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논쟁을 일으켰던 단어 중 하나는 바로 ‘루저’였다. 한 여대생이 KBS 2TV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해 “키 180cm 이하 남성은 루저다”라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발언을 한 여대생을 ‘루저녀’라 부르면서 맹비난했고, 일부 남성 시청자들이 언론중재위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때문에 제작진은 징계를 받고 해당 프로그램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루저 플루’가 인터넷을 들끓게 했지만 한쪽에서는 이를 식히는 차가운 패러디가 작렬하기도 했다. 톰 크‘루저’를 비롯해 히스 ‘루저’, ‘루저’넬 메시, 웨인 ‘루저’, 타이거 ‘루저’ 등 키가 작은 유명인의 이름을 바꿔 불렀고 나폴‘루저’, ‘루저’ 14세, 마틴 ‘루저’ 킹 등 역사 속 인물도 바꿔 불렀다. 백설공주와 일곱 ‘루저’, ‘루저’가 쌓아올린 작은 공 등 작품 이름을 바꿔 부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크‘루저’, 스크‘루저’, 할렐‘루저’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루저 플루’의 감염성이 이토록 컸던 것은 불운한 ‘88만원 세대’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불황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줄어들어 ‘44만원 세대’ 까지 등장하는 상황에서 ‘루저’ 라는 말은 큰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루저’ 전에 이 세대에 널리 통용되던 표현은 바로 ‘잉여인간’ 이었다.
루저...잉여인간...'44만원 세대'의 슬픈 자화상
다른 세대로부터 버림 받은 ‘잉여’ 세대로서의 소외감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표현은 더 있다. ‘초식남’ 과 ‘건어물녀’ 가 대표적이다. ‘토이남’이라고도 불리는 ‘초식남’은 온순하고 공격적이지 않은 초식동물처럼 자기애가 강한 남성을 빗댄 말이다. ‘건어물녀’는 사회생활에 지쳐 집에 오면 퍼져버리는 건어물처럼 완전히 말라버린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둘 다 연애 같은 것에는 무심하고 자신의 취미와 대중문화 소비에만 집중하는 캐릭터다.
‘루저’ ‘잉여인간’ ‘초식남’ ‘건어물녀’ 등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수동적인 의미를 담은 표현이 주로 등장한 것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촛불 시민’의 이미지가 지배했던 지난해와 대비된다. 사회 변화에 대한 자신감과 역사의 주체라는 자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그 빈자리를 패배주의와 개인주의가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작아진 대중은 소비를 통한 대리만족을 추구했다. 사회를 바꾸기보다 소비하고 구매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전부터 쓰인 말이기는 하지만 ‘벌이에 버거운 소비’를 뜻하는 ‘지름신이 강림했다’ 는 표현이 더 폭넓게 쓰이기 시작했고 소비를 옆에서 부추긴다는 의미의 ‘뽐푸질’ 도 많이 쓰였다. 선망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플사의 아이폰인데 국내 발매가 늦어져 ‘담달폰’ 이라는 애칭이 생기기도 했다.
연아신 종범신 민한신 윤아신 유이신...
‘행동하는 시민’이 ‘소비하는 시민’으로 후퇴하면서 상대적으로 대중문화와 프로 스포츠는 호황을 누렸다. 대중은 스타를 마음껏 우러러 보았다. 자신이 작아진 만큼 스타는 더욱 커 보였다. 올해는 유명 선수 이름에 ‘신’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이 유행했다. ‘연아신(김연아)’ ‘종범신(이종범)’ ‘민한신(손민한)’ ‘양신(양준혁)’ 같은 표현은 이런 양상을 반영한다.
