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남 김현중이 토크쇼에 나와서
'가출했다가 재건축아파트 지하실에서 자고 나왔더니
자신이 잤던 동만 남겨놓고 전부 철거했더라.
하마터면 죽을 뻔 했더라.
집 떠나면 고생이더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꽃남 김현중이 죽다 살아난 재건축아파트가
잠실시영아파트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김현중이 이 근처에 살고 있고,
아파트에 대한 묘사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가운데 교회와 왼쪽 학교 사이에 섬처럼,
한 동만 생뚱맞게 서 있습니다.
(다른 재건축 아파트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잠실시영아파트단지에 한 동만 남았던 것은 그 동에 살던 한 세대가 끝까지 나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텼기 때문에 꽃남 김현중은 무사히 살아서 뭇언니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왜 나가지 않고 버텼을까요? 시공사와 재건축조합으로부터 무수한 압박을 받았을 것인데 그는 어떻게 견뎠을까요? 이 의문을 바탕으로 아파트단지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잠실시영아파트단지를 허문 자리에 잠실 파크리오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저는 이곳에 전세로 들어갔는데 입주자 홈페이지에 가입해서 들어간 뒤 이 최후의 한 동에 대한 단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등록할 때 꼭 기입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분양을 받은 조합원인지 일반 구매한 집주인인지 아니면 전세자인지 월세자인지 신분을 밝히도록 했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반상의 구분은 명확했습니다. 아파트 평수와 소유형태로 신분이 나뉘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새롭게 조성된 ‘파크리오촌’을 알차게 꾸미자는 구상이 많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단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성내역을 리노베이션해야 한다는 주장, 역명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법정동 명칭인 ‘신천동’ 보다 행정동 명칭인 ‘잠실4동’을 보편화 시켜야 한다는 주장 등 아파트단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었습니다(이런 노력 덕분인지 파크리오단지는 전국 아파트단지 중에서 시가 총액 1위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대단지의 이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파크리오단지의 가구 수는 6864세대로 서울에서 가장 큽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얼마 전 끝난 동대표 선거의 열기가 남아있었습니다. 동대표 선거는 경쟁률이 4대1인 동이 있을 정도로 제법 치열하게 치러졌습니다(물론 미달인 곳도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재건축조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축이 동대표에 많이 선출되었습니다. 일종의 ‘재건축조합 심판 선거’가 치러진 셈입니다. 이런 구도 때문에 재건축조합장인 고아무개씨가 317동 동대표 선거에서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입주를 기점으로 아파트단지에 '권력의 이동'이 일어난 셈입니다.
재건축조합에 대한 반대 여론 덕에 조합 반대파 대거 동대표 당선
재건축조합에 대한 성토 여론이 높았던 것은 재건축조합이 시공사와의 관계에서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고 보는 주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입주를 한 뒤에도 ‘난방비가 비싼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난다’ ‘지하주차장에 누수가 있다’ 등 문제점을 지적하는 주민이 많았지만 재건축조합은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던 박아무개씨는 222동/223동 동대표에 선출되었습니다.
지금은 주민들에게 성토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재의 재건축조합 임원들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선출된 일종의 재건축조합 비상대책위원회였습니다. 전임 조합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된 뒤 임시 총회를 통해 선출된 고 조합장은 출근길에 야구방망이로 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합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조합을 이끌어 왔지만 다른 대부분의 재건축조합 비상대책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마무리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도 소송으로 얼룩진 한 편의 재건축소설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파트입주자 중 재건축 조합 출신이신 분들이 이용했던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그 역사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전국 재건축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시공사의 재건축조합 길들이기가 이곳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보통 아파트 시공사는 별도의 부서를 두고 재건축조합을 관리합니다. 재건축조합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컨설팅사를 고용합니다. 컨설팅사를 매개로 해서 시공사와 재건축조합간의 정치적 해결이 이뤄집니다.
이때 쯤 일반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문제제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립니다. 파크리오 단지의 원주민이었던 잠실시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도 ‘우리재산지킴이’를 구성하고 시공사와 재건축조합의 협잡에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시공사에는 이런 ‘야당’에 대응하는 팀이 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통 시공사가 ‘여당’을 관리하는 방법이 ‘부패’라면 ‘야당’을 관리하는 방법은 ‘분열’입니다. 각종 이권을 바탕으로 분열을 획책합니다.
