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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닷컴 Inernational

1992 LA참사와 2009 용산참사, 왜곡언론의 '데자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5. 3.


4월29일은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진압경찰이 희생된 용산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또한 1992년 LA 흑인폭동이 일어난지 17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로드니킹 사건으로 빚어진 LA폭동은 미 주류 언론에 의해 '한흑갈등'으로 왜곡되어 한인 상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교포들에게는 'LA참사'였던 셈이지요.

17주년을 전후해서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의 교포매체 <타운뉴스>에
교포 원로 언론인 이경원 선생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타운뉴스>는 '독설닷컴'과 기사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경원 선생은 <새크라멘토 유니온> 기자 출신으로 언론인 명예의전당에도 이름이 올라있는 분이십니다.
본인이 주류매체 출신이었기 때문에 주류매체의 본질 왜곡에 더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

두 글을 읽고 저는 찌릿한 '데자뷰'를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부모 이야기를 전한 교포 대학생의 이야기와
용산 희생자 아들인 대학생이 언론에 했던 이야기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왜곡보도에 분노한 교포들이 '영어로 된 매체'에 목을 메는 모습은 
용산참사 희생자 유족들과 철거민들이 대안언론 운동에 나서는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용산참사 철거민과 LA흑인폭동 피해자의 공통점은 
언론 보도 때문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전철연'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격 시위대 취급을 받았습니다. 
LA 흑인폭동 피해자들은 '평소 흑인들을 경멸해서 화를 당했다'는 식의 보도 때문에 2차 피해를 당했습니다.

두 글을 읽어보시고, 좀더 진전된 비교 부탁드립니다.



인종갈등을 부추긴 주류언론과 이에 맞선 4.29의 자녀들

글 - 이경원 (재미 원로언론인)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TV를 통해 본 피로 물든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탱크행렬에 맞섰던 그 고독한 젊은이의 절규하는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온 인류의 심장이 멈추는 듯 한 순간이었다.

나는 또 한 명의 고독한 사람을 잊을 수 없다. 이름도 없고, 명예도 없는 한 마켓주인의 아들인 그는 주류 언론들의 악의적인 보도에 의해 LA도심지역의 불행한 한인 자영업자들이 온갖 범죄의 희생양이 되고 있을 때 거대한 LA타임스를 향해 심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 기고문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임수현. 당시 UCLA 학부생이었다.

LA타임스 오피니언 란에 실린 그의 편지는 "언론이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문제를 계속 확대시키고 있어 나는 내 아버지의 안전과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됐다.

임군의 글은 당시 편집국장인 셸비 코피를 향한 것이었다. LA지역의 유일한 신문인 LA타임스는 코피의 독단적인 리더십 아래서 정치력은 강하지만 경제력이 약한 흑인과 영어를 못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한인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인종공격적인 기사를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었다.

그 편지는 미국 현대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3일 동안 계속된 약탈과 방화로 인해 사우스센트럴과 코리아타운이 폐허가 되기 1년 전에 보내졌다.

수현 학생의 글은 미주한인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LA타임스에 반영된 유일한 우리의 목소리였다. 그 때 고등교육을 받은 수많은 한인 엘리트들은 마치 학살을 당하는 것 같은 비참함을 감수해야 했던 자영업자들의 슬픈 현실을 외면했다.

임군은 "우리 아버지는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한인업주다. 아들인 나는 매일 아버지를 걱정한다. 두 소수민족은 생존을 위해 문화의 차이를 참아내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은 계속해서 이 두 집단의 현실을 왜곡 보도해 한인과 흑인이 서로 반목하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두 커뮤니티는 이런 마찰은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 UCLA 재학생은 언론이 만들어낸 '불화'를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LA타임스가 겪을 위험한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LA처럼 경쟁이 치열한 큰 미디어 시장에서는 소위 한흑갈등이라는 상품이 TV시청률을 높이고 신문부스를 늘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난주 칼럼에서 썼듯이) 희생양을 찾아내야만 했다.

10년 뒤 나는 수현의 여동생인 지현으로부터 4.29폭동 때 아발론길에 있던 아버지의 작은 가게가 폭도들에 의해 약탈, 방화 당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폭동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임지현양은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주간지 아시안 위크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는 1년 뒤 그의 아버지가 훨씬 안전한 중가주 지역에 새 가게를 열어 가족을 안심시켰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여기 전형적인 한인부모들이 자녀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사우스센트럴 지역에서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딸의 눈으로 살펴본 이야기가 있다.

