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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닷컴 Inernational

미국유학생들이 알아야 할 '100년 전 유학생 이야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3. 15.


미국에 있는 명문 대학원...
미국에 있는 명문 대학...
미국에 있는 명문 중고등학교.... 
모두들 못가고 못보내서 안달이다. 

그들에게 100년 전 유학을 갔다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던  
세 유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한 엘리트는 '스펙'으로 규성되는 것이 아니다.   
'스펙 증후군'에 걸린 이 즈음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시 오렌지카운티에서 발행되는 한인 잡지 <타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타운뉴스>는 '청소년 유해환경을 제공하는 컨텐츠는 싣지 않습니다'라는 신념을 18년 동안 지켜온 한인사회 대표 '청정 매체'입니다. '독설닷컴'은 <KBS PD협회보>에 이어 <타운뉴스>와도 콘텐츠 교류 협약을 맺고 콘텐츠 교류를 하기로 했습니다. 

'역사는 기억한다'는 제목의 이 글은 <타운뉴스>의 칼럼니스트, 이경원 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경원 선생님은 <LA타임즈> 기자 출신으로 미국 '언론인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신 대표적인 교포 언론인이십니다. 미국 교포사회 역사에 정통하신 분인데 이승만과 안창호 김호 선생을 비교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엘리트 유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밑에 영문 원문도 게재합니다). 




  


"역사는 기억한다"

명심해야 할 이야기 : 중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행위 
글 - 이경원 (전 <LA타임즈> 기자, <타운뉴스> 칼럼니스트) 



부족, 민족, 국가는 그들이 경외하는 영웅에 의해 알려지고, 평가 받는다.
예를 들면 인류애의 상징인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영웅이다. 한인이민사회의 경우 이제는 한인 뿐 아니라 미국의 영웅으로도 추앙 받기 시작한 도산 안창호나 김호(찰스 김) 선생이 그런 분류라 할 수 있다.
우리 미국의 자랑거리인 이런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단 한번이라도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위대한 해방자인 링컨은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노예제대를 옹호하는 남부지역의 시골지역에서 독학을 했다. 
도산과 김호 선생도 100년 전 미국식 교육을 받기 위해 이 곳에 왔지만 개인의 꿈을 접고 자신의 인생을 일제에 정복당한 조선의 해방과 인종차별을 받으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인 이민사회를 돕는데 헌신했다. 

 
그들에게 교육은 삶이라는 긴 여정을 통한 배움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사회운동가에서 역사적인 대통령직에 오른 하버드대 출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끌기 시작한 오늘날의 새로운 미국으로 와 보자.
태평양 양쪽에 위치한 한인 부모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들을 성공과 돈벌이의 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는 사실은 참 슬픈 아이러니다.
교육의 위기를 겪고 있는 바다 건너편 한국에서는 학교의 등수를 매기는 것이 유행이다.
열성이 지나쳐 극성인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이 좁은 취업 문을 뚫을 수 있는데 이득이 되는 명문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불쌍한 한국 학생들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새벽부터 한 밤까지 책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성에 안 차는 수 많은 중산층 부모들은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자녀들(약 19만명으로 추산)을 유학 보내고 있다. 이 같은 교육 대이동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생각할 때 이런 현상은 한국의 미래에 좋은 신호는 아니다.
태평양 동안에 자리잡은 미국에서도 한인 씨를 가진 아이의 미래는 이미 태어날 때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진학하기’라는 프로그램이 짜여진 것 처럼 보인다.
순위에 연연하는 한국 부모들에게는 호평을 받고 있는 UC시스템의 대학도UC버클리와 UCLA가 전부다.