시공사와 조합과 조합 반대파의 갈등이 클라이막스를 맡는 지점은 보통 동호수추첨입니다. 시공사의 행패와 이를 제지하지 못하는 조합의 무능력에 불만이 쌓인 조합원들은 동호수추첨을 계기로 폭발하곤 합니다. 방식을 전자식으로 하느냐 수기식으로 하느냐, 무작위로 추첨하느냐 기득권을 보장하느냐를 놓고 혈투가 벌어지고 추첨이 끝나면 불복하는 사람들의 소송이 뒤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잠실시영아파트 재건축 조합원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다음카페와 네이버카페에 시공사와 조합의 행태를 비난하는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 졌지만 분산되어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은 소송이었습니다. 길아무개씨 경우 홀로 조합에 소송을 제기해서 재건축 과정의 부적절한 부분을 밝혀내고 승소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아파트 공사가 중단되고 다시 원상 복구 시키지는 않습니다. 일정한 보사을 받을 뿐입니다.
왜 재건축아파트 조합원들은 시공사의 봉이 되는가?
입주가 가까워지면 보통 시공사는 조합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추가분담금을 요구합니다. 여기서도 비슷했습니다. 조경공사 120억원, 저층부 고급 석재 부착 비용 155억원, 인터넷 속도 향상 사업 51억원 등 총 395억원의 추가 공사비용이 책정되어 세대 당 700만원 안팎의 추가분담금을 요구했습니다. 조합원들은 분담금에 항의했지만 안낼 수 없었습니다. 분담금을 주지 않으면 보통 아파트 열쇠를 받을 수 없고 열쇠를 받지 못하면 입주 전에 확장공사 등을 할 수 없어 불편해 집니다(파크리오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입주가 끝난 뒤 재건축조합이 시공사에 반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산소송 형태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산소송은 소송가액이 수백억원에 이르기도 합니다. 시공사들은 이런 정산소송을 피하기 위해 준공무렵 스포츠센터를 만들어주거나 설치형에어콘을 달아 주는 등 서비스를 베풀곤 합니다. 잠실시영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아직 이런 과정을 진행하지 않고 있어서 주민들이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재건축조합이 아파트단지를 관할하는 기간은 입주자대표자회의가 구성되기 전까지 6개월 정도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는 재건축조합이 선정한 위탁관리업체가 아파트를 관리합니다. 보통 이 기간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파크리오단지에서는 쓰레기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않아 아파트단지 곳곳에 쓰레기산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뉴스에까지 보도되었습니다.
이런 재건축조합에 대한 심판 선거 형식으로 동대표 선거가 치러진 뒤, 동 대표들은 밤마다 모여서 서로 성향 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입주자대표 선발에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입주자대표자회의는 아파트단지 관리에 대한 전권을 갖고 하자보수청구소송을 통해 시공사의 책임도 물을 수 있습니다. 반조합 세력의 구심이었던 304동 동대표 배아무개씨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득표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대표들의 이름이 색색의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성향파악을 한 것 같았습니다. 기존 재건축조합의 문제점을 묻자 그는 “재건축조합의 결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소유자들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라고 사자후를 토하며 재건축조합을 비난했던 그는 무난히 입주자대표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이 형성되었습니다.
국회의원도 무시 못하는 대단지 아파트입주자대표
입주자대표에 선정된 배아무개씨는 지역구 국회의원인 박영아 의원 측에 연락을 했습니다(역시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십니다). 저는 박 의원 보좌관과 이야기하다 입주자대표들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박 의원을 면담한 후 그는 입주자들의 민원사항을 제기했습니다. 입주자 3만명을 대표해 온 그에게 박 의원 측도 소홀히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박 의원은 공감하며 열심히 받아적었습니다. 그도 이 아파트 주민이었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원회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한강 고수부지로 갈 수 있는 자전거 진입로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는데, 역시 공감했습니다. 걸어서 산책하는 박 의원은 또다른 문제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성내천 길은 어두워서 밤에 여성이 산책하기 겁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마지막까지 허물지 못했던 그 동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아파트단지의 재건축 자체에 반대했거나, 재건축 과정에서 당한 불이익에 항의해서 그는 나가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재건축 과정을 역추적하면서 그 주인공을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존심 하나로 오롯이 버티며, 꽃남 김현중을 살리신 그 분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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