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중항쟁 29주년을 맞아,
김수지 전 전남대신문 편집국장이 '독설닷컴'에 좋은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와 지난해 '촛불'을 비교한 글인데, 꼼꼼히 읽어볼만한 글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29년전 광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김수지님은 지난해 촛불과 1980년 오월 광주가
- 학생들로부터 비롯되었다.
- 민주주의를 외쳤다.
- 언론에 의해 왜곡되었다.
라는 점에서 많이 닮아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닮은 꼴 많은 ‘촛불’ 과 ‘5·18 광주민중항쟁’
“시대는 다르지만 ‘민주’, ‘자유’를 향한 외침은 뜨거웠다”
김수지 (전 전남대신문 편집국장)
뜨거웠던 지난 해 촛불 함성. 그러나 뜨거운 ‘촛불’들의 커다란 함성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촛불’ 1년이 지난 지금, 촛불은 다시 타오르기도 전에 심지부터 잘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5월, 광주다.
5월, ‘촛불’ 1년과 ‘5·18민중항쟁’ 29주년을 맞아 이 두 운동의 연결고리와 차이점,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싱싱한’ 이들의 ‘신선한’ 등장
지난 해 5월, 서울 광화문에서부터 촛불이 총총거리기 시작했다. 전 국민이 알다시피, 촛불 아이콘이 되어버린 ‘촛불 소녀’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많지 않은 숫자였지만 이들의 촛불은 뜨거우면서도 차가웠다. 그들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중․고등학생들이 실제로 비판의식을 갖고 촛불을 들었느냐’ 하는 것은 사실 확인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촛불을 들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1980년 5월 그랬던 것처럼.
1980년 5월 운동도 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1980년, 5월 14일과 15일 27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서울 광화문, 종로, 서울역 등지에서 학생, 시민들과 함께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후 5월 17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했고 5월 18일 오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를 당함으로써 광주의 잔혹한 5월이 시작됐다.
‘촛불’과 5·18민중항쟁은 모두 학생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 모두의 참여로 확산됐다. 5·18민중항쟁에 중학생, 고등학생, 한 가정의 가장 등 정부의 악랄함에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탈취당한 분노한 광주 시민 모두가 거리로 나왔다. 지난 해 ‘촛불 정국’ 때도, 시작은 고등학생이 했지만 이후 ‘유모차 부대’, ‘예비역 부대’ 등과 같은 ‘촛불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시민사회 전 계층 구성원들이 참여해 거리를 밝혔다. 머리로만 배웠던 김수영 시인의 ‘풀’이 가슴으로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이상 생략…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이하 생략)
‘촛불’과 ‘횃불’은 정말 다를까?
지난해 ‘촛불’을 들었다면, 80년 5월에는 ‘횃불’을 들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촛불’과 ‘횃불’의 뜻은 조금은 달리 보일 수 있다. 80년 5월의 ‘횃불’은 민주주의국가에서의 반민주 독재를 참을 수 없었던 광주 시민들이 ‘자유’와 국가의 ‘민주화’를 요구하고자 타오른 것이다. 반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지금(?)의 ‘촛불’은 국민의 건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며 하나씩 타올랐다. 언뜻 보면 다르다. 하지만 ‘촛불’이 가장 성대하고 강렬한 빛을 뿜어댔을 때, 지난해 ‘촛불’이 80년 5월의 ‘횃불’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에 든 것이 ‘횃불’에서 ‘촛불’로 변했을 뿐, 결국은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무엇일까. 국민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면서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지켜주지 않았다. 때문에 촛불이 처음 켜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처음의 기치였던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슬로건이 ‘2MB 정부 OUT’으로 바뀐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80년 5월의 ‘횃불’이, 그들이 일구어 놓은 민주화의 후퇴를 역겨워 하며 2008년 5월 ‘촛불’로 다시 타오른 것은 아닐까.
