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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논객 열전/문제적 논객 변희재

내가 변희재에게 항복선언을 하는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6. 3.



이 글은 며칠 전 변희재가 자신이 운영하는 뉴스사이트 <빅뉴스>에 올린
‘고재열은 진중권과 함께 퇴출당할텐가’ 라는 제목의 협박문에 대한 항복선언문이다. 

(원문 주소 : 고재열은 진중권과 함께 퇴출당할텐가  http://bignews.co.kr )

변희재가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비니,
죽는 시늉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올린다.

나는 변희재에게 졌다.
나는 변희재와 바둑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변희재는 나와 알까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알까기에는 재주가 없다.
기권하겠다.

비록 졌지만,
진 것으로 인해 내가 변희재의 반대쪽에 서있는 블로거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특히 ‘진보사냥꾼’ 변희재의 사냥감 목록에 손석희 진중권 등 유명인들과 함께 오르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알겠다. 


변희재를 안지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변희재도 참 많이 변했다.
그의 트집잡기가 영 아니다 싶어 비공개논쟁을 왕왕 벌이곤 했다.
그런데 결국 서로 발톱을 숨기지 못하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치고받으며 쪽을 팔게 되었다. 
(치고받으면서 서로 키워주는 것 아닌가 하고 한가하게 해석하시는 누리꾼들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 새삼 깨닫게 되었다.
변희재는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달인이었다.
그는 자살자를 조롱한 진중권을 비판하면서 같은 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조롱했다.
‘네가 조롱하면 폐륜이고 내가 조롱하면 고언’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그럴듯하게 조롱하라’라는 것일까?

(원문 주소 : 노대통령 장례 국민세금 들이지마  http://bignews.co.kr )

정몽헌과 남상국의 자살을 조롱한 진중권을 비판했으면 함부로 자살을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우리같은 범상한 사람들은 결론을 내곤 한다.
그런데 변희재는 전직대통령으로서 ‘장수의 의무’를 어긴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는 세금을 1원도 쓰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처음 이 글을 읽고 나는 일종의 ‘자해공갈 칼럼’이라고 생각했다. 
진중권에게 기스를 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을 한다고 해석했다.

변희재는 이 글을 통해서 진중권이 이전에 저질렀던 실수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내상도 컸다.
조선일보가 돌아앉았다.
물론 변희재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내상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들이 ‘조선일보가 변희재를 이용한다’고 보는 동안 그는 ‘내가 조선일보를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카드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 것이다.

변희재는 또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측근들의 이익만 따졌다며, 이를 조폭 보스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조폭 보스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측근들을 희생시키는 보스였다.
그러나 변희재가 본 조폭 보스는 측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자신을 위해서 측근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측근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폭 보스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나 변희재에게는 그것이 조폭 보스의 증거가 된다.

나는 그와의 알까기 시합에서 이길 수가 없다.

변희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이타적 자살’로 해석했는데, 
그 죽음을 격하하는 이유가 이타적 행위의 범위가 좁다는 것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가족과 측근의 안위만 걱정했다는 것이다.
무슨 자살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것도 아니고, 자살의 명분이 협소하다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
역시 변희재는 난놈이다. 

변희재의 매력 중 하나는 고의로 텍스트를 오독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자살이라서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변희재에게
그렇다면 (죽음을 자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도 자살로 밝혀진다면 그도 비판받아야 되는 것인가 하고 말했더니,
그는 장수가 싸우러 나가지 않고 자결한다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라고 반박했다.
이렇게 나오면 나는 ‘그러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의 복잡한 죽음에 대해 ‘싸움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으로 전제해버리는 이런 알까기에 나는 맞설 수가 없다.

변희재는 진중권의 글도 오독했다.
진중권이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이게 당게에 올리는 나의 마지막 글이 될 겁니다. 인터넷에 뻘글이나 올리는 별 볼 일 없는 나도 저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그 치졸하고 유치하고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이제 나 홀로, 내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글을 올리자,
진중권이 절필 선언을 했다며 승전 선언을 했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선전포고다.
그리고 진중권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성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변희재는 반성한지 이틀만에 나댄다고 다시 공격했다.

(원문 보기 :  "문화부는 '인터넷 낭인'들의 꼭두각시인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602144351§ion=03)

상대방의 입을 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데,
논객으로서 혹은 저널리스트로서 변희재의 한계가 있다. 
우리가 언론자유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은
내 언론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나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람의 언론자유를 위해서도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변희재는 언론자유에 대한 기본 철학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진중권의 입을 닫게 했다고 기뻐했던 변희재는 ‘너도 계속 떠들면 입을 닫게 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고재열은 진중권과 함께 퇴출당할텐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너도 계속 내 비판을 하면 재미없다’는 것을 통보하는 협박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중권과 달리 나같은 듣보잡(‘고듣보’가 되나?)을 비판한다고 누가 관심을 가져줄 것도 아니고,
설혹 비판한다하더라도 나는 ‘변희재가 공격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고맙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나도 변희재에게 ‘블러핑’을 하나 해보겠다.
바둑을 알까기로 대적한 변희재에게 나는 바둑판을 엎을 수 있다고 말하겠다. 
나는 '조금만 비열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보사냥꾼’ 변희재가 여러 사람을 끌어내리고 있는데, 나는 변희재를 끌어내릴 수 있다.
(이미 변희재는 끌어내리기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높이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를 ‘나쁜 논객’으로 매도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를 비판할수록 보수세력은 그를 ‘쓸모 있는 논객’으로 판단하고 오히려 ‘청부트집업자’로 활용하려 들 것이다.

나라면 보수세력이 그를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퇴로를 여는데 집중할 것이다.
이미 ‘조선일보가 버린 논객’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를, 그가 탐내는 자리(이를테면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 자리)를 원하는 다른 ‘워너비’가 공격할 수 있게 말이다.    
‘조선일보가 버린 논객’이라는 것은 그가 ‘청부트집업자’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는데 중요한 알리바이가 된다. 

그는 ‘조선일보가 변희재를 버렸다?’라는 글을 쓰며 제 발을 저리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일찍 조선일보로부터 버림 받았다.
그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그냥 비판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만 말하지만,
혹은 진보논객을 비판하기 위해 끼워넣었을 뿐이라고만 말하지만,
우리가 버림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알리바이는 형성된 것 같다.

(원문 보기 : 조선일보가 '변희재'를 버렸다? http://bignews.co.kr)

‘조선일보가 버린 논객’이라는 것은 변희재가 스스로 공표한 부분이니 그냥 환기해본 것이고 변희재에 대한 공략 지점은 두 가지가 더 있다.
둘 다 이명박 정부가 자리를 주기 위해 사람을 스크린할 때 가장 중요하게 감안하는 부분인데, 변희재는 이 부분에서 걸린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이것은 ‘블러핑’이니까.
그리고 변희재를 까낸다고 해서 변희재보다 나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정부 하에서 변희재를 비판하는 것은 ‘졸라’ 무의미하다.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변희재를 관찰하겠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정말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