한인과 한국인의 영혼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성공의 방식이 깊숙이 새겨져 있다. 
SAT, 하버드, 아이비리그, 고액 연봉, 박사학위, 의사, 사장, 대기업, 대학교수 그리고 머세데스 벤츠.
명문대학 합격을 위한 사설학원은 한인타운이 형성된 주요지역에서는 크게 번창하는 사업 아이템이다.
한글 일간지는 유명대학에 관한 기사를 정기적으로 싣고 있다.
하지만 무상토지불하 정책을 통해 설립돼 역사적으로 미국 고등교육의 대들보 역할을 해온 주립대에 대한 생각은 이와 다르다.
다른 이민자 커뮤니티 학생들이 신분상승을 위한 첫 단추로 커뮤니티칼리지나 직업학교를 선호하는 것과 달리 우리 커뮤니티는 이런 종류의 학교를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 100년 이민사는  세 명의 민족주의적 개혁론자인 도산, 김호, 이승만의  삶을 통해 아이비리그에 목숨을 거는 요즘 세대에 경종을 울리는 교훈을 전해준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데 진짜로 필요한 것은 행동이지 좋은 학위나 타이틀이 아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가진 이승만은 결국 독재자가 됐다.
그리고 1960년 한국의 첫 민주화 혁명(4.19) 때 고등학생과 대학생에 의해 대통령 권좌에서 쫓겨났다.
20세기 초 이 세 명의 민족주의적 개혁론자들은 모두 기독교로 개종했고,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부패한 조선을 떠나 미국에 왔고,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이승만과 다른 두 사람은 조국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놓고 먼 이국 땅에서 심하게 반목했다.

자비로운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에서 성공적으로 공부를 마쳤다.
영예로운 박사학위까지 얻은 그는 스스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신봉자가 됐다.
독재자이면서 진정한 마키아벨리주의자인 그는 편 가르기를 좋아했고, 상대진영과의 권력다툼 과정을 통해 고귀한 박사학위를 뽐냈다.
민중으로부터 기부를 받아내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졌던 그는 단 한번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


반면 서재필, 박용만, 김규식 등 미국식 교육을 받은 다른 선각자들은 농장이나 집안에서 때때로 힘써 일했다.
볼셰비키혁명으로 시작돼 한국전쟁 때까지 지속된 미국 내 반공주의 시류에 편승해 이승만은 남한의 초대 대통령직에 올랐고, 국회를 이용해 국부이자 종신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도산과 그의 동지 김호는 공부를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주고, 하와이와 미국본토 뿐 아니라 멕시코 유카탄의 노예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정착자에게 커뮤니티 네트웍을 세워주는 일에 헌신했다.
22살의 나이에 새 신부 헬렌과 함께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서로 반목하는 차이나타운 내 한인
인삼상인의 실상을 목격했다.
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교육개혁자인 그는 자신의 학업 계획을 접고 캘리포니아 전역의 농업지대에 드문드문 형성돼 있던 오합지졸 같던 한인촌에 풀뿌리 조직인 국민회 지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국민회는 한국판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라 할 수 있다.
도산은 국민회 조직을 멕시코와 시베리아까지 확장했다.
그의 국민회는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물론 미국 국무부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자치정부 지위까지 부여 받았다.


1913년 그는 흥사단을 조직했다.
독립될 조국과 새로운 한인사회의 요구를 채워줄 제대로 된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1938년 한국 감옥에서 숨질 때까지 그는 그가 주창한 것을 직접 실천했다.
도산은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할 것, 진실을 이야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행동할 것, 공공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것, 독립 이전에 책임 있는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문했었다.
실제로 역사는 그가 시공과 인종을 초월하는 간디, 시저 차베스,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를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1914년 당시 개혁주의 학교의 교사로 28세 기혼자였던 김호는 가족은 한국에 놓아둔 채 그의 멘토의 삶을 따르기 위해 미국에 건너왔다.
도산처럼 공부를 포기한 그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위험한 석탄 광산에서 일하면서 국민회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 서부지역 여러 주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김호는 김형순(Harry S. Kim)과 40년 동안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중가주 하이웨이99 바로 옆에 위치한 자신의 리들리 농장에서 넥타린 비즈니스를 통해 아시안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감이 극에 달했던 캘리포니아에서 세계적 수준의 큰 부를 이뤘을 뿐 아니라 독립된 조국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를 키워냈다.


새로운 이민자의 물결을 지켜보면서 그는 미래를 위해 역량 있는 지도자를 키우는 것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은퇴 후 그는 재산 일부를 커뮤니티 센터를 건립하고 재단을 세우는 데 쾌척했다.
당시 갓 형성되기 시작한 코리안타운을 이끌어갈 전문가와 지도자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
도산의 희생으로 탄생한 흥사단은 한국과 미국에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도산의 이름을 딴 공원, 길, 교육기관이 한국에 생겼다.


