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 월간고재열
  • 어른의 허비학교, 재미로재미연구소
정치 언저리뉴스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고? 뭉치는 진보도 있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5. 21.

 
보수와 진보에 관한 고전적인 격언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격언을 무색하게 만드는 현상이 요즘 나타나고 있다. 보수가 분열로 망해가고, 망했던 진보가 연합해서 일어서는 것이다. 4·29 재·보선 이후 보수 세력은 ‘삼분 오열’ 상태다. 민주당 역시 주류와 정동영계가 갈등하고 있다. 이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진보대연합’을 구축할 수 있을까.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과 이회창으로 나뉘었던 보수는 다시 총선을 거치면서 이회창·이명박(이재오)·박근혜로 삼분되어 수도권(이재오)과 충청(이회창), 영남(박근혜)으로 갈렸다. 특히 4·29 재·보선 참패 이후에는 책임 소재를 놓고 이명박계와 박근혜계 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 분열된 보수 대열에 민주당까지 합류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며 진보 정당의 입지를 위협했던 민주당은 지난 10년간 중산층과 서민을 힘들게 만든 후 최근 ‘중도 우파’로 좌표를 옮겼다. ‘뉴민주당 플랜’을 선보이며 성장주의 노선에 편승한 민주당은 당 주류와 정동영계가 갈등하면서 수도권과 호남(전북)으로 분열되는 양상이다. 

‘중도 우파’ 혹은 ‘우파’ 주류 정당이 내부 투쟁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진보 정당에게는 기회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우파에 속하므로 이론적으로 나머지 절반인 좌파 몫은 오롯이 진보 정당의 것이다. 게다가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경제 위기와 양극화 심화로 진보 정당과 진보 정치인이 부각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세를 넓혀가고, 프랑스에서는 반자본주의당의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이런 국내외 환경은 진보 정당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지난해 총선 이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나타난 국민 정서의 양태는 ‘반이명박 비민주당’이다. ‘국민은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에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대안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4·29 재·보선에서 증명되었다. ‘반MB 연대’ 벨트를 형성했던 진보는 과연 제 몫 찾기를 할 수 있을까?


울산 북구 선거로 ‘진보대연합’ 계기 마련

첫 단추는 제법 그럴듯하게 꿰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울산 북구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승리를 일궈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이명박 비민주당’의 최대 수혜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로 나타났다. 촛불집회 이후 형성된 ‘반MB 연대’의 민심은 민주당을 비켜가고 진보 정당을 건너뛰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착지했다. 박 전 대표가 ‘반이명박 비민주당’이라는 ‘민심 대마’를 잡고 차기 주자 입지를 굳혔다.

대중의 정치적 기대심리는 아직 진보 정당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짝퉁 진보’라고 비난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곁불을 쬐던 진보 정당은 지난 10년 동안 독자 입지를 만들지 못하고 이들 정부와 쇠락을 함께했다.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진보 정당은 ‘진보’하지 못하고 ‘퇴보’했다. 권영길 의원이 출마해 대선에서 인물의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던 진보 정당은 총선에서는 분열로 또 한번 실망을 안겨주었다. 민주노동당은 17대 때의 절반에 불과한 5석을 건졌고 진보신당은 원내 진입에도 실패했다.

두 진보 정당은 이번 4·29 재·보선을 통해 어렵게 반등 계기를 마련했다. 조승수 의원의 당선으로 진보신당은 원외 정당의 설움을 끝냈고, 후보를 양보했던 민주노동당은 지지율이 두 자릿수로 상승하는 등 반사이익을 얻었다. 울산 북구 선거 승리는 ‘뭉치면 산다’는 고전적 진리를 확인케 해줘 양 정당 통합운동에도 탄력이 붙었다. 형식과 방식에는 이견이 있지만 통합이라는 방향 자체에는 대체로 찬성한다. 남아 있던 민주노동당은 ‘집토끼’를 지키는 데 실패했고 떠난 진보신당은 ‘산토끼’를 잡는 데 한계를 보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조직의 근간인 민주노총이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았고 진보신당은 지지율 정체라는 벽을 쉽게 넘지 못했다.


