민주노동당 지지 연예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어렵게 배우 문소리 씨가 민주노동당 지지 연예인이라는 풍문을 듣고 기사화 하려는데 본인이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특히 <오아시스>에서 함께 작품을 했던 이창동 감독이 대표적인 친노 문화인이어서 그런지 문 씨는 기사화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녀는 기사화하면 앞으로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는데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학번도 같고 해서 드물게 친한 연예인이었는데 이후로 문 씨와의 인간적인 관계는 끊겼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이회창 대세론
이회창 대세론은 연예인들의 지지 행태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2002년 11월6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는 분(화장품)향기가 진동했다. 당사 10층에서 열린 ‘직능특위 예술인 홍보단’ 발대식에 연예인과 문화예술인 8백여 명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복도까지 연예인으로 꽉 찬 모습이 마치 방송국을 통째로 한나라당 당사 안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너훈아 조영필 같은 밤무대 이미테이션 가수를 비롯해 8등신의 젊은 모델들까지 각 분야 연예인들이 진한 분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양으로는 친이회창계 연예인이 친노무현계 연예인을 압도했지만, 질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직능특위 예술인 홍보단’에 참석한 몇몇 연예인에게 물어봤더니 그날 행사가 무슨 자리인 줄도 모르고 온 연예인이 태반이었다. 한 행사장에서 이회창 총재가 그룹 베이비복스의 호위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적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이 후보의 지지율 제고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연예인들을 선거 캠페인의 사선에 내보내기 위해 열심히 선전선동 했다. 당시 이재오 의원은 식전 연설을 통해 “정권이 바뀌니 방송에서 사투리도 바뀌었다”라며 연예인들을 부추겼고, 서청원 대표는 축사를 통해 “이 정권 때문에 연예인 출연에도 형평성을 잃어 피해를 본 연예인이 있다”라며 연예인들의 피해 의식을 자극했다. 이는 당시 내가 내 귀를 의심하며 현장에서 받아 적었던 말이다.
선전선동에 현혹된 탓이었을까. 이날 연예인들은 아름답지 못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이회창 총재와의 면담이 끝나고 난 뒤 한 트롯트 가수와 한 중견 코미디언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중견 코미디언의 불만은 그 트롯트 가수가 아부를 너무 독점해서 다른 사람은 아부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날 충분히 아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연예인들은 TV토론을 위해 방송사를 찾은 이회창 총재를 위해 방송사 정문 앞에 차량 무대를 설치해 놓고 환영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연예인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사람들은 KBS <개그콘서트>에서 주가를 올리던 개그맨들이었다. 기획사 사장이 ‘직능특위 예술인 홍보단’에서 작위를 받으면서 기획사 소속 개그맨들이 전부 이회창 지지 활동을 했다.
이들은 후에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정치 분쟁을 일으켰다. 자신들이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출연을 못하게 된 것이 “친노무현 연예인인 윤도현이 자신들의 출연을 막아서”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치공세에 윤도현 씨는 “가수들을 위한 유일한 라이브 프로그램인데 개그맨 캐롤송 홍보를 위해 무대를 내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반대했다”라고 해명했다. 나중에 캐롤송 음반 제작에 관여한 방송사 간부의 압력이 있었음이 알려지면서 이 논쟁은 싱겁게 종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치권에 철새가 많은 것처럼 정치에 관여하는 연예인 중에서도 철새가 많다는 점이다. 정몽준 후보를 지지했던 몇몇 연예인은 후보 단일화 이후 빠르게 이회창 후보 지지 쪽으로 말을 갈아탔다. 얼마 전 기자는 정몽준 후보와 오빠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던 한 연극인이 손학규 전 지사에게 차기뿐만아니라 차차기까지 지지하겠노라고 아부하는 모습을 바로 옆자리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철새 중에서는 긍정적인 철새도 있었다. 정태춘 씨와 같은 경우는 소신 있는 철새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애초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정씨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이견을 이유로 민주노동당 지지로 돌아섰다.
연예인 정치인 지지 세 유형
2002년 대선 당시, 문화부 소속이었던 나는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후보를 각각 지지하는 연예인으로부터 지지사를 받아 지면화하는 기획을 맡은 적이 있다. 지지사를 보내준 연예인은 심현섭(이회창) 권해효(노무현) 손지창(정몽준)이었다. 이 셋의 지지 이유는 연예인이 정치인을 지지하는 세 가지 양상(정치참여, 정책적 지지, 인간적 지지)을 대표했다.
직접 만났던 심현섭 씨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이었던 집안 내력을 소개하며 본인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연예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권해효 씨는 가장 절절한 지지사를 보내왔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더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그는 지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밝혔다. 그의 지지이유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확신범이었던 것이다.
손지창씨는 정몽준 후보와 개인적인 인연을 강조하는 글을 보내왔다. 글의 요지는 자신이 접한 정 후보는 상당히 괜찮은 인물이고, 그래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인간적인 지지로 동조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세 가지 지지 방식 중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바람직한 것을 꼽아보라면 확신범 모형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통령을 추천하는 일이라면 인간적인 인연이나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 이유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올해 대선과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는 연예인은 탤런트 유인촌 씨다.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맡았던 그는 이명박 전 시장의 핵심 문화 참모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 전 시장 역할을 하기도 했던 그는 이 전 시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경우 문화관광부 장관 영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명계남 씨나 문성근 씨처럼 얼굴이 아닌 머리로 역할을 하고 당선 후 백의종군 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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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정치인' 코너는
연예인과 정치인을 비교해보는 코너입니다.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를 통해서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산다는 점에서
둘은 무척 닮았습니다.
- 전지현 대 박근혜
- 킹메이커 정두언 대 퀸메이커 정훈탁
- 2세 연예인 대 2세 정치인
등의 이야기를 전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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