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사를 왔는데,
제가 사는 아파트단지 시가 총액이
전국 1위라고 하더군요.
(전세로 사는 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는 전세값이 올라 죽음입니다.)
시가 총액 전국 1위 아파트단지의
어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시사IN> 기사로도 썼습니다.
'강남아파트 로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아파트에 대한 논의를 좀더 진전시켜 보기 위해서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기사가 나간 뒤 전국의 아파트단지 재건축조합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데...
더 나을 것도, 더 나쁠 것도 없이, 문제가 닮아 있더군요.
아파트이야기를 보내주시면 함께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세값이 한 달만에 30%나 올랐다. 이런 추세라면 23개월 후에는 약700%가 더 오르게 된다. 대박이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못 버틴다. '이 아파트엔 산다'는 표현보다 '이 아파트에 살아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괴물이 하나 나타났다. 옛 잠실시영아파트 부지에 들어선 파크리오 아파트 단지가 바로 그 괴물이다. 39만7400㎡ 부지에 아파트 66개 동이 들어서 총 6864세대가 입주하게 된다. 규모로는 서울시에서 최대고, 아파트 단지 전체 시가 총액은 약 6조4000억원으로 인근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제치고 최근 전국 1위 단지가 되었다.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였다. 1970년대 중반 뽕나무밭이던 잠실은 아파트의 바다가 되었다. 그 아파트의 바다가 다시 30여 년 뒤 재건축을 거쳐 고층 아파트의 바다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주하기 시작한 인근 잠실 1단지(엘스, 5678세대)·2단지(리센츠, 5563세대)와 합쳐 재건축 아파트가 1만8000세대 들어섰다. 이 세 아파트 단지 때문에 서울의 아파트 값과 전세값이 들썩들썩했다.
‘파크리오’ ‘엘스’ ‘리센츠’. 서울에서 아파트를 사려던 사람이나 아파트를 옮기려던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한 번쯤 되뇌어보았을 것이다. 꼭 이 아파트를 사거나 이 아파트로 옮기려 하지 않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단지 세 개가 들어서면서 전세 공급량이 늘어나 역전세난이 일어났는가 하면, 제2 롯데월드 신축이 결정되면서 이곳 아파트 값이 상승해 서울시 아파트 값 재상승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 세 단지가 울리고 웃긴 사람은 아파트를 소유하거나 거주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세 단지는 불황에 시달리던 이사 업체들의 ‘산소호흡기’ 구실을 했다. 1만8000세대가 새로 들어서면서 이사 물량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세 단지에는 요즘도 벌집을 드나드는 꿀벌처럼 이삿짐 트럭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2009년 잠실은 '붏황 무풍지대'라 할 수 있다.
(1초 간격으로 찍은 사진이다. 219동-220동-221동 세 동 모두에서 이삿짐 차가 보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이사 행렬에 기자도 동참했다. 1989년, 처음 상경해 어머니와 단칸 셋방에서 살기 시작한 지 꼭 20년 만의 일이다. '한강이 잘 보이는 아파트만 잘 보이는 아파트'에 살기까지 15년이 걸렸는데, '직접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다. 그러나 아직 전세다. 이런 아파트를 살려면 몇 년이 더 걸릴까?
이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세값 하락 덕이었다. 아파트 가격과 전세가가 4배 가까이 차이 날 정도로 전세가가 폭락했다. 큰 평수일수록 전세난이 심해 집값이 2억5000만원 정도 차이 나는 26평형과 32평형의 전세가 차이는 1000만~2000만원이었다(그러나 입주하자 마자 전세값이 급등하고 있다. 이사오자마자 벌써 나갈 일을 걱정하고 있다. '이 아파트에 산다'라기 보다 '이 아파트에 살아본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전세값 커트라인이 낮아진 틈을 타 어렵게 강남에 입성한 낯선 강북 주민을 상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신문사 지국들은 전국 최고 수준의 경품을 내걸고 유혹했고, 통신사들은 이전에 사용하던 통신사에 해지 위약금을 물어주고 10만원을 더 주겠다고 호객했다. 우유 배달만 주문해도 자전거가 경품으로 나왔다. 6864세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트를 둘러싼 마케팅이 치열해지면서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업체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편물을 배달하면 이렇게 동마다 증거사진을 찍어 고객에게 보낸다고 한다.
신문사와 통신사뿐 아니라 다른 상점들도 6864세대를 잡기 위해 불꽃 튀는 마케팅 경쟁을 벌였다. 소아과는 아이들에게 양말을 나눠주었고, 세탁소는 10년 전 가격으로 봉사했으며, 상가 미용실은 입주자에게 30%를 할인해주었다. 인근 테크노마트와 하이마트 등 대형 쇼핑몰도 입주자만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열어 경의를 표했다. 현대백화점은 할인 카드 발급 신청서를 아파트 우편함에 뿌렸다.
점잖은 은행원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입주 시점에 맞춰 집을 팔아 잔금을 내려다 집이 팔리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는 조합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아파트 단지로 뛰어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잔금 마감 날, 은행원들은 천막으로 장사진을 치고 대출을 독려했다. ‘부동산 떴다방’이 아닌 ‘은행 떴다방’이 생긴 것이다.