'반이명박 비박근혜 = 민주당' '반이명박 비민주당 = 박근혜' 프레임 극복해야

이제 진보 정당의 과제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척점에 박근혜 전 대표나 민주당이 아닌 자신들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반이명박 비박근혜’의 답이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 정당이라는 것, ‘반이명박 비민주당’의 답이 박근혜가 아니라 진보 정당이라는 것, 이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바로 진보 정당의 과제다. 이 과제를 푸느냐 못 푸느냐에 진보 정당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진보 정당이 ‘반이명박 비박근혜’ 혹은 ‘반이명박 비민주당’의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은 진보 정당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두 정당의 의석을 합쳐도 교섭단체 구성에도 못 미치는 6석밖에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진보 정당을 존재감 없는 ‘투명 정당’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진보 정당을 ‘투쟁 정당’으로는 인정해도 ‘수권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마이너리그팀이 왜 메이저리그팀이 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보 정당의 최대 과제다”라고 말했다. 

특히 스스로도 ‘수권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총선 직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고참 정치부 기자가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에게 “어떤 집권 구상을 만들고 있나”라고 물었다. 강 대표는 “지금 만드는 중이다”라고 답했다. 6개월 후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 정치부 기자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강 대표에게서 돌아온 답은 여전히 “지금 만드는 중이다”라는 것이었다.

진보 정당이 존재감을 회복할 방법은 바로 통합을 통한 덩치 키우기다. 당 대 당 통합이든 선거연합이든 ‘진보대연합’의 구도를 만들어야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절체절명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 내에 통합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마화용 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진보 정당이 정치적으로 진보를 한다는 것은 바로 대중정치를 하는 것이다. 통합은 대세다. 현장 조합원의 80% 이상이 통합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급진적 통합파'와 '점진적 연대파' 통합논의 갈려

통합 논의는 크게 둘로 갈린다. 신속하게 통합해서 정치적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자는 논리와 양 정당이 각자 발전하되 전략적 제휴를 하자는 논리다. ‘통합파’는 진보 정당의 ‘집토끼’라 할 노동자와 농민이 실제 선거에서 진보 정당 후보를 지지하게 하기 위해서는 통합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연대파는 두 당이 각자 특장을 살려서 선거에 적절하게 연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대체로 민주노동당 측에 통합파가 많고 진보신당에 연대파가 많다. 민주노동당 쪽은 ‘집토끼’가 믿고 지지할 수 있도록 합당해야 한다는 견해이고 진보신당 쪽 관계자들은 함께 탈당한 당원보다 새로 유입한 당원이 많다며 ‘산토끼’를 더 잡기 위해서는 선거연대 방식이 더 적합하다는 의견이다.   
  
4·29 재·보선 울산 북구 선거는 통합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았다. 후보 단일화 과정에 관여했던 진보신당 정종권 부대표는 “두 달 동안 서른 번이나 만나서 협상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부부가 헤어지면 남보다 더하다는 말을 실감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단일화 방식을 양보했고 민주노동당은 결과에 승복함으로써 단일화의 모형을 만들어냈고 승리를 일궈냈다.

오는 10월 재·보선에서도 이런 비슷한 단일화 모형이 도출되리라 예상된다. 서울 은평을 선거가 확정될 경우 심상정 후보를 중심으로 한 단일화 논의가, 안산 상록을 선거에서는 임종인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단일화 논의가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전 의원의 경우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소속은 아니지만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번 재·보선 당시 시흥시장 시민후보를 지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 정당들이 지지하리라 예상된다.

내년 6월 지방선거와 관련해서는 좀 더 큰 틀의 단일화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울산 북구청장이나 울산 동구청장과 관련해서는 당연히 단일화가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울산시장 후보를 민주노동당 후보로 내세우고 서울시장 후보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를 내세우는 안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이 이야기되고 있다.


