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는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수십만명의 조문객을 소화했습니다.
추모용품은 모두 스스로 조달해서 사용했습니다.
오늘 새벽 경찰이 그 시민분향소를 짓밟았다는 소식에 눈물이 났습니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과 함께 7일장 기간 동안 계속 시민분향소를 지켰던
정범구 민주당 대외협력위원장(전 국회의원)이 장례를 마치고 글을 한 편 보내왔습니다.
7일장을 치르며 자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정리한 좋은 글입니다.
오늘에야 눈물이 납니다
- 노무현과의 화해
글 - 정범구 (전 국회의원, 민주당 대외협력위원장)
당신을 떠나 보내는 마지막 날,
오늘에야 눈물이 났습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당신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고 나선 수많은 시민들이 찾은 대한문 앞에 당신은 한그루 소나무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는데,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영정을 바라보는 문상객들의 눈빛이 너무 깊고 슬퍼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신은 제게는 참 야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열린 우리당 창당에 끝까지 반대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개혁 세력은 아직 소수인데, 그 소수 마저 분열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당은 현실이 되었고, 저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했습니다.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갔습니다.
바깥에서 정치를 바라보던 제게, 당신은 여러번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라크 파병 강행 때가 그랬고, 한미 FTA 타결을 위해 광화문 거리 곳곳에 전경까지 배치해 두던 모습에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비정규직법 이야기는 접어 두렵니다. 아직도 속이 쓰리니까요.
그렇게 저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해서 지난 7일 동안 대한문 앞 빈소를 꼬박 지키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며 몸을 날리셨던 부엉이 바위 앞까지도 다녀 왔습니다.
당신께서 생사의 경계를 넘는 발걸음을 내디셨을 때 어떤 생각들이 흉중에 오갔을지, 부질없이 더듬어 보기도 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라 했는데 혹시 “자유”를 느끼셨던 것은 아닐까? 평생을 싸워도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 이 완고하고 집요한 사회에 대해 당신은 이제 “공익근무해제” 신청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가지 마오, 가지 마오, 가지 마소서...”
피울음으로 부르는 것 같은 남자 가수의 노래가 끊임없이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분향소 안으로 밀려 들어 옵니다. 어린 아기에서부터 혼자는 거동 조차 힘들어 보이는 어르신들까지, 국적이 제각각인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두번 반의 절을 따라 합니다. 아침 일찍 등교해야 할 학생들이 한밤중이 넘도록 덕수궁 돌담을 따라 서 있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리 한쪽이 없는 한 아주머님이 흰 소복을 입고 오셔서 누구의 부축도 없이 큰 절을 하고 가셨습니다. 어제 밤에는 두시가 가까운 시간인데 저희 동네분들을 만났습니다. 작은 식당이나 선술집을 하시는 분들이 1시에 가게문을 닫고 신당동에서 덕수궁까지 걸어 오셨다고 하는데 그때 인파로 보아서 앞으로도 두시간 이상은 서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았습니다. 무엇이 그분들을, 하루하루의 삶이 충분히 피곤한 그이들을 당신의 빈소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빈소를 지키는 일주일 내내 저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 질문들은 또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15초면 되는, 게다가 에어컨 빵빵하고 화장실 역시 걱정 없는 서울 역사박물관 빈소를 놔두고 굳이 그 뙤약볕 아래, 아니면 새벽을 바라보는 그 늦은 시간에 몇시간씩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하는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를 찾는 것인지요?
대한문 앞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사람사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혹시 80년 5월 광주가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배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충분히 녹아 있는 그런 세상. 선한 이들이 협심하여 이루어 내는 선한 세상은 올바른 지도자들만 나온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회. 지난 7일간 대한문 앞에서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보여 줬던 모습은 그런 모습들이었습니다.
지난 1주일간, 이렇게 가깝게 당신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2002년 겨울, 대선운동 기간 중의 긴박했던 시간과 그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들도 떠오릅니다. 일산에서 유세를 마치고 불과 15분만에 김포공항까지 달려가던 일, 정몽준씨와의 사이에 얽혔던 여러 일들. 유세과정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오늘 어떤 아주머니가 제단에 만원을 올려 놓고 가더군요. 문득 2002년 12월 18일이었나요? 투표일 하루 전, 명동 유세 때가 생각납니다. 아침에 부산에서 올라와 연신내부터 시작한 서울 유세가 열두 곳인가를 거쳤는데 하이라이트가 명동 유세였죠. 명동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다음 유세장소인 종로로 떠나신 후, 쉽게 헤어지지 않는 청중들을 위해 남은 저와 누군가(문성근씨였나요?)가 “잔불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무대를 향해 올라오는 수많은 손들이 있었습니다. 선거에 써달라고 저마다 1-2만원씩을 건네던 손들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쯤 아주 가벼워진 육신으로 다시 고향마을로 내려 가셨겠죠?
시청 앞에서부터 끝없이 당신의 운구행렬 앞을 막아서던 수많은 민초들도 지금은 어디에선가 당신과의 추억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을겁니다.
아! 시청 앞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고 하네요. 전경 버스들로 숨막혀 있던 시청 앞 광장이 당신 덕분에 뚫렸습니다. 언제 다시 막힐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이제 역사가 되셨습니다.
이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일은 또 우리의 몫이 되겠군요.
당신이 하지 말라고 하셨던 “정치”를 저는 다시 붙잡고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예감 보다는 여전히 실패에 대한 불안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진 않겠습니다.
삶과 죽음은 여전히 하나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지켜 보고, 그리고 지켜 주십시오.
평안히 쉬시구요.
2009년 5월 29일 밤 11시 55분
정 범 구 올림
다음은 '독설닷컴'의 제안입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음악회를 기획 중입니다.
'바보 노무현, 희망 음악회(가칭)'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시기 바랍니다.
누리꾼 여러분이 함께 기획했으면 합니다.
일단, 사회는 김제동씨가 보는 게 좋겠지요?
그리고 이 추모음악회를 시작의로 '제2의 희망돼지' 운동을 벌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민주주의 재단'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의 죽음을 '친노 정치 세력화'와 같은 정치이슈에 묻히지 않게 하고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시민이슈를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슬픔과 분노는 이제 그만 자제하고
노무현이 우리에게 던진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살려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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