‘왜곡(歪曲)’에 ‘곡(哭)’하다
80년 5월의 영령들이 저 세상에서도 진정 슬프고 억울한 것은 그들이 한 행동이 왜곡되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일 테다. 신군부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운동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아니,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당시 정부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광주 사태’, ‘광주 폭동’이라고 하여 광주 시민들이 가만히 있는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쯤으로 하여 왜곡하여 외부에 알렸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5·18민중항쟁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날 그 때의 높은 함성과 뜨거웠던 몸짓을 광주에서 일어났던 ‘폭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충분한 물리적,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촛불 정국’ 때도 다르지 않다. 수많은 국내·외 언론들이 ‘촛불’의 ‘대장정’을 신문에 보도했다. 그러나 그 중 진실한 보도는 얼마나 있었던가. ‘시민들이 먼저 마구잡이로 전경들을 폭행하는 등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촛불집회가 계속 된다’는 몇몇 일간지의 보도.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다’는 ‘촛불배후설’. 정부는 시위대에 색소혼합 물대포를 쏘아 무고한 ‘불순분자’를 색출해내려고 했다. 촛불 1년이 지난 지금 와서는 죄 없는 시민들과 집회를 주도하고 참여했던 시민단체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은 2차, 3차, 그 이상의 피해를 아직까지도 당하고 있다. ‘촛불 정국’의 무고한 희생자들은 29년이 지난 그 때는 5·18민중항쟁이 29년이 지난 지금 5월 영령들이 작은 위로나마 받고 있는 것처럼, 시민들의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촛불과 오월 광주, ‘껍데기’는 가라
촛불 1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이들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심각해졌다고 말한다. 맞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도 버젓이 되고 있고, 이름만 바뀌고 조금 미루어졌을 뿐 작년에 우리가 반대했던 많은 안건들이 추진되고 있다. 국가가 우리에게 주는 보이지 않는 억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때도 그랬다. 5·18민중항쟁이 끝난 직후, 그들의 요구는 무참히 짓밟혔고 ‘자유’와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무던한 외침을 발판으로 하여 87년 ‘서울의 봄’이 왔고, 오늘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4·29 재보선 때도 국민의 ‘심판’이라면 ‘심판’도 있지 않았는가. 투표율과 지지율 등을 모두 떠나서, 결과만 보면 명백한 ‘국민의 심판’이 있었다. 정치인들은 이제야 ‘국민의 소리’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촛불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정부와 우리 스스로에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고, 저항하는 법을 몰랐던 중·고등학생들, 특히 대학생들은 이제 ‘잘 싸우는 법’을 알게 됐다. 또한 ‘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거리로 나갔을까?’ 하는 고민에 대한 희미한 답도 얻을 수 있게 됐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닮은 점이 많은 5·18민중항쟁과 ‘촛불 정국’. 5·18민중항쟁 29주년을 맞아, 아직도 해결하지 못 한 국가 민주화를 향한 과제들을 풀고 우리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위해 또 다른 촛불을 들어야 할 때다. ‘껍데기’는 가고, ‘정신’만 오롯이 남겨 각자의 촛불을 들어 보자. 그리고 조용하고 강렬하게 외치자. 5월의 민주 영령과 스러져간 촛불을 기리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태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임의 행진곡> 中)’
■1980년 5월 민주화운동과 2009년 ‘촛불’ 주요 사건일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18.=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당함.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까지 행진, 항의시위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5.19.=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수만 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20.=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5.21.=시외전화 두절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5.22.=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23.=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5.24.=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25.=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26.=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시킴.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27.=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2008년
3.5.=미 무역보고서, 한국에 쇠고기시장 전면개방 촉구
4.11.=한미, 쇠고기 수입조건 개정 협상 재개
4.28.=야 3당, 쇠고기 상임위 청문회 개최 합의
4.29.= MBC,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방송
5.2.=‘미 쇠고기 수입 반대’ 1차 촛불집회. 정부 ‘광우병 괴담’ 해명 관계부처 기자회견
5.6.=당정, 쇠고기 원산지표시 확대 추진. 서울경찰청장 “앞으로 정치구호가 등장하면 처벌하겠다” 1,513개 단체연합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출범
5.7.=서울시교육감이 중고생들 참석에 전교조를 배후로 지목. 국회 농해수위 미 쇠고기 수입 청문회. 야당 재협상 요구. 농림장관 “미 광우병 발생하면 수입중단”
5.9.= 대책위 주관의 1차 촛불문화제. ‘미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전국 각지로 확산.