상가에 들어선 것은 부동산중개소와 은행과 병원, 그리고 교회였다. 비싼 상가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이들 뿐이었다. 반대편 상가에 입주한 교회는 대형 교회에서 분점 형식으로 낸 교회였다.
조선일보보다 빠른 교회, 감동이었다
마케팅 경쟁이 격해지면서 입주 초기보다 혜택과 경품이 늘었다. 한 보수 일간지 판매원은 신문을 구독하면 ‘상품권 10만원, 경제신문 한 부, 유아용 월간학습지’를 준다고 유혹했다. 거기다 1년간은 공짜다. 경품은 다 빼고 논조가 다른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함께 넣어달라고 말했더니 조용히 물러갔지만, 나중에 ‘해줄 수 있다’며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았다(결국 전화가 오지 않아 한겨레와 경향은 따로 구독했다).
6864세대를 사이에 둔 불꽃 튀는 마케팅 전쟁의 일인자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상업적이어야 할 교회였다. 이삿짐을 들일 때, 신문사 지국 판매원과 통신사 텔레마케팅 전화보다 빨리 찾아온 사람은 인근 대형 교회 관계자였다. 한창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들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손에는 이사 당시 너무나 절실하던 대형 쓰레기 종량제 규격봉투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교회와 깊은 악연이었다. 재건축 조합은 단지 내에 있던 한 교회의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송파구청은 ‘전체 사업부지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해 안 된다’며 준공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교회 측에 대체 부지와 건축비를 주고 입주 직전 극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가 건설되고 입주가 시작되자 마지막까지 속을 썩이던 ‘하나님의 목자’들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제일 먼저 나타났다. 인근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배경으로 성장한 대형 교회들은 새로 들어선 이 대단지 주민을 붙들기 위해서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거리가 먼 한 대형 교회는 아예 아파트 상가에 분점을 내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6864세대를 붙들기 위한 서비스 경쟁도 치열했다. 생수를 병으로도 배달해줄 만큼 배달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방문 서비스 체계도 좋았다. 언제까지 이런 서비스를 해줄지는 의문이지만,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직원들이 방문해주었다. 아파트 동마다 무인 택배함이 있어 집에서 택배를 기다리거나 경비실에 맡길 필요도 없었다.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가 임대료가 비싸서, 아파트단지 안에 학원을 차리기도 했다. 문방구랑 PC방은 안 생기려나...
최대 아파트단지 입구에 슈퍼 하나 없어 편의점에서 파 마늘 찾아
아파트 단지 입지 조건도 매력적이었다. 한강 조망권에 위치하면서 ‘아름다운 100대 하천’으로 꼽히는 성내천이 단지를 끼고 흘렀다. 올림픽공원은 바로 옆이고 조금 걸으면 석촌호수가 있다. 삼성병원과 함께 국내 최대 병원으로 꼽히는 아산병원이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도보 거리에 대규모 쇼핑 몰인 롯데백화점이 있고 삼성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도 가깝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천혜의 입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작 제 발로 무엇을 사러 나가보면 살 만한 것이 없었다. 상가 조합원들의 독점 상권을 보장해주기 위해서인지 상가는 40여만 평인 아파트 단지 양쪽 구석에 달랑 두 곳만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를 성내천과 올림픽공원이 싸고 있기 때문에 단지 가운데에 입주한 사람은 상가로 가려면 500m 이상을 걸어야 했다. 주민 박은영씨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자전거를 구입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걸어서 상가에 가봤자 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입주가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상가에는 부동산중개소·은행·개인병원 외에는 들어선 업체가 없어 텅텅 비어 있었다(교회도 있다). 상가 분양권을 가진 사람들이 임대료를 높게 받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6864세대의 힘이다. 연필 한 자루 살 곳이 없다.
슈퍼도 한 곳밖에 없어서 주민은 편의점을 이용해야 한다. 편의점 종업원 양보라씨는 “슈퍼가 없으니 주민들이 편의점에서 파·마늘 같은 채소를 찾는다”라고 말했다(아내는 편의점에 가서 계란을 찾았다). 연필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차를 타고 주변 대형 마트로 가야 하는 현실에 주민 박금숙씨는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상가 임대료 때문에 공실률이 높은 상황은 인근 ‘엘스’나 ‘리센츠’ 단지도 마찬가지다.
비싼 상가 임대료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부는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단지 안에 집을 빌려 학원을 차린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비롯해 영어와 수학을 배울 수 있는 학원도 단지 내에 들어서면서 아파트는 자연스럽게 ‘주상복합아파트’가 되었다. 학기가 시작해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문방구인데, 잘하면 문방구도 하나 들어설 것 같다.
(이 기사의 취재에는 시사IN 이환희 인턴기자도 함께 했습니다.
아파트단지가 너무 커서 취재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답니다.
저는 취재하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단지끝에서 단지끝으로 가는데 택시를 잡아타고 가기도 했답니다.
택시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잠실 아파트별곡' 2편, 3편도 곧 나옵니다.
2편과 3편에는 더 많은 문제의식을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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