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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논객 열전/문제적 논객 변희재

비정규직 PD가 정규직 PD와 함께 싸우는 까닭 (독립PD 이성규)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1. 20.


방송국에는 보이지 않는
'방송 카스트제도'가 있습니다.
'스타'라는 예외적인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정규직 vs 비정규직이라는
엄연한 신분 차이가 존재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비정규직 스텝의 처우가 열악합니다. 
방송국이 생사여탈권 가지고 있어서
운신의 폭도 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언론장악 저지'를 위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정규직 스텝에 대한 섭섭함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섭섭함을 극복하고 대의를 위해 함께 깃발을 올리고 있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독립PD 이성규님이 비정규직 PD들의 이런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이때,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언급된 폭행 당사자분은 이번 기회에 공식 사과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남에게 얻어맞아도 될 만큼 잘못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2009/01/17 - [언론 총파업 중계실] - 독립PD가 변희재씨에게 드리는 제안 (이성규PD)
2009/01/06 - [언론 총파업 중계실/깨어나라 고봉순] - "내가 보신각 타종 행사 연출 PD였다면" (이성규, 독립PD)
2008/12/31 - [언론 총파업 중계실] - 노조 없는 독립 PD들도 언론노조 총파업 지지하는데...
2008/08/10 - [KBS 독립 특설링] - 우리는 정연주에게 당했다. 그러나 정연주를 지키겠다



독립PD에게 지금의 고난은 희망의 대장정이다
 


걔네들 노동자 아니에요. 세상에 다른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해고, 임금 결정의 권리를 갖고 있는 노동자가 어디있습니까? 자본가는 아닐지 모르나, 그렇다고 노동자도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죽은 노동이 살아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체제라면, 현재의 한국은 서류상 노동자가 실제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입니다.
 



 
이른바 외주 PD, 비정규 방송연출직 노동자인 후배 독립PD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다. 여기서 '걔네들'이란 방송사의 정규직 노동자를 지칭한다. 술 한잔 하며 이야길 나누는 사석이었기에 '걔네들'이란 단어가 나왔다. '걔네들'은 독립PD들이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를 지칭할 때 쓰는 은어다. 방송사의 직원들도 독립PD인 우리를 가리켜 '걔네들'이란 단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 '걔네들'이란 단어 속엔 계급적 적개심과 '멸시'가 동시에 담겨져 있다. 단지 어느 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적개심 혹은 멸시가 되는 것이다. 의식이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명한다. 외주제작PD로 통칭하는 독립PD들이 인하우스(방송사) 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쏟는 계급적 적개심은 결코 터지지 못한 채, 안에서 악취를 풍긴다. 즉 속이 곪아터지고 있는 것이다. 
  
 
"걔네들은 항상 말은 해요. '이해한다. 얼마나 힘들지 이해한다.' 그렇게 말을 해놓곤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게 걔네들이예요." 필자가 '그들과의 연대 투쟁이 지닌 중요성'을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후배들은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분노를 사정없이 날린다. 그들(방송노조)을 결코 노동자로 구분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서류상 노동자에 불과한 그래서 귀족이란 것이다. "선배도 알겠지만, 세상에 다른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해고, 임금 결정의 권리를 갖고 있는 노동자가 어디있습니까? 자본가는 아닐지 모르나, 그렇다고 노동자도 아닙니다." 우리안의 카스트다. 그것도 노동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는....    

 
3년 전 까지 하더라도 외주제작사의 종사자들이 겪는 현실적 고통을 잘 몰랐다. 돈은 없지만, 그저 혼자서 유유자적하며 독야청청 다큐멘터리 방송을 만들며 살아왔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창작자의 예술행위다"라며 말이다. 주머니에 돈은 없었지만, 그래서 늘 쪼들렸지만, 예술(?)은 원래 그렇게 가난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자조했다. 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여의도에서 나 홀로의 작업만 하다가, 후배PD들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 그게 딱 2년 전 이맘때다. 후배들이 처한 현실은 믿겨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내 현실은 특혜받은 매트릭스의 환타지였다. 파란 알약만을 먹으며 평화의 성찰을 했을 뿐이었다. 현장이라고 믿었던 현실과, 후배PD들로 매개되어 비치는 현실 사이에 엄청난 존재론적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철학적 충격이었다. 빨간 약의 충격은 생각보다 깊고 깊었다.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내 자신안에서 둥지를 틀어 고상한 척하는 위선과 위악을 향해 칼을 들었다. 그동안의 독야청청은 엄동설한 속에서 다른 이의 희생과 고통을 쥐어튼 허영의 푸르름이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다시 반성했다. 그러던 중, 후배PD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이 터졌다. 철저하게 소외된 죽음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든든합니다. 정글 같던 중학교 시절, 진정한 싸움꾼 고수를 곁에 둔 느낌... 딱 그 느낌입니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후배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싸움꾼으로 나서게 한 동기가 되고말았다. 결코 고수일 수 없는 어설픈 싸움꾼.  

 
노동자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에 대해 독설을 내 뿜었다. 짖었다. 생존을 위한 독설. 그러나 독설은 메아리가 차단된 허망한 외침에 불과했다. 분노는 하면서도, 그걸 짖는 이는 적은.... 그것은 단결조차 할 수 없는 약자의 두려움이었다. 