"나는 타오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구름과 이웃업소를 약탈하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을 봤다. 지옥처럼 혼란스러웠다. 내 눈을 TV화면에 고정됐고, 내 머리와 마음은 끝없이 요동쳤다. 우리 아빠는 어디 있지? 안전하신 걸까?

그는 1991년1월 마켓을 열었다. 아빠가 그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세이프웨이나 랄프스 같은 대형마켓의 경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한인 업주들과 마찬가지로 아빠는 다른 비즈니스들이 오픈을 기피하는 틈새시장을 찾은 것이다.

그는 위험한 동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빠는 가게 문을 열고 몇 개월도 안 돼 권총강도를 만났다. 두려움에 떨은 아빠는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해 벌은 돈을 모두 강도에게 건넨 뒤 경찰을 불렀다. 우리 아빠는 다치지 않았고, 강도도 붙잡히지 않은 채 사건은 종료됐다.

아빠와 손님들 사이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한인업주가 물건을 훔친 흑인여학생에게 총을 쏜 두순자와 라타샤 할린즈 사건 이후 흑인과 한인사이의 긴장을 고조됐다.

우리 오빠가 LA타임스에 글을 보낸 건 이 무렵이었다.

4월29일 로드니 킹 사건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그 커뮤니티에 존재했던 긴장은 한순간에 폭발했다. 아빠는 친구로부터 폭동이 일어날 것 같으니 빨리 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빠는 즉시 돈 가방을 챙기고 차에 올라타 가게를 떠났다. 폭도들은 쇠파이프로 철문과 창문을 부순 뒤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제품을 약탈했다.

아빠는 만일 아빠가 폭도들을 제지하려 했다면 그들이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빠는 가게로 향했다. 그 곳은 아수라장이었고, 아빠는 근심에 휩싸였다. 우리 가족의 생계는 그 건물처럼 산산 조각났다.

아빠는 '나는 화재보험 외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데 아빠가 맞섰다면 그들이 아빠를 죽였을 거야. 아빠는 죽고 싶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이런 비극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모든 한인이 자신의 업체 옥상에서 총을 들고 서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한인은 우리 아버지 같았다. 그들은 가족의 생활이 달린 생계수단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잃었다. 아빠는 삶에 환멸을 느끼지 않았고, 동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할 공정한 기회를 원했다. 그는 항상 나에게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도 내 귓가를 맴돈다."

지현의 오빠가 당시 UCLA재학생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UCLA는 오랜 세월동안 미국역사상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은 민족 중 하나인 한인의 권리를 지켜준 수많은 2세 활동가를 배출한 요람이었다.

임수현군의 정신은 지금도 4.29의 자녀들 속에 살아 숨 쉰다. 아직 젊은 4.29의 자녀들은 불길 속에서 희생하며 침묵했던 부모 세대들을 대변해줄 처음이자 마지막 보호자들이다.

 

배우지 못한 4.29의 교훈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 영어로 된 언론매체

글 - 이경원 (재미 원로언론인)


"용의자들을 모두 잡아와."

고전명화 '카사블랑카'에서 부패한 비시 프랑스 정부의 르노 경찰국장은 릭의 도방장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4.29폭동 17주년이 다가오면서 나는 그의 조소하는 듯 한 명령이 자신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불타는 LA코리아타운에서도 울려 펴졌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언론이 조장한 대학살로 인해 LA에서만 2,000개 이상의 한인 비즈니스가 피해를 입고, 약 1만 명의 한인의 삶이 피폐해지고, 약 5,000억 달러의 재산손실을 입은 그 사건에서 무엇을 배었는가?

"희생양을 찾아와."

또 다른 불똥이 튈 때, 우리는 아마도 또 다시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도시지역의 희생양으로 선택될 것이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는 150만 인구를 자랑하지만 단 한 개의 영어 신문이나 주간지, 방송도 갖고 있지 않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문지로 힘을 쌓아온 중국계나 일본계 커뮤니티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시의적절하게 우리를 지켜줄 영문 매체가 없는 우리는 결국 한인사회에 적대적인 루머나 인종간 대결, 급격한 민중항쟁 같은 일이 발생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없어 큰 피해를 당할 운명이다.

심지어 고등학생들조차 학교 교실이나 교정에서 불량한 학생들을 상대해야할 때 영어가 그들에게 최고의 무기임을 알고 있다.

나는 영어가 서툰 이민자와 이제는 20-40대가 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들의 자녀들 사이의 크나큰 세대간 단절이 매우 걱정스럽다.

