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 월간고재열
  • 어른의 허비학교, 재미로재미연구소
독설닷컴 Inernational

6-25 전쟁, 전선에서 자란 '솔저걸' '솔저보이'들의 60년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7. 1.

MBC 6-25 특집 다큐 '코레 아일라'가 잔잔한 감동을 주었네요. 
6-25 전쟁 고아 중에는 이런 '솔저걸' '솔저보이'들이 많았죠. 
'코레 아일라'와 비슷한 '리틀 조' 이야기를 올립니다.
솔저보이 ‘리틀 조’, 박석범씨가 이룬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서 취재했던 내용입니다.




사진 캡쳐 링크 : http://www.twipl.net/AApf 


왔노라, 살았노라, 이루었노라

- 솔저보이 ‘리틀 조’, 박석범씨가 이룬 아메리칸 드림 


(이 글은 제가 2002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요즘 미국 교포 사회는 이민 100주년 기념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다. 내년 1월13일이면 1세대 이주자들이 일당 1달러를 벌기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한 지 100년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한인 단체는 물론 현지 한인 언론들까지도 저마다 분주하다. 평소 부모 세대 이야기를 시큰둥하게 듣던 교포 2세들도 예외가 아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부모들이 어떻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는지 이들도 귀를 기울이며 갖가지 기념 행사에 참석해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


월드컵에서 붉은악마 열풍을 보고 새삼 한국인의 힘을 깨달은 할리우드도 100주년 기념 대열에 동참했다. 랜드마크 글로벌 영화사는 한국계 미국인 박석범씨(62·미국명 조셉 앤서니)의 삶을 다룬 영화 <솔저 보이>(가제)를 제작하고 있다. <솔저 보이>는 박씨가 겪은 6·25와 전쟁 이후 그가 어떻게 미국에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는지를 그린 영화이다.



전쟁 고아 출신으로 6·25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박씨는 당시 미국인들로부터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꼬마’로 소개되며 눈길을 끌었던 인물이다. 미주 한인 이민자의 전형인 박씨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베벌리힐스의 랜드마크 글로벌 본사로 찾아가 그를 만나 보았다. 


‘리틀 조’. 6·25 때 박석범씨는 미군 병사들에게 리틀 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부모의 행방을 잃은 박씨는 당시 여느 전쟁 고아들이 그렇듯 거지떼에 속해 있었다.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대구에 주둔하던 미8군 제24사단 19연대 1중대 막사에 들어갔다. 거지떼 중에서도 유난히 거짓말을 잘하던 영특한 꼬마 거지는 부대 안에 있으면 밥을 굶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기를 그곳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부대원들은 허드렛일이나 맡길 심산으로 그가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꼬마 거지는 설거지·빨래·전투화 닦기·총기 청소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부대가 북진하자 그도 부대와 함께 따라 올라갔다. 대전과 수원을 거쳐 서울까지, 다시 삼팔선을 넘어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행군 도중에 그는 부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부대원들이 지나가려던 다리에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낸 것이다. 다리 건너편에서 한 노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낌새를 챈 그는 부대원의 행군을 멈추게 하고 다리를 건너가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전투 부대에서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다. 압록강 전선에서 중공군과 대치한 부대원들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그를 안전한 남쪽으로 내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부대를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바로 미국행. 시어스 백화점 카탈로그와 <라이프> 사진을 보며 미국의 풍요를 접한 그는 미국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을 미국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한 미군들을 떠날 수 없었다.


중공군이 개입하자 부대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결국 철의 삼각지대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고지의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매일 벌어졌다. 어린 꼬마에게 전쟁은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전투가 끝나면 인부들과 함께 일과처럼 시체를 치우고 진지를 보수했다. 전장에서 주운 수류탄을 강에 던져 물고기를 잡아 철모에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식당에서 달걀 한 상자를 훔쳐 북한군에 가져다주기도 했다. ‘미군은 달걀 한 상자 정도는 얼마든지 더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달걀 한 상자를 가슴에 품고 사선을 넘었다. 북한군 사병들이 너무나 굶주렸다는 사실을 알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선이 오래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그는 혼자서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모두들 그를 비웃었지만 그동안 모은 100 달러를 손에 쥐고 괴나리 봇짐을 꾸렸다. 언젠가 한국인 인부로부터 일본으로 가면 미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을 기억한 리틀 조는 부산에 가기 위해 무작정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가 1952년 3월. 1950년 8월 부대에 들어간 지 20개월 만의 일이었다.