5.14.=농림장관, 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 7~10일 연기
5.17.=제16회 ‘미 쇠고기 반대’ 집회 전국 36곳서 열림
5.20.=한.미 쇠고기 검역주권 명문화 합의 발표
5.24.=제23차 촛불집회 후 첫 거리 시위 및 밤샘 집회, 민심분노, 최초 도로점거, 최초 끝장시위, 어청수 현장지위, 물대포 발사, 최초연행 51명
5.27.=10대→386세대로 참가자 변화양상, 최초 평화예비군 등장, 경찰 토끼몰이식 강제진압, 경찰 촛불 집회 주최자 10명 소환
5.29.=정부, 美 쇠고기 고시 발표 강행
5.30.=대학가 촛불 움직임 감지, 유모차 부대 등장
5.31.=제30회 촛불집회. 민심폭발, 부산에서 17년 만에 첫 도로점거, 소화기 분사, 물대포, 경찰특공대 투입, 시민228명 연행, 60명 부상, 통의파출소 앞 사망설 피해자 여성 등장
6.10.=국내 21년 만에 전국 100만 명 시위. 어청수 경찰청장이 제작한 ‘명박산성’ 등장
6.11.=연세대교수 154명 시국선언 발표
6.15.=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외에 대운하, 민영화로 의제확대
6.19.= 이명박 대통령 첫 특별기자 회견 “뒷산에서 아침이슬 들으며 자책했다”, 제1차 국민대토론회 개최
6.21.=제51회 촛불집회.
6.23.=검찰, MBC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및 광우병 보도관련 수사 착수
6.29.=시청광장 원천봉쇄. 종각서 항의집회. 수백명 시위대 종로, 을지로, 동대문, 종로, 을지로로 가두행진. 많은 사람 인도에서 체포조에 연행됨. 경찰장비 사용규정과 형사소송법등 무차별 위반, 색소혼합 물대포 사용, 시민131명 연행, 400명 부상, 강기정 국회의원 곤봉으로 폭행당함. 김재균 국회의원 소화기 분사 당함. 금속노조 파업과 조중동 불매선언.
7.5.= (50만명) 제66회 촛불집회. 일반 시민들과 함께 천주교와 개신교 · 불교 · 원불교 등 4개 종단과 통합민주당 · 민주노동당 · 창조한국당 · 진보신당 등 4개 정당의 국회의원, 민주노총 조합원 등 50여만 명(주최측 추산) 참석
8.2.=제94회 촛불집회. 기독교, 불교, 천주교 시국기도회. 백골단 투입
8.15.=제107회 촛불집회. ‘광복절’ 맞이 대책위 주관 100회 대규모 촛불문화제. 6.10집회 이후 최대 규모.
'촛불, 그 후 > 촛불 1주년 기념, 독설닷컴 촛불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촛불어록'을 모아보았습니다. (2) | 2009.05.09 |
---|---|
촛불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무엇이었나? (36) | 2009.04.30 |
"촛불은 늦잠과 늦은 깨우침을 선물했다" (국민대 총학생회장) (6) | 2009.04.27 |
여중생들이 동방신기 살리겠다고 촛불 시위를 시작했다고? (8) | 2009.04.22 |
촛불은 당신에게 무엇이었습니까? (촛불문학상 공모전) (7) | 2009.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