이 두 집단은 한 밤중에 신호도 교환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항해하는 두 척의 배와 같다.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 토론도 없고, 합의도 없고, 방향성도 없다.

영어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반벙어리, 반장님, 반귀머거리들로 가득한 미전역의 한인타운은 이해집단이 경쟁을 하는 이 나라에서 위태롭게 생존해나가고 있다.

주류언론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라티노와 흑인 같은 타민족 이웃들에게 한인사회를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주류언론은 우리의 이민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인과 아시안을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민족들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긴장이 확산되는 요즘은 위험한 시기다. 잘못 대표되고 잘못 인식돼 있는 여러 소수민족 중에서도 겉으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변자가 없는 우리는 민족간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요즘 같은 시대에 큰 취약성을 갖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왜 그럴까, 왜 우리일까?

나는 그 답을 알 수밖에 없다. 나는 두 종류의 영문 주간지를 창간하고 편집했었다.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 발행된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전미 영문판 주간지인 '코리아타운 위클리'와 한흑갈등이 심화되던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인쇄된 한국일보 영문판이 그 매체다.

다민족 직원이 힘을 모았던 작은 조직인 첫 번째 타블로이드는 3,000명의 구독자를 확보했지만 광고수입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 2세 기자와 인턴으로 구성됐던 저명한 한국일보의 영문판은 4.29폭동을 전후한 시기에 한인사회의 유일한 영어 목소리로 활약했지만, 폭동의 후폭풍 때문에 사라졌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학문분야와 사업과 IT벤처분야에서 우리처럼 큰 성장을 기록한 민족은 드물다. 우리에게는 수만 명의 변호사와 의사, 교수, 기술자, 과학자, 사업가, 금융인, 공무원이 있다.

언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한인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다루지만 훌륭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런 성공한 사람들은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외면해 한인사회는 큰 리더십 부재현상을 겪고 있다. 언론과 정치 분야는 물론 커뮤니티 연합을 위한 그들의 노력이 절실하다.

한인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아래와 같은 문제 해결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10여 년 전 사회와 인종 차별로 인해 사우스 센트럴 LA지역에서 발생한 혼란의 희생양으로 100개가 넘는 소수민족 중 왜 한인이 희생양으로 선택돼야 했는가?

--- 한국어를 사용하는 1세와 영어권인 2세, 도시지역 저소득층과 교외지역 중산층, 입양인과 혼혈인, 미군과 결혼한 여성과 그 자녀들, 초기 이민자의 후손들 등 점점 다양해지는 한인사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개의 수준 높고 혈기 왕성한 두 영문 잡지인 코리암저널과 코리안 쿼터리가 역경과 희생, 육체적 소모를 극복하고 잘 성장한 것은 정말 작은 기적이다.

그들이 나의 대변자다. 여러분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두 녀석의 뻔뻔스런 추종자인 나는 이 두 간행물이 태생, 지정학, 신조, 국경, 인종을 초월해 급변하는 정치적 시대에 우리를 대표하는 소중한 창문의 역할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아버지(발행인 유종식)와 아들(편집장 제임스 류)에 의해 18년전에 시작된 코리암은 지역 잡지를 벗어나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내 소수계 언론을 대표할 정도로 성장했다. 코리암은 소수계 퓰리처로 불리는 뉴아메리카 미디어 언론상을 거의 매년 수상하고 있다.

코리암과 마찬가지로 10년 전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독립미디어도 출범한 코리안 쿼터리도 그 분야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잡지는 특이하게도 한인 자녀를 입양한 미국 부모가 이끌고 있는데,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내 생각에 코리안 쿼터리는 그 잡지의 비전과 통찰력, 깊이, 식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실로 전 세계의 한인을 위한 출판물이다. 상당수 기고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입양인인데, 한국과 미주한인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가난을 요구하는 특별한 소명이다. 주정부 공무원으로 오랫동안 봉직하고 있는 마사 빅커리 편집인과 그녀의 남편 스테판 운로우는 어떤 적도 만들지 않고 이 일을 계속 이끌어오고 있다. 이 잡지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어느 누구도 경비를 제외하면 어떤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크고 작은 다른 종이언론사와 마찬가지로 코리암도 코리안 아메리칸을 위한 유일한 월간지로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25만 명 이상의 한인이 살고 있는 LA에서 영어로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코리암이 없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투자해서 성장시켜온 코리암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이 천사의 도시에서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위엄과 온건함을 위해 인터넷에서 코리암 (Koreamjournal.com)과 코리안쿼터리 (Koreanquarterly.org) 웹사이트에 들어가 구독신청을 하고, 기부금을 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