스포츠 스타뿐만 아니라 스타 연예인에게도 ‘신’이 붙기 시작했다. ‘윤아신(소녀시대 윤아)’ ‘유이신(애프터스쿨 유이)’ ‘태희신(김태희)’ 등이 쓰였는데 특히 ‘걸그룹’ 멤버에게 많이 쓰였다. 올해 대중문화 활황을 이끈 것이 걸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양강구도였던 걸그룹 판세는 카라·2NE1·티아라·포미닛·애프터스쿨·브아걸 등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확장되었다.
걸그룹은 단순 반복적인 후렴구가 쓰인 ‘후크 송’과 역시 단순 반복적인 춤동작을 하는 ‘후크 댄스’로 세대를 넘어선 인기를 얻었다. 이전에 원더걸스의 ‘텔미’와 소녀시대의 ‘Gee’가 확장해 놓은 향유층을 다른 걸그룹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새로운 향유층이 ‘걸그룹 숭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걸그룹은 살짝 도를 넘기도 했다. 걸그룹 열풍의 최정점에서 나타난 카라의 엉덩이춤과 유이의 ‘꿀벅지’ 논란이 대표적이다.
걸그룹이 쏟아져 나오면서 19~20세의 아이돌 스타 나이는 15~16세까지 낮춰졌고 20대 중·후반의 ‘중고 신인’도 덩달아 인기를 얻으며 ‘성인돌’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누리꾼들은 성형수술을 한 연예인들도 ‘성형돌’이라며 이 대열에 끼워주었다. 이 와중에 여성 팬들은 꽃미남 외에 ‘초콜릿 복근’을 지닌 2PM 멤버들과 같은 ‘짐승돌’을 쫓아다녔다.
미실의 '에지 있는' 카리스마 돋보여
대중의 스타 숭배에 연예인들은 드라마 <스타일>의 김혜수처럼 ‘에지 있게’ 스타일을 뽐내며 자신을 일반인과 차별화했다. 이 스타일 싸움의 선봉에도 걸그룹이 서 있었다. 스타일에서 앞선 스타의 존재감은 점점 커졌고 그 ‘여신’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여배우들>이라는 영화가 등장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스타일의 정점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었다. 미실은 <태조왕건>의 궁예(김영철)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 정도만 도달했던 ‘주인공보다 빛나는 악역’ 이른바 ‘슈퍼 악역’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궁예와 장준혁의 죽음에 그랬듯이 시청자들은 미실의 죽음에 애도하고 안타까워했다.
미실은 ‘슈퍼 악역’의 열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매력이 있다, 카리스마가 있다, 철두철미하다, 판단력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충성을 이끌어낼 줄 안다, 비열함을 설명해낼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을 질투하지 않는다, 신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죽는다. 이 조건에 모두 해당되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썹을 씰룩이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카리스마를 십분 드러낸 고현정의 열연은 <선덕여왕>을 ‘시청률 여왕’으로 끌어올렸다.
이렇듯 스타 숭배가 절정에 달하면서 낙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숭배 대상인 스타가 결혼하면, 혹은 애인이 밝혀지면 대중은 ‘품절남’ ‘품절녀’ 가 되었다며 애도했다. 대중은 스타의 결혼과 연애에 절망하고 이혼과 결별에 환호했다. 신들이 벌이는 ‘사랑의 향연’에 전에 없이 큰 관심을 보였다. 현빈·송혜교 커플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장동건·고소영 커플이 커밍아웃하자 낙담했고 곧이어 소지섭·한지민 열애설까지 터지자 절망했다. 보통은 조용히 실망하지만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악다구니처럼 따져 물었다. 설경구는 전처와 이혼하고 처녀에게 장가간다며, 이병헌은 여자친구를 비정하게 버렸다며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대중의 스타 숭배에서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다. 대중은 신전에서 추방된 신에 대해서도 결코 애정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윤도현에 이어 김제동까지 사회참여 활동 때문에 방송사에서 퇴출당하자 그들을 위한 지지대를 만들어주었다. 윤도현·김제동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를 외치며 둘의 공연 무대를 발 디딜 틈 없이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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