 
그들(방송사의 정규직 노조)은 이해한다면서 다독이는 척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 방송인들의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방송노조의 좌장격인 모PD가 외주제작사 PD를 폭행했을 때도 모른 척 했다. 오히려 일부는 "맞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맞았을 것이다. 외주 애들 요즘 버릇이 없다." 늘 이런 식이다. 폭행의 가해자인 그는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 여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런 일은 보수건 진보건 양쪽 모두에게서 자행된다. 



 
며칠 전, 집회에서 폭탄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사회자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영화 제목이 생각나네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랬다. '갑'의 숱한 일을 알고 있다. 이 땅의 비정규직 방송인이라면 알고 있는 그 수많은 것들을 그저 가슴에 담고 있다. 그것을 입밖으로 내는 건, 철저히 금지됐다. 우리끼리의 불문율이다. 


어쩌다보니, 양비론자가 되어가고 있다. 하나는 구조적 측면에서 충돌하는 몰상식과의 싸움, 다른 하나는 같은 상식을 지니고 있지만 태생이 다른 데서 오는 엄연한 차별. 그렇게 본다면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중의 적과 맞서고 있는 셈이다. 그 틈을 변희재 같은 보수적 논객(?)이 눈치를 채고, 우리를 향해 '방송노조의 노예'란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며 나오는 게다.  

 
전략적으로 한 놈만 조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한 놈만 붙들고 싸우다 보면, 우리들 안에서 다른 불만이 튀어나온다. 그 싸움을 우리들 안의 불만들이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처가 깊다보니 툭툭 튀어나온다. 같은 편이라 할 이들을 향해서 결국 짖어댈 수밖에 없게 된다. 언젠가는 그들도 달라지리라 막연하게 믿지만, 그런다고 현실적으로 그들이 달라질 리도 없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알고 있다. 단지 우리들이 형성하고 있는 전선을 내부적으로 집결시키기 위한 전략적 비판과 공격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양쪽으로 부터 견제를 받게 되는 형국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방송가의 비정규직 노동자인 우리가 갖는 이중의 딜레마다. 

 
우리는 정규직 노동자를 꿈꾸지 않는다. 단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처우 개선을 바랄 뿐이다. 상명하복의 갑과 을이 아닌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존중, 그리고 저작권의 문제 등등 말이다. 갑과 을은 분명히 그 태생부터 다르다. 그 태생이 지닌 어드벤티지를 인정한다. 그걸 우리가 부정하려 드는 건 결코 아니다. 노노간의 갈등을 조성하려는 의도 역시 아니다.


 


내가 계급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좋은 세상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세상이란 뭘까요? 나는 좋은 세상이란 인간의 좋은 본성, 즉 진정한 것을 좇고 다른 사람과 상호부조하며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잘 발현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급적 착취가 횡행하는 세상은 인간의 나쁜 속성이 훨씬 더 잘 발현되게 되어 있지요. 이기심과 탐욕, 경쟁, 물신숭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착취하는 소수뿐 아니라 착취 받는 다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인간들이 선이네 악이네 정의네 불의네 하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형국이 됩니다.

- 김규항의 글 <계급문제>에서 발췌



 
B급 좌파 김규항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문장 속에 드러난 일부만 놓고 본다면, 나로선 인용하기 적합한 문구를 발견하곤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자다. 동시에 부르조아 대의민주주의를 신봉한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다. 솔직하게 말하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설명할 정도의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막연한 공상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차별이 완벽하게 없는 사회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차별의 간격을 최대한 좁힐 수 있어야, 그 사회가 보다 생산적이며 인간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얼마전 있었던 'PD전국대회'에서 연예인 김재동씨는 강연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강연 요청을 받고 고민을 했어요. 어떤 제목을 달아야 하나 하고 말이죠. <영원한 을이 사랑하는 갑에게> 그런데 제목이 좀 아니라는 반응이 오더군요." 방송 출연자인 김재동씨에게도 갑과 을의 관계가 있었다. 우리가 겪는 갑과 을의 관계, 그리고 그의 갑과 을이 차이가 있다면, 그가 속한 을은 오히려 갑보다 큰 권력을 가진 존재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영원한 을이지만, 갑에게 사랑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방송가의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김재동과 같은 '을'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런 '을'의 위치라도 꿈꾸며 살 수 있는 희망은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의 방송 현실 속엔 그런 희망조차 없다. 그나마 그 희망을 싹 튀우기 위해 노력하는 싸움이 보이지 않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여의도에서 방송밥을 먹으며 일하는 이라면 누구나 안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언론미디어 관련법의 개정이 얼마나 조악스럽고 탐욕스러운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일부 보수 논객(?)들의 주장처럼, 그게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유혹처럼 보이는 달콤함은 그저 독이든 사과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많이 힘들다. 또 춥다. 많은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그렇지만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들의 밥그릇은 여전히 꿋꿋하다. 그 밥그릇을 나눌 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가 너무도 춥고 힘들다고 해서, 더 큰 악이 살짝 던져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을 순 없지 않은가? 더 큰 악의 노리개가 될 순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안의 적개심은 접어두자. 십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지금의 고난은 저들이 현재 장악한 성을 언젠가는 진군해 들어갈 수 있는, 바로 그 싸움을 준비하며 칼을 가는 대장정이라고 가슴 속에 묻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