이곳 LA에서도 최근에 우체국, 교차로, 병원 홀, 시청 앞 광장 등의 명칭이 그에게 헌정됐다.
‘복숭아의 왕’ 김호가 세상을 떠나고 50년이 지난 뒤, LA한인타운 한복판에 위치한 ‘찰스 H. 김 초등학교’ 뜰에서는 수 많은 넥타린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LA통합교육구에 따르면 이 학교는 LA에서는 최초로 모든 인종의 학생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되고 건설된 최초의 학교다.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김호는 마침내 사후 역사에 의해 공립학교에 이름이 헌정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프린스턴에서 한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 박사는 어떤가?
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에 의해 쫓겨난 뒤 망명지로 정착한 하와이에서 90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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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History Remembers


A CAUTIONARY TALE:
DEEDS, NOT DEGREES, THAT MATTER
 
By K. W. Lee
 

A TRIBE, A PEOPLE OR A NATION is likely known or judged by its heroes by whom it reveres above all others.
 
 Such is Abraham Lincoln, an icon of all humanity beyond borders.
 
 So are Korean diaspora pioneers Dosan Ahn Chang Ho (Island Mountain) and Charles Ho (Nobody) Kim  who are now among the pantheons of  not only Korean but American heroes.
 
These towering figures from our American heritage share one common trait: They couldn’t afford attending a day in college. .
 
 Lincoln, the great emancipator born to a log cabin, mostly taught himself in the frontiers of the slave-owning republic.
 
 Dosan and Nobody, upon arrival for American education a century ago, gave up their dream to devote their lives as freedom fighters for their conquered kingdom as well as for their struggling migrant workers in the apartheid West. 
 
To them, education was a life-long learning journey.
 
Fast forward to the unfolding New American century where Harvard graduate Barak Obama began his historic ascent to presidency as a lowly community organizer.
 
It’s a singularly bitter irony that today’s Korean parents on both sides of the ocean are hell bent on sending their children to top-ranking universities by any extreme means --- the short cut to fortune and fame. 
 
Across the ocean, the education rankings craze is sweeping the digitally wired South Korea in a mounting education crisis. It’s the top colleges the overzealous parents pressure their children to gain admission for an extra edge in the fiercely competitive job market. In turn the wretched students are driven to fulfill the parental expectations, cramming from dawn to midnight to pass a national entrance test.
 
But that isn’t enough for tens of thousands of middle-class Korean parents who uproot themselves by sending away their children (numbering 190,000) for study overseas in an unprecedented education exodus. It spells an alarming sign for the future of Korea in a global economy meltdown. .
 
On this side of the ocean, it’s as if the future of a child born to the Korean womb is already programmed at birth –bound for Harvard, or Yale or Princeton in that order. In the esteemed UC system, it’s Berkeley or UCLA, and the other branches don’t count, as far as the rankings-obsessed parents are concerned.
 
 Embedded deep in the Korean and Korean American psyche is this ultimate success route: SAT, Harvard, Ivy Leaguers, six-digit-figure income, Ph.D.s and MDs, CEOs, big corporations, tenured professors and Benz-Mercedes.
 
Private cram schools for elite schools make up a thriving enterprise in major Koreatowns. Ethnic dailies run regular sections on prestige universities. 
 Perish the thought when it comes to state universities, this nation’s historical mainstay of higher education called land-grant universities.
 
As for community colleges as well as vocational or technical education ladders, vital first steps toward the upward mobility for most immigrant student populations, they draw scant communal attention.
 
 
 
Out of the fog of our century-old passage, the saga of three nationalist reformers Dosan, Kim Ho and Syngman Rhee tells this cautionary tale for today’ Ivy League-bound generation:
 
 It’s the deeds, not lofty degrees nor titles, that really matter in pursuit of the American Dream.
 Lesson One:
..
 Rhee, with the coveted degrees from the Ivy League universities, turned into a dictator to be thrown out of presidency by an army of high school and college students in Korea’s first democratic revolution in 1960.
 
At the dawn of the last century, these three nationalist reformers, all converted to Christianity, left the corrupt kingdom for the United Sates to get western education and fight for independence.
 
In exile, however, Rhee and the latter pair went separately ways, bitterly wrangling over how to achieve their homeland’s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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