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서 수백명의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그 산간 오지에 그렇게 많은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지리산댐 건설을 막는 시위였습니다.
그 산간오지에 댐을 만든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습니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만큼 놀라웠습니다.
(아예 남산에서 설악산 거쳐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종단하는 '한반도 대케이블카'를 만드시지...)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 시위대에 오스트리아인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 알렉스는 한국인 아내와 함께 지리산댐 반대시위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시위에는 8살난 딸 레아도 함께 했습니다.
알렉스 가족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산골, 인도의 수양지, 호주의 생명공동체를 모두 거쳐본 알렉스는
지리산을 최고의 삶터로 꼽고 안착했습니다.
그 삶터를 지키기 위해 알렉스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시위를 마치고 알렉스는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목을 축였습니다.
그날 마신 막걸리는 무척 시원했습니다.
달콤한 귀농, 두 번째 이야기로
지리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남원시 산내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읽고 나시면 아마 당장 떠나고 싶으실 지도...
낭만적 귀농의 성지, 남원시 산내면
9월17일 오후, 지리산 산길에 시위대 500여 명이 등장했다. 시위대의 행진 목표 지점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용유담 일대, 지리산댐 건설 예정지였다. 시위대는 대부분 인근 남원시 산내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시위를 벌였다.
‘농부가 되러 왔더니 어부가 되라 하네’라고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한 신동명씨는 실상사 귀농학교에서 귀농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그는 “수강생 자치회에서 시위 참가를 결정했다. 이 지역에서 귀농하려는 수강생이 많은데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시위를 막는 함양군 경찰은 산내면 주민의 난데없는 ‘출장시위’에 어이없어했다. 왜 정작 댐이 건설되는 함양군 주민은 가만있는데 수몰지역도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이 시위를 오느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시위에 이어 또 한 번 전과를 올린 산내면 주민들은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동네로 돌아왔다.
여기에 들여다볼 만한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지리산댐의 애초 계획에는 산내면 일부도 수몰 지역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댐의 수위를 낮춰 산내면이 수몰 지역에 포함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그 이유는 산내면 주민이 너무나 드셌기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 주민은 보상 카드로 설득할 수 있었지만 산내면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산내면 주민에게 어설픈 보상론이 통하지 않은 것은 이 지역에 귀농인이 많기 때문이다. 산내면 일대에는 250~300명 정도의 귀농인이 거주한다. 주민의 10%를 넘는 수치다. 실상사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의 직간접 영향을 받는 이들은 댐 건설에 반대하는 주장을 알리기 위해 주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런 온갖 귀농인 때문에 땅값이 들썩거릴 정도지만 사실 산내면은 귀농인에게 적합한 농촌은 아니다. 산촌이라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귀농인의 경우 연소득 1000만원을 올리는 경우가 드물 정도다. 그런데도 산내면은 귀농인의 최고 인기 귀농지로 꼽힌다. 이유가 뭘까. 지리산댐 반대시위에 참가한 실상사 귀농학교 수강생들.
귀농인들이 지리산 생태계 지켜내
일단 심심하지 않다.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입시 미술학원 강사를 하다 귀농한 정혜지씨는 “마치 배낭여행을 온 기분이다. 배낭여행지에서 나라와 인종이 다른 배낭여행객들이 어울리듯 여기에 오면 사람들이 편견 없이 서로를 대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산내면은 ‘귀농인들의 카오산(타이의 배낭여행 밀집지역)’이라 불린다.
귀농인들이 산내면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녀 교육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근에 대안학교도 많고 귀농인 비율이 높아 다른 농촌 지역에 비해 학교에 아이들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귀농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방과후 학교 강사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다. 정씨 역시 방과후 학교 미술 강사로 일한다.
오스트리아인 남편과 함께 귀농한 이덕인씨 역시 이곳 중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3대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이곳에 이씨가 처음 들어온 때는 2005년이었다. 이후 인도로 유학한 남편을 따라 인도에서 2년 살고 다시 돌아온 이씨는 정착하기 위해 최근 지리산 오도재 근처에 집을 샀다.
동갑인 오스트리아인 남편 알렉스와 함께 오스트리아·오스트레일리아·인도 등지에서 전원생활을 두루 경험한 이씨는 산내면 일대를 최고 귀농지로 꼽는다. 그는 “이곳은 독특하다. 공동체는 없지만 공동체 의식은 있다. 이해와 배려가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모임에 가고, 딸은 딸대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씨 역시 지인들과 어울리느라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도 좋고 인심도 좋지만 문제는 어떻게 먹고사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귀농인들은 ‘배운 도적질’을 써먹게 된다. 인천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 가족과 함께 귀농한 성용숙씨는 인근 요양원에 다시 간호사로 취업했다. 성씨가 다시 간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교육비 때문이었다. 그는 “대안학교에 다니던 큰딸이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해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필요했다. 남편은 계속 농사를 짓고 나는 직업을 갖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15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인 그녀는 요양원에서 환영받았다. 인근에서는 그런 전문 간호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 명은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고 한 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맞벌이형 귀농’이 요즘 산내면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 해 농사 소득은 거의 500만~1000만원 내외이기 때문에 현금 확보를 위해서는 따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귀농인들에게 흙집을 지어주고 있는 임재경씨.
농사 외에 제2의 직업 필요
도시에서 기계를 다루던 임재경씨는 다른 귀농인과 함께 철골 흙집을 짓는 사업을 한다. 기계를 다루느라 직업병까지 얻었던 그는 다시는 기계를 만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귀농해서는 농사만 지었다. 그러나 역시 농사만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결국 임씨는 연장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가 철골 흙집을 짓는 이유는 저렴하고 실용적이고, 무엇보다 귀농인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주민은 흙집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콘크리트집을 선호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 귀농인은 흙집을 선호한다. 한옥을 짓고 살 형편이 안 되는 귀농인을 대상으로 나무 대신 철골을 써서 저렴한 흙집을 지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아궁이틀에 온수관을 넣어 난방에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전문 능력이 없더라도 농촌에는 공공근로 사업이 많아 원하면 직업을 구할 길은 열려 있는 편이다. 남편과 함께 귀농한 산내면 매동마을의 신해정씨는 문화관광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매동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이 시작하는 마을이라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 신씨는 “지리산 둘레길이 70km 정도 조성되었다. 나와 같은 해설사가 많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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