'종북주의' '패권주의' 논쟁에 여전히 발목 잡혀

그러나 진보 정당의 ‘장밋빛 미래’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단일화 논의에는 암초가 있다. 바로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패권주의’에 관한 논쟁이다. 민주노동당 내 일부 세력은 이와 관련해 ‘선 사과, 후 단일화 논의’를 주장하는 반면 진보신당은 이 문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이 논쟁에서 양 당은 아직 타협안을 찾지 못했다.

‘종북주의’ ‘패권주의’ 논쟁은 재·보선 이후에도 꼬리를 물고 진행되었다. 논쟁의 구실이 된 것은 조승수 당선자가 이에 대해 명확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선거 중간에 민주노동당 박승흡 대변인의 사퇴까지 초래한 이 논쟁은 선거가 끝난 후에도 이어져 강기갑 대표의 리더십을 문제 삼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최한 ‘4·29 재·보선 평가와 진보 정치의 과제(5월13일)’ 토론회에서 오병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종북주의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해야 단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두 당의 감정 골이 아직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은 단일화의 적이다. 진보 정당과 관련해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는 내부 정치의 논리가 외부 정치의 논리를 승한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진보 정당이 내부 정치투쟁에 쏟는 에너지의 10분의 1만 외부 정치에 썼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장했을 것이다. 적어도 정치세력이라면 대중이 관심을 가진 문제를 가지고 싸우거나, 아니면 싸우는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니다. 한심하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진보대연합’을 위한 전제조건인 ‘분열하면 다 망한다’는 공감대가 양당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은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진보 세력은 분열로 자멸했다. 후보를 따로 낸 선거구 24곳에서 전부 패배했다. 이런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가 뭉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라고 말했다.

통추위 등 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진보 정당 관계자들은 진보단일화가 성과를 거둔다면 진보 정당은 ‘지역 기반’ ‘계급 기반’ ‘세대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지역 기반’과 관련해서는 노동자 도시인 울산시·창원시와 한·미 FTA 직격탄을 맞는 농촌 지역이 꼽힌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농촌 지역에 권력 공백 지역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농촌 벨트를 형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방선거 앞두고 양당 모두 ‘대중정치’에 관심 증대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는 호남 지역 역시 전략 지역으로 꼽힌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호남이 ‘반이회창, 비이인제’ 카드로 노무현을 선택했듯이 ‘반이명박, 비민주당’ 카드로 진보 정당을 선택해줄지가 관건이다. 4·29 재·보선에서 그 단초가 형성되기는 했다. 민주당의 아성으로 알려진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각각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의원이 당선되었다(22~24쪽 딸린 기사 참조). 재·보선 전후로 정치 여론조사를 실시했던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호남에서 진보 정당에 대한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 선거 직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이 제법 올랐다. 앞으로도 호남에서 선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진보 정당이 단일화되어 한목소리를 낸다면 비정규직 문제나 한·미 FTA 문제, 혹은 교육자율화 문제 등 다양한 문제 제기를 통해 ‘계급 기반’과 ‘세대 기반’도 확보해 일본 공산당처럼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분석한다. 신자유주의 정책 일변도로 가는 이명박 정부를 확실히 견제해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수 정치 세력이 분열된 상태에서 치르게 될 내년 지방자치 선거가 진보 정당에게 기회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일본 공산당도 지방선거에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진보 정당은 일본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풀뿌리 조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진보 세력이 통 큰 정치를 해야 한다. 통을 키우면 그 통의 크기만큼 국민의 신뢰도 커질 것이다. ‘자기를 버릴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뉴민주당 플랜’에 필적할 ‘뉴진보 플랜’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진보 정당은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에 막혀 한 번도 나래를 펴지 못했다.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사슬이 풀리고 우파 정당이 분열한 지금이 진보 정당에게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두 진보 정당은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


주> 시사IN 88호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