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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귀농

노무현의 마지막 꿈, 그것은 '귀농'이었다 (달콤한 귀농-1)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9. 28.



도시인들에게는 '귀농로망'이 있습니다.
'언젠가 귀농(혹은 귀촌)하겠다. / 그러나 농사는 힘 들어서 못짓겠다. /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적으니 돈벌이는 하고 싶다'라는 것이 '귀농로망'의 핵심입니다. 

이런 '달콤한 귀농'이 가능할까요?  
'독설닷컴'에서는 오늘부터 추석연휴까지 전국 각지의 귀농인을 대상으로 한 취재결과를 공개하며 이에 대한 가능성을 짚어보겠습니다.

귀농인 취재 중 고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렵게 사례를 찾아 현장에 가보면 노 대통령이 이미 다녀갔던 곳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노 대통령의 고민은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2 제3의 귀농인들이 '노무현의 못다한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맨 먼저 전남 함평군의 김요한 목사 이야기입니다.




인생 2모작 가꾸는 '달콤한 귀농'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귀농 역사상 최고위급 귀농인이었다. 퇴임 후 고향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 전 대통령은 전국의 농촌을 답사한 후 봉하마을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리농법’을 도입한 벼농사를 시작하고 ‘장군차’ 등 소득작물을 키우고 ‘보리빵’을 만들어 팔게 하고 ‘생태연못’을 조성하는 등 관광자원화할 수 있는 ‘경관농업’을 꾀했다. 사람들의 마지막 기억 속에 그는 '밀집모자를 쓴 늙은 농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봉하마을에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 행복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밀짚모자를 쓴 채 미소 짓는 농부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한다. 비록 그의 생이 비극으로 마무리되면서 ‘농촌살리기’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광재 의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내려와 봉평 메밀을 심는 등 측근들이 그 뜻을 잇고 있다.

‘사람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 노 전 대통령은 강원도 평창군 바람마을 의야지 등 전국 방방곡곡 잘나간다고 소문난 농촌을 두루 방문했다. 전남 함평군의 ‘황토와 들꽃세상’ 역시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 주민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방문한 곳이다. ‘황토와 들꽃세상’은 김요한 목사가 폐교를 생태 체험장으로 일군 곳이다. 김 목사는 방문에 답하는 뜻에서 봉하마을에 생태연못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평생 직업인 목사직을 포기하고 귀농을 결심한 김 목사는 2004년 아무 연고가 없는 함평군 오두마을의 폐교를 찾아왔다. 100년 이상 된 벚나무 여섯 그루가 있는 폐교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방치된 폐교가 있는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김 목사는 이 폐교를 개조하기로 결심했다. 

김 목사는 폐교를 4계절 생태체험이 가능한 곳으로 바꾸어나갔다. 관광자원이 되는 경관농업을 배우기 위해 일본 홋카이도를 두 번이나 답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재활용한다는 것과 시설 만들기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농촌은 목욕하고 얼굴만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도 경쟁력 있는 경관이 된다. 있는 것을 변형하지 않고 가꾸기만 했다”라고 말했다. 

폐교 안팎에 들꽃을 심고 뒷산 언덕에 국화를 심었다. 마을 주민을 설득해 밭에는 해바라기를 심었다. 온화한 기후를 활용해 겨울에 피는 인동초·복수초·노루기 같은 꽃도 심었다. 그리고 함평나비축제를 겨냥해 제비꽃처럼 나비가 좋아하는 보라색 계통의 꽃을 많이 심었다. 그렇게 해서 봄(들꽃) 여름(해바라기) 가을(국화) 겨울(인동초) 사철 꽃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5년 만에 마을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을 사람들 표정도 바뀌었다. 12가구였던 마을이 17가구로 규모가 커졌다. 김 목사는 “이사 오기 위해 대기 중인 가구도 네 가구나 된다. 금년 중으로 20가구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함평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주로 광주에서 하던 지역 모임들도 ‘황토와 들꽃세상’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았다. 

투자도 이어졌다. 전남도는 마을에 한옥 14채를 지원했다. 2000만원을 직접 지원하고 3000만원을 저리로 융자해주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마을 주민의 삶에도 변화가 왔다. 김 목사는 “1년에 한 번 오던 도회지 자녀들이 한 달에 한 번 오게 되었다. 숙박하기도 편하고 자연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김 목사의 자녀에게서 나타났다. 자녀들이 그가 어렵게 일군 체험마을을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의 무모한 도전에 반대했던, 명문대를 졸업하고 금융계에서 일하는 큰아들은 잠시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이곳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인생 2모작을 설계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성공 사례는 다분히 예외적인 경우다. 농민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현지 농민과 완벽하게 ‘화학적 결합’을 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각오가 없으면 귀농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너무나 가혹하다. 이런 대역사를 이루지 않아도, 이 정도 각오가 없어도 귀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도시인들이 가진 ‘귀농 로망’은 간단하다. ‘적당한 시기에 귀농(혹은 귀촌·귀향)하고 싶다. 그러나 농사는 못 짓겠다(짓더라도 돈벌이가 아닌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만 짓고 싶다).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충분하지 않아 적당한 돈벌이를 갖고 싶다’라는 것이다. 이런 ‘달콤한 귀농’은 불가능한 것일까.

귀농 관련 전문가들은 흔히 ‘귀농이 이민보다 힘들다’라고 말한다. 실제 귀농 정착률은 10~20% 수준으로 역귀농하는 비율이 80% 이상이다. 이 수치는 역이민 수치보다 훨씬 높다. 민승규 농림수산식품부 1차관은 “농민 관련 교육 프로그램 중에 귀농 프로그램이 가장 길다. 그만큼 사전준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귀농 수요는 꾸준히 는다. 은퇴를 앞둔 45~55세 직장인에게는 여전히 ‘귀농 로망’이 있다. 어설프게 자영업을 시도했다가 다 날리느니 귀농을 하면 최소한 살 집과 땅은 마련하고 농산물이 안 팔리면 직접 먹으면 된다는 단순한 셈법이 계속 귀농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든다. 과연 귀농이 답이 될까. 전국 각지의 귀농인을 만나보고 답을 구해보았다.  

(이하, '달콤한 귀농' 시리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