군종 신부 주선으로 미국행 꿈 이루어

그러나 첫 번째 미국행 시도는 서울에서부터 좌절되었다. 피난민과 전쟁 고아로 어수선했던 서울은 어린 꼬마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만큼 낭만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불량배들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그는 가진 돈을 다 빼앗기고 부대로 되돌아가야 했다. 부대로 돌아간 그는 100 달러를 모으자 다시 미국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연거푸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시도에서 그는 미군 지프를 얻어 타고 수원의 K13 미국 공군기지로 들어갔다. 공군기지에서 그는 기지를 발휘해 자기가 일본인 고아라며 일본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미국 공군 조종사의 배려로 후쿠오카에 있는 21 공군사령부로 가는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후쿠오카 공군기지에서 그는 군종 장교인 도너웨어 신부를 만났다. 도너웨어 신부는 영어를 가르쳐 주었고 부모를 찾는 일을 도왔다. 그가 낸 광고를 보고 일본인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일이 꼬이게 되자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 신부에게 자기가 일본인 고아가 아니라 미국에 가기 위해 일본에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신부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그를 미국에 보내기 위해 각계에 탄원서를 보냈다. 신부와 기지의 여러 장교들이 백악관과 상·하원에 탄원서를 보낸 결과, 1953년 6월 그는 꿈에도 그리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하자 그는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 언론들이 미국이 자유의 땅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그를 ‘자유를 찾아 미국에 걸어온 아이’라고 소개하며 대서 특필한 것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토크쇼 에 출연해 팬레터를 수천 통 받기도 했다. NBC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었고 유니버설 영화사는 그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매카시즘도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이승복’이 되어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선전대원 역을 맡았다. 여러 고등학교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증언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의 광기가 걷히고 시청자의 기억에서도 멀어지자 리틀 조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3막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무엇보다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밤낮으로 영어 공부에 매달린 결과 학교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해졌다. 그러나 덕분에 사춘기가 지날 무렵 그는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30여 대가족 생계 돌본 냉전 시대 희생양

비록 모국어를 잊었지만 한국을 잊지는 않았다. 그가 미국땅을 밟은 이래 지금까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나는 한국에서 왔다. 한국은 5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한국인은 평화를 사랑한다”라는 말이다. 그는 요즘도 매일 밤 <아리랑>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도너웨어 신부가 근무하던 퀸시 칼리지에 진학했다. 이때 그는 6·25 때 경험을 담은 <천한 자와 순례자 (The Rascal and the Pilgrim)>라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교사가 되었고 백인 여성과 결혼해서 평온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의 삶은 미국 중산층의 삶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7년,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한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시작한 그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바로 가족을 찾아서 미국에 데려오는 것. 사업차 한국을 방문한 그는 본격적으로 부모 찾기에 나섰다. 열두 차례나 고국을 방문한 끝에 1977년 그는 마침내 아버지 박말암씨와 어머니 이동년씨를 찾았다.


30여년 만에 상봉한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오려 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부모의 이민을 신청할 경우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고아라고 말한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미국 이민법상 시민권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 시민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평소 그가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 활동을 해온 것이 인정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주 연방 하원의원이 주한 미국대사관에 탄원서를 보내준 덕분에 시민권을 유지한 채 부모님도 무사히 모셔올 수 있었다.


대사관의 도움으로 이민이 허락되자 가족의 대이주가 시작되었다. 부모님 내외와 형제자매 4명,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 4명, 거기에 조카 10명까지 20명이 한꺼번에 이민을 왔다. 미국에서 태어난 조카 5명에 자신의 자녀 5명까지 그는 도합 30여명의 생계를 돌보는 가장이 되었다. 다행히 그 무렵 시작한 보석상 사업이 수지가 맞아 대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산층의 안락한 삶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조카 15명과 다섯 자녀의 학부형 노릇을 하느라 그는 교사였을 때만큼이나 자주 학교에 들락거려야 했다. 그도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담보로 잡힌 채 2세들의 길을 터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조카와 자녀 들이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 저마다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에게 한 가지 책임이 더 부과되었다. 평생의 은인인 도너웨어 신부가 몸져 누운 것이다. 일리노이 주에 거주하던 그는 도너웨어 신부를 간호하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텍사스로 집을 옮겼다. 신부는 2년 동안 그의 극진한 병수발을 받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사흘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를 모두 마칠 무렵 그는 “이제 나의 책임은 모두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처음 미국에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거진 빈손이 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조그만 아파트 한 채와 생활비를 충당해주는 연금뿐이다. 그는 영화가 성공해 자신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면 밥을 굶는 북한 어린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솔저 보이>를 통해 할리우드는 또다시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지 모른다. 그러나 30여 식구의 생계를 돌본 가장이었던 그는 미국의 영웅이라기보다는 6·25를 거쳐온 우리 시대의 한 아버지였다. 냉전 이대올로기에 희생된 